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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제주평화박물관의 슬픈 流轉

문갑식

제주 한경면 청수리는 해군기지 공사가 시작된 강정마을에서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한라산 기슭의 이 동네는 땅 모양이 특이하다. 기생화산(寄生火山)이란 뜻의 '오름'에 '가마'가 붙어 가마오름이라 부르는데 솥뚜껑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희귀한 이 자연유산을 70년 전 일제(日帝)가 난도질했다. 그들은 거기에 3층 구조의 지하 땅굴 진지를 만들었다. 총길이가 2000m나 되는 미로(迷路)로, 사령관실·회의실 등 방만 수십개다. 여태껏 복원된 게 15%에 불과하다니 그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밖으로 나와 가마오름 위에 서면 모슬포항(港)이 조망된다. 일제가 가마오름과 조천읍 북촌리 서우봉 해안가 등에 동굴 해군기지를 만든 이유가 있다. 한·중·일 세 바다의 급소가 제주도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10척으로 100척을 제압할 군사 요충'인 것이다.

가마오름 동굴 기지는 지금 '전쟁역사평화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일제 유물 2800점이 포함된 태평양전쟁관(館)과 한국전쟁관, 해외참전관으로 구성돼있다. 박물관 곳곳엔 이런 문구가 있다.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and peace are not free)'

식민지 시대의 슬픈 상흔이 귀중한 교육장으로 바뀐 것은 부자(父子)의 대(代)를 이은 집념의 결과다. 2010년 작고한 아버지 이성찬은 일제에 끌려가 이 동굴을 팠다. 그는 생전 '겪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른다'며 아들에게 '동굴의 참상을 알려라!'고 당부했다. 화물업을 하던 이영근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산 다 털고 빚까지 졌다. 모두 50억원을 쏟아부어 2004년 개관한 박물관은 연평균 30만명이 찾는 수학여행의 단골 코스였다. 그랬던 이 박물관이 지금 팔려나갈 처지다. 그것도 제주 땅을 할퀴고 제주도민을 괴롭힌 일본인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박물관의 비운(悲運)은 구제역·조류독감·신종플루로 시작됐다. 전염병 3종 세트로 관람 학생 수가 10만명이나 줄었다. 결정타는 지난해 맞았다. 이영근 관장이 제주 해군기지에 찬성했다는 이유였다. 해군기지 반대파의 시위가 잇따랐고, '관람객의 씨를 말리겠다'는 괴(怪)전화도 숱하게 걸려왔다. 악담은 현실이 됐다. 교원 단체가 개입했는지 학생 발길도 뚝 끊겼다. 그러자 빚이 빚을 낳았다. 원금은커녕 월 이자 2000만원을 갚는 것도 막막했다. 정부·제주도·기업을 찾아 '국가적 문화재인 박물관을 살려달라'고 호소했지만 돌아온 건 무관심이었다.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영근 관장의 윗니는 전부 빠졌다. 아랫니도 전부 흔들리고 있다. 이제 그는 전쟁과 평화와 역사에 앞서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 순간 이 관장 뇌리에 떠오른 것은 2006년 두 차례나 찾아온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총독부 자료만 팔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몇 달 뒤 다시 왔다. 이번엔 박물관 전체를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값은 원하는 대로 주겠다기에 이유를 물으니 '전시물이 너무 일본을 비난하는 것 같아 균형을 맞추고 싶다'고 했다. 지금 이 관장은 그들을 찾고 있다.

7일 발파가 시작된 강정마을에 '반(反)국가 정치인'들이 붐빈다. 그 대부분은 '제주 기지는 안보에 필요하다'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예이다. 사거(死去)한 옛 주군(主君)의 말마저 5년 만에 뒤바꿔버린 그들의 눈엔 불과 20분 거리에 있는 제주평화박물관의 우울한 운명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2012.3.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3/08/20120308031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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