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존 E. 도웰 주니어: 빛과 어둠을 아우르는 춤
이슬비
동시대 주요 이슈와 최신 경향의 작업을 선보이는 비엔날레에서 1970-80년대 작품을 마주하는 일은 드문 경험이다. 《광주비엔날레 2024》 본전시 ‘태초의 소리’ 섹션의 한편에는 미국 출신 작가 존 E. 도웰 주니어(John Edward Dowell Jr., 1941~ )의 이른 시기 작업이 전시되었다.1) 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 중 가장 원로로, 음악은 그의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중심축이다. 그는 작업 초기부터 시와 음악, 특히 재즈의 즉흥성과 리듬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독창적인 작업을 선보여 왔다.
<하퍼 모음곡 악보>, <피아노 + 테이프>, <새들의 소란>, <현악 사중주 + Shepp>, <시간은 바뀐다>, <3개의 목소리, 4개의 손>, <어디로 갈지의 생각> 등으로 구성된 드로잉 연작은 선과 색이라는 최소한의 요소로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을 지향한다. 흰 종이 위 검은 선의 표현은 감각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선과 선 사이 공간에 채워진 다양한 색은 작품에 리드미컬한 감각을 더한다. 드로잉 일부는 괘선지에 그려져 악보를 연상시킨다.
유화 작업에서는 선과 색, 여백의 다채로운 조화가 더욱 두드러진다. <흰 바탕 그림들(The White Paintings)> 연작은 처음 보기에는 비어 있는 화면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빈 곳에 활기가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캔버스 표면은 흰 빛이 만들어낸 파동과 독특한 질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여러 색의 스펙트럼을 품은 형상은 깃털처럼, 때로는 꽃잎처럼 흩날린다. 그의 작업은 다양하게 움직임의 감각을 담고 있으며, 백색 화면의 수많은 주름과 얽힌 질감은 호흡, 결, 공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내재적 흐름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작품은 마치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이나 태초에 한 생명이 움트는 장면을 포착하는 듯하다.
숙련된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도웰은 1970~1980년대에 자신의 작품을 악보로 활용해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를 선보이며 시각 예술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 작업을 이어갔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웰은 재즈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고 이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창조적 표현의 근간으로 인식하며 자신의 시각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도웰이 작업 활동을 시작하고 작업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확립하던 1960~1970년대는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 블랙 파워 운동(Black Power Movement)과 맞물리며 미국 사회의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스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던 시기였다. 동시에 재즈가 시각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제이콥 로렌스(Jacob Lawrence), 노먼 루이스(Norman Lewis)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은 재즈의 리듬, 감정, 정체성을 작품에 직접적으로 반영했다. 도웰의 작업도 당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비엔날레 출품작을 다시 살펴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와 문화적 경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 흰 화면에서 솟아나는 소리는 오랜 침묵 끝에 터져 나온 아프리카계 노예들의 중얼거림이나 긴 한숨을 떠올리게 한다. 재즈의 뿌리를 노예들의 노동요나 민속 음악에서 찾을 수 있듯, 이러한 소리는 억눌린 삶 속에서도 희망과 생명력을 품은 원초적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편 도웰은 1988년 중남미 지역 여행을 계기로 부두교를 접하고 영적 차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부두교는 서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 특히 아이티에서 발전한 종교적 전통으로 아프리카 토착 종교, 가톨릭 교리, 그리고 원주민 신앙 요소들이 융합된 복합적인 신앙 체계를 의미한다. 부두교로 개종하면서 그의 예술적 탐구는 다양한 민족의 영향을 받아 사랑, 희망, 영혼의 치유와 연결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집중한 하트 연작에 등장하는 심장과 동심원 모티프는 화염에 휩싸인 심장의 환영을 경험한 이후 작업에서 반복하는 이미지다. 이 시기 그는 회화, 판화, 혼합 재료 등 여러 시각적 요소들과 결합해 작업에 생동감을 더했다.
이후 도웰은 뉴욕, 필라델피아와 같은 도시 풍경을 사진에 담아내며 작업의 지평을 넓혔다. 그는 도시 풍경과 건축물의 구조적 요소를 재구성하며 도시의 감흥을 새롭게 창출했다. 예를 들어, 건축물의 표면, 유리에 비치는 건물 내외부의 반사, 조명이 만들어내는 공간감 등을 통해 도시 공간이 가진 독특한 리듬과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포착했다.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리듬감은 음악적 요소를 떠올리게 하며, 시간과 공간, 문화적 정체성을 하나로 엮는 중요한 시각적 도구로 작용한다. 그는 특히 밤, 새벽, 그리고 일몰 시간대에 촬영해 도시의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의 삶과 경험을 담아낸 다층적인 공간을 표현했다.
2011년부터는 목화, 옥수수 농장 풍경 사진을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경험과 역사를 조명했다. 특히 2018년 필라델피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박물관(African American Museum in Philadelphia)에서 열린 개인전 《목화: 과거의 부드럽고 위험한 아름다움(Cotton: The Soft Dangerous Beauty of the Past)》은 그의 작업 방향과 주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사진 속 흐드러지게 핀 흰 목화는 과거 노예들의 고통 받은 영혼을 떠올리게 하며 노예 제도의 잔혹함을 암시한다. 특히 극단적인 파노라마 형식으로 제작된 가로로 긴 화면은 노예들의 시선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목화밭과 옥수수밭을 상상하게 한다.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과 그 이면에 감춰진 억압과 고통이 교차하며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최근에는 퍼포머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작업 방식을 선보인다. 이러한 시도는 정적인 이미지에 더해 관람객에게 보다 풍부한 경험을 제공한다. 도웰의 작업은 판화, 회화, 사진, 그리고 퍼포먼스에 아우르며 미학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의 이면을 드러냄으로써 다양한 질문을 제기한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흑과 백의 상호작용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문화적 정체성과 역사적 맥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도웰의 작업은 빛과 어둠, 희망과 고통,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현재의 시간에 과거와 미래가 역동적으로 얽혀 새로운 연결을 상상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무엇보다 관람객이 빛과 어둠이라는 대립적 요소를 통합하며 작업에 담긴 움직임과 흐름을 스스로 감각하고 발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 이슬비 (1982-) 9leesb@gmail.com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 학술논문으로 「매체 탐구로 구현된 박영숙의 페미니스트 사진」(2023), 공저로 『그들도 있었다: 한국 근현대미술을 만든 여성들』(나무연필, 2024), 『한국 동시대 미술: 1990년 이후』(사회평론, 2017) 『메타유니버스 :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미디어버스, 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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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E. 도웰 주니어는 1941년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으며 판화, 회화, 사진을 넘나드는 마스터 판화가이자 예술가이다. 탬플대학교 타일러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워싱턴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로스앤젤레스의 타마린드 연구소에서 마스터 판화가로서 판화 기술을 연마했다. 템플 대학교 타일러 미술학교에서 판화과 명예 교수이다.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며, 현재도 활발한 예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https://johndowell.com, @johnedowellart
《광주비엔날레 2024》 전시광경
존 E. 도웰 주니어, <새들의 소란(Bird Flury)>, 1970, 종이에 수채 및 잉크, 76×56cm
존 E. 도웰 주니어, <안팎으로 춤추기(To Dance Inside Out)>, 1981, 캔버스에 아크릴릭, 42×58cm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