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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의 ‘삶의 흔적’을 수집하는 수집가, 김달진

관리자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명의 딸, 무사이. 무사이는 뮤즈의 그리스어로, 알다시피 예술의 여신이다. 미술, 음악, 문학, 연극, 노래, 춤 등에 능하고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학문의 신이기도 하다. 뮤지엄의 어원이기도 한 뮤즈는 ‘생각에 잠기다’ ‘상상하다’를 함의하며, 기억과 영감을 담는 행위(수집)와 장소(박물관)의 특성을 반영한다. 영감의 대상을 수집하는 수집가의 박물관은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영감이 된다.

물건을 모아 놓는다고 다 가치 있는 건 아니다. 〈수집이야기〉저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좋은 수집은 필경 잘 선택된 수집이며,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기쁨을 함께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자신의 생활을 심도 있게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집은 사물보다 마음과 깊이 관계한다. 좋은 수집은 수집가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즐겁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방문한 에디터의 마음에 깊은 감동이 일었다. 45년간 지속된 한 사람의 헌신과 정성, 시간의 조각들과 마주한 탓이다. 거의 모든 한국 근현대미술 자료의 보고라도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오히려 공간의 제약이 수집을 방해하고 있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소외되고 잊혀진 미술가들을 기억하려는 노력까지 포함해서, 미술가들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는 건, 수집품도 예외가 아니다. (수록 이미지는 모두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품임)

에디터 ㅣ 박수연 (sypark@jungle.co.kr)

김달진 관장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수집’에 매료됐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학교 다니며 정 둘 곳이 필요했고, 수집은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줄 유일한 취미가 됐다. 시작은 우표, 상표, 영화 자료였다. 스페셜 우표부터 해외 배우와 장르 자료까지, 하나둘 모으던 것이 여러 권의 스크랩 북이 되자 자료로서 힘이 생겼다. 자료를 모으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컸고, 그렇게 시작된 ‘수집’은 그의 삶이 되었다. 그가 수집을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분명한 건 삶의 많은 부분이 지금처럼 빼곡하게 들어차진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는 수집에서 안정을 찾았으며, 자신 내부에 숨어 있는 자아를 발견했다.

수집가는 수집 물품에서 ‘또 다른 자신’을 찾는다고 한다. 수집품은 수집가의 선택과 소유 방식으로 가치를 얻기 때문이다. 우석봉 대전대학교 산업광고심리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물건을 선택할 때 대게 두 가지 이유로 나뉘는데, 대상이 자신과 닮아서인 경우와 그렇게 되고 싶어서인 경우라고 했다. 전자는 자아 일관성, 후자는 자아 향상에 해당한다. 즉, 자아를 강화할 것인가 보완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수집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시작되기도 하고 동질성을 느껴서 시작하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는 과정임은 분명하다.

미술 속에서 발견한 사람과 역사

김달진 관장은 미술 자료 수집에서 나아가 정확한 정보 기록의 중요성을 피력해왔다. 그는 자신이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쓰며, 잘못된 정보나 자료에 일침을 가했다. 실사례를 찾아 근거를 댔다. 결정적으로 미술계에 알려진 것도 〈선미술〉에서 미술 자료 오류를 지적하는 기사를 쓰면서부터다. 당시 쓴 글 제목은 ‘관람객은 속고 있다-정확한 기록과 자료보존을 위한 제언’. 글 말미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오늘 정확한 기록이 내일 정확한 역사를 만든다.’ 실제로 그가 모은 자료들은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역사의 증거가 됐다.

그가 미술계에 발을 들인 건 1978년〈월간 전시계〉기자로 일하면서부터다. 안타깝게도 1970년대 말 언론통폐합으로 매체 등록이 취소되면서 없어졌지만, 수집과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피부로 느낀 시기였다고. 그는 그곳에서 ‘근대 작가 미술과 인명록’을 연재하며 미술인들의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가 27년 만에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2010)으로 발간된 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애정과 집념이 낳은 결과물인 까닭이다. 이 책은 하나의 의문에서 출발했다. ‘왜 1등만 기억하고 2, 3등은 기억하지 못하는가?’ 미술계에도 팽배한 1등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미술가와 관련 사람들의 수집을 부채질했다. 그는 그 자료들이 차후에 가이드 역할과 연구에 필요할 거라고 내다봤다. 책이 발간됐을 때, 후손들이 책에서 발견한 선조들의 정보에 감동하여 연락을 했다. 그냥 잊혀지고 묻힐 뻔했던 화가 혹은 누군가의 선조가 김달진 관장의 기록으로 인해 기억된 데 대한 감사 인사였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이 일을 평생 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인다.

그의 수집 방향은 늘 사람을 향한다. 김달진 관장이 다른 경매보다 코베이 경매를 선호하는 것도 주 테마가 ‘삶은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미술가가 직접 쓴 물건, 사소하고 소소하지만 세상에서 하나뿐인 소품들은 늘 그의 주된 관심사이다. 그리고 그의 소집품들은 다른 이들에게 유용하고 중요한 영감의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기획전과 상설전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미술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또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미술 자료를 찾아볼 수 있도록 디지털 아카이브를 준비하고 있다. 모은 자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제공하는 것이야말고 그에게 숙명처럼 남겨진 과제다.

Jungle : 김달진 관장이 모은 미술 자료는 그 자체로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됐습니다. 개인의 만족에서 시작한 것이 결국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건데요, 처음에는 우표나 상표, 영화 정보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특별히 미술 자료를 수집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1972년 경복궁에서 〈한국근대미술 60년전〉전시를 열었는데, 관람 후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작가 외 근대 작가들의 자료가 없다는 걸 알았죠. 자료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근현대 미술 자료를 본격적으로 모았습니다. 그 전시가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자료를 모으다 보니 나름대로 자료에 가치부여가 되고 활용을 고민하게 되더군요. 〈월간 전시계〉 이후 1981년부터 199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서 근무하며 미술 자료를 수집했는데,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있었던 이경성 관장과는 그전부터 아는 사이였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때 모은 서양미술사 스크랩북 10권을 싸 들고 찾아뵌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저를 눈여겨 본 거죠. 저는 그곳에서 이경성 관장님의 허락 하에 일주일에 한 번 다리품 팔며 당시 미술관에서 나오는 자료를 모으러 출장을 나갔습니다. 그 자료가 바탕이 돼서 통계 수치가 나오고 분석도 가능하게 됐고요. 당시는 자료가 모여 아카이브가 이뤄지고 박물관이 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자료가 쌓이자 스스로 축적하고 개척하고 선구자가 되면서 자꾸 뭔가 만들어졌습니다. 자료의 힘이죠. 차곡차곡 쌓이면서 발전한 것이 남과 다른 라이프스타일로 연결된 듯합니다.

Jungle :
예전에는 수집을 취미로 생각했지, 직업으로 보지 않았죠. 수집하면서 주변의 반응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수집을 업으로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으신가요?

저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무의미하지만, 사회에 기여하고 보탬이 되는 쪽으로 발전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저를 보면, ‘신문 쪼가리 모아서 뭐하느냐’고 한심한 듯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걸로 밥 벌어 먹고살게 됐죠. 최선을 다하고 어디에 방향성을 두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 인생에 후회는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급해요.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서 시간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인내심이 부족하죠. 제가 하는 일은 미술 분야의 역사를 축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전공자들은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선호하죠. 제가 미술에 매료된 것은 감수성, 예술성 남다른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미술도 굉장히 분야가 세분화되어 있잖아요. 거기서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수집이 적성에 맞고 미술 자료의 중요성과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일의 필요성에 대해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Jungle : ‘수집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술 자료 수집에 대부분 인생을 할애했습니다. 미술 자료를 모으다 보면 그림이나 조각 등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생길 것 같은데, 어떤가요?

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했습니다. 4년 동안 실기를 하며 느낀 건, 그간 전시장에서 너무 가볍게 작품을 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어렵게 만든 작품을 쉽게 판단하고 평가해왔던 겁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자, 작가들이 작품을 고민하고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보이더군요. 실습은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솔직히 ‘너무 한 가지에만 올인해서 반쪽 인생을 산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집에서도 길에서도 일터에서도 오직 자료 수집과 분류만 고민하며 살았으니까요. 말 그대로 ‘업’을 얻은 셈이죠. 지금도 일주일이면 자료가 엄청 쌓입니다. 알려진 탓에 예전처럼 다리품 팔지 않아도 자료가 모이는 시스템이 됐지만요. 여전히 자료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자료는 넘치도록 많습니다. 앞으로는 이 자료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Jungle : 말씀처럼 수집한 자료만 25톤 분량이라고 들었습니다. 가늠이 안 되는 양입니다. 그 많은 자료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는데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은 무엇입니까. 또 바람이 있다면 전해주세요.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평생 공간의 한계에 부딪히며 살았습니다. 자료를 모아둘 공간이 없어 여기저기 쫓기듯 이사한 적도 많죠. 작년에는 2만 점의 자료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기증했습니다. 오랜 시간 공간을 알아보다 결정한 사안입니다. 올해 초 지금 있는 사옥으로 이사 왔는데, 여전히 공간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공간이 부족해서 다용도실까지 다 서가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예요. 아쉬운 건 국가에서 필요를 느끼고 지원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지원을 철회하는 현실입니다. 보기엔 단순한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다 나름의 쓰임새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말이죠. 이젠 SNS로 소통하고 디지털이 필수인 시대가 됐어요. 저만 해도 사람들과 SNS로 소통하거든요. 그런 시대에 자료의 디지털화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정부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1952년 전쟁 중에 덕수궁에서 ‘벨기에 현대미술전’이 열렸습니다. 해외 순회전을 하다가 국내에까지 온 거죠. 만약 그때 자료가 없었다면 전시가 열린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자료 하나가 죽어있던 역사를 끄집어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전시가 열릴 거라고 상상하기 힘든 시기잖아요. 이처럼 자료는 맥락과 연결되면 역사성 같은 위상이 생깁니다. 수집에서 얻은 노하우는 하나입니다. 최대한 많이 모으는 것. 자료를 많이 모으면 그 안에서 필요한 것을 끄집어내서 활용하고 전시하고 가치부여가 가능해집니다. 자료는 어디서 어떻게 활용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료 수집은 역사를 만듭니다. 수집을 시작하던 처음 의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발전해 결국 하나의 역사가 되죠. 개인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자료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지속적으로 환기하면서 가치를 부여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그 덕에 인생은 ‘수집’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반쪽 인생’이 되었지만, 결코 헛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전 여전히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수집’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제 역할도 끝나지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