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살로 된 풍경, 빈타 디아우(Binta Diaw)
김아정
신은 죽었다. 그 대신 수많은 여신이 살아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여신에게서 나고 여신에게로 돌아간다.1)
세네갈계 이탈리아인 시각 예술가 빈타 디아우(이하 디아우)는 다양한 규모의 설치 작업과 조각·사진·퍼포먼스·드로잉을 통해 인종적·사회적 정체성을 신체의 요소로 가시화하고 풍경으로 확장한다.2) 제15회 광주비엔날레 본관의 3전시실에서는 디아우의 〈신체 풍경 Paysage Corporel〉 연작(2020-2021)을 만나볼 수 있다[도 1]. 인간뿐만 아니라 기계, 사이보그, 동물, 영혼, 유기 생명체를 위시한 모든 것이 주체가 되고 인류세, 기후 위기, 여성주의, 다원주의, 탈식민주의 등의 수많은 사안이 주제가 되는 광대한 토론의 장에서 디아우는 다시 자연을, 그리고 여성의 몸을 유심히 들여다보기를 제안한다.
작가는 먼저 자기의 몸을 클로즈업 기법으로 촬영 및 편집하여 산악 지형을 만들고 면지(cotton paper)에 인쇄한다. 몸의 선과 형태를 따라 파스텔로 그린 큰 줄기들과 거기에서 파생된 작은 줄기들은 혈관, 식물의 뿌리, 뻗어나가는 생명력 또는 끝없이 갈라지는 길을 연상케 하며 몸과 그림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종국에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도 2]. 면지는 피부의 질감을 보다 도드라지게 만들어 마치 토양의 표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노톤으로 인쇄된 몸과 피부는 강렬한 색의 파스텔 선과 만나 강한 대비를 이루는데, 작가는 고통과 기쁨을 경험하고 투쟁한 저항의 지표로 여성의 ‘검은 몸’을 해석한다. 살에 그린 땅은 관람자로 하여금 성적 대상화되지 않은 몸을 톺아보게 만든다.
여성의 몸을 대지에 겹친 디아우의 작업은 여성과 자연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조명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지모신 가이아(Gaia)를 염두에 두었을 때, 여성인 작가의 몸을 대지에 비유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영어권에서는 관용적으로 지구나 땅을 ‘어머니 대지(mother earth)’라고 표현하며 특히 이탈리아어에서는 지구나 땅을 가리키는 ‘테라(terra)’가 여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대지와 여성이 공통으로 가지는 출산과 양육의 생물학적 기능에 기인할 뿐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는 순환적 움직임에 대한 숭고함과 경외심으로 귀결된다. 작가는 거시적인 자연을 미시적인 개인의 몸으로 재현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의 뿌리 깊은 연속성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하고 관람자는 새삼 이를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인이자 아프리카인인 디아우의 작업은 가이아 뿐 아니라 서아프리카의 토착 신이자 물의 여신인 마미 와타(Mami Wata)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서아프리카의 민속신앙에서 마미 와타는 신성한 의식을 구현하는 정령이자,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남성을 위협하는 바다 괴물, 즉 일종의 사이렌(Siren)으로서 숭배되었다. 마미 와타는 또한 뱀이나 인어의 형상을 띠었으며 미래를 예측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초감각적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대 아프리카 모계 전통과도 연관되었던 이러한 토착신앙은 이후 아프리카 지역의 자치권과 여성의 권력을 박탈하려는 식민지 개척자 및 기독교 집단에 의해 악마화되었다.
디아우는 마미 와타 신화로 상징되는 흑인 여성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전시 공간을 대안적인 성소로 삼는다. 마미 와타의 가장 자랑스러운 특성으로 여겨졌던 머리카락은 〈우아티의 지혜 Uati's Wisdom〉(2020)와 〈디아스포라 Dïà s p o r a〉(2021) 등 이전의 작업들에서 주요한 재료이자 시각적 언어가 되었다. 머리카락은 작가가 작업 초반부터 사용했던 매체이자 그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정치적인 물질로, 아프리카와 흑인 여성의 역사적 맥락에서 머리카락이 일련의 기호로써 가지는 중요성을 함의한다. 〈디아스포라〉에서 디아우는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땋아 전시장 바닥에서 몇 센티 위의 공중에 떠있도록 수평으로 엮는다[도 3]. 불규칙한 그물 형태의 머리카락은 바닥의 흙더미에서 자라는 작은 벼 묘목에 고정되어 있다.
머리카락을 땋는 작가의 행위는 과거 아프리카 여성 노예들이 농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두피에 비밀 도망 경로를 지도화했던 마로나주(marronage) 관행의 연장선에 있다. 여성 노예들은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땋아 만든 패턴으로 마룬(maroon), 즉 도망 노예 공동체에게서 받은 탈출 경로의 방향과 피난처를 표시하고 문서를 폐기할 수 있었다. 이들의 헤어스타일은 노예 소유주가 이해할 수 없는 암호화된 메시지로 기능했다. 여성들은 종종 고향에서 나는 식물의 씨앗을 머리카락 속에 엮었는데, 이는 무사히 탈출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모색하는 여정에 대한 바람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전시장 바닥에서 발아하는 식물은 노예들이 목적지, 즉 자유에 도달했음을 암시한다.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머리 땋기의 관습은 이산과 자유를 예고하는 저항과 영속의 신호였다. 일반적으로 민족의 분산을 의미하는 작품의 제목 ‘디아스포라(diaspora)’는 디아우의 작업 세계에서 씨앗의 분산으로 해석되고, 나아가 문화와 관습과 기억의 분산이 된다.
이처럼 디아우는 신체의 요소를 조형적이고 건축적인 형태로 확장함으로써 일종의 풍경을 구현하고 한계 없는 몸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또한 관람자가 작품이 이야기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 작가의 정체성, 그리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회문화적 맥락 위에 위치시키는 내적 작업을 수행하도록 유도한다. 더불어 작가는 몸을 억압된 경험과 저항적 행동의 징후이자 흔적으로 간주하고 몸의 원초성에 주목할 뿐 아니라, 이러한 원초성을 현대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문화에 내재된 인위성과 대립시킨다. 아프리카 모계 사회의 전통을 기념하는 작가의 탐구는 흑인 여성의 신체를 침략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존재로 취급하는 백인 남성의 지속된 권력 구조를 전복한다. 궁극적으로 디아우는 서구중심적인 역사관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관점에서 지구의 서사를 재작성할 것을 촉구한다.
“흑인 여성으로서 서구의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가 여성과 자연을 항상 같은 정도로 인종화(racialized)해 온 것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고 느낀다”는 작가의 말에서는 생태주의와 여성주의를 통합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삶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의 언어를 읽을 수 있다.3) 디아우의 작업은 식민주의의 역사에서 흑인 여성의 정체성과도 관련되지만 세네갈의 전통적인 모어 중 하나인 월로프어(wolof)의 속담 ‘Nit nitay garabam(인간을 돌보는 것은 인간이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garab’이라는 단어가 식물과 치료제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만큼, 작가는 실제 토양과 식물을 활용해 새로운 생장의 공간을 형성하고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치유의 매개체로 삼기도 한다. 디아우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상기하며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삶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기고 돌보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미술에서 실천되는 생태여성주의는 디아우의 몸 위에서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가는 뿌리들처럼 자연과 여성, 나아가 지구와 인류가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살피는 연대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인간 개개인이 이데아(idea)와 로고스(logos), 도덕적 실천이성으로 이어졌던 형이상학적인 가치 대신 자신만의 목표를 추구하며 현실의 삶을 영위하는 오늘날,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은 죽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대신 미술의 영역에서 지구 곳곳의 신화 속 수많은 여신이 환기되고 풍요와 다양성을 지향하는 돌봄과 연대의 주체로서 되살아나고 있다.
- 김아정(1996-) kaj0818@naver.com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재학. 역사문화학과 교육학을 전공했다. 미술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과거와 현재 또는 고전과 현대를 연결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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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재희 외, 『깨어나는 女神: 에코페미니즘과 생태문명의 비전』 (2000, 정신세계사), 48.
2)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생한 빈타 디아우(Binta Diaw, b.1995)는 밀라노의 브레라 아카데미(Accademia di Belle Arti di Brera) 및 프랑스 그르노블 고등미술학교(École d'Art et de Design de Grenoble)에서 수학했으며 밀라노와 세네갈 다카르를 오가며 활동한다. 작가는 이탈리아인이자 아프리카인인 자신의 교차적 성장배경과 복합된 문화적 유산을 바탕으로 이민·이주·사회적 주체로서의 자아 및 정체성 개념·서구중심적 맥락 속 흑인 여성의 신체 경험을 다룬다. (작가 인스타그램 @iambintadiaw, 공식 사이트 https://
www.bintadiaw.com)
3) https://
www.bintadiaw.com/esserecorpo (2025년 1월 7일 최초 검색); 생태여성주의는 프랑스의 여성주의자 프랑수아즈 도본(Françoise d'Eaubonne)이 1947년의 저서 『여성주의인가 파멸인가 Le Feminisme ou la Mort』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다. 생태여성주의자들은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여신의 영성을 되살리고 생명·돌봄·연대와 같은 여성적 가치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빈타 디아우, 〈신체 풍경 Paysage Corporel〉 연작, 2020-2021, 피그먼트 프린트된 면지에 파스텔 드로잉.
©사진: 광주비엔날레 제공
빈타 디아우, 〈신체 풍경 I. I Paysage corporel I. I〉, 2021, 피그먼트 프린트된 면지에 파스텔 드로잉.
©사진: Antonio Maniscalco
빈타 디아우, 〈디아스포라 Dïà s p o r a〉, 2021, 연장한 머리카락, 벼.
©사진: Cécile Fakhoury Gallery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