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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빛으로] 광기와 이성의 대결

편집부

광기(furor)와 이성(ratio). 이 둘이 경주를 하면 어떤 것이 빠를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항상 먼저 찾아오는 것이 광기이고, 뒤이어 오는 것이 이성이기에. 그러면 어떤 것이 더 힘이 셀까?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물음이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역시 이성보다는 광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반문하는 사람들이 제발 많기를 기원할 뿐이다.
그러나 잠깐 이 글에서 눈을 떼고, 멀리 가지 말고 지금 보고 있는 이 신문의 앞부분, 정치·경제·사회면 등을 한번 보고 다시 이 글로 돌아오길 부탁한다. 세상이 온통 뭔가 휩쓸려 가고 있고 홀려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부동산 광풍, 도박 돌풍, 사교육 열풍…. 사람들을 어딘 가로 휩쓸어 가는 광풍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주인이어야 할 사람들 대신에 광풍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이 나라,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한광국(大韓狂國)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원래 이렇게 큰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닌데, 글이 광풍에 휩쓸려 그만 커져 버렸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와 양해를 구한다. 원래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 아주 작은 구경거리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니까 광기와 이성이 진검 승부를 벌인 적이 한번 있다. 1세기대의 일이다. 이 승부가 벌어진 곳은 파이드라라는 왕녀의 영혼이다.
“유모, 당신 말이 맞아. 나(파이드라)도 잘 알아. 한데 광기가 더 큰 악으로 이끌어가네. 이래선 안되는 줄 알면서도 마음은 한 순간 잡은 끈을 놓아 버리고, 뭔가 힘이 되는 조언을 전하고자 애썼지만 정신도 별 수 없는지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마네. 마치 짐으로 가득찬 배를 지키려 뱃사공이 몰아치는 파도에 맞서 분투하지만 결국은 헛수고로 끝나고 마는 것처럼, 배는 끝내 항복하고 뱃꼬리를 (머리로 해서) 심연의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마는 것처럼 말이야. 도대체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지? 광기가 승리했고 완전히 지배해 버렸어.”(세네카(4~65년)의 ‘파이드라’ 제177~184행)
광기의 위력과 이성의 무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다. 다른 사정이 없는 한, 광기와 이성이 정면으로 부딪치면 광기가 예외 없이 승리할 것이다. 특히 정면 승부에서 그러할 것이다. 그 까닭은 내 것이 아니기를 바라나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광기(狂氣)인 반면,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잠시 내 것이기도 한 것이 이성(理性)이기에 그렇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영혼의 지배권을 놓고서 이성과 광기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광기가 언제나 위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 이 힘은 특히 사랑(amor)과 결탁할 때에는 무시무시하게 돌변한다. 가련하게도 이 힘에 사로잡힌 왕녀가 파이드라다. 그녀는 아무리 자기가 직접 낳은 아들이 아니긴 해도, 아들인 히폴리토스에 대한 정념의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성이 아무리 도우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더욱이 파이드라의 경우 이성은 오히려 광기를 키우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래선 안되는 줄 알고 있는 파이드라를 더욱 미치게 한 것이 이성이었고, 나중엔 그 이성의 힘까지 흡수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로 파이드라의 광기는 정교하게 발전하기 때문이다. 광기는 그러니까 단지 힘만 세고 크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계산능력을 겸비한 무엇이며 자기 방어 수단을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가진 괴물이다. 적의 장점도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광기에 맞서 싸우라고 이성을 내세우는 것은 처음부터 잔인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성의 후원자인 영혼도 실은 몸에 세들어 사는 처지이기에 그렇다. 세들어 사는 처지에 잠시 세들어 온 이성을 영혼이 돕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렇게 광기는 분명 그 위력이 대단한 무엇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광기엔 자신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공적인 장소에 떳떳이 나설 수 없는 자체적 결함이 있다. 이러한 치명적 약점과 결함 때문에 광기는 결국 힘도 없고, 가끔은 무능력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성에게 통제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처지로 떨어지게 된다.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인간조건(conditio humana) 하에선, 어찌보면 한 인생을 짧고 굵게 사는 것이 멋있어 보이도록 착각하게 만드는 광기보다는 비록 화려하고 짜릿하진 않고, 더디긴 하지만 꼼꼼한 이성이 더 믿을 만한 무엇이기에 그렇다고 한다. “한 사회는 어떤 사람이 (일과 사람들의) 관계망 속에서 하는 역할과 몫에 따라, 즉 (그 일과 조직에 대한) 참여와 기여의 정도에 따라 (자신이 행한 바에 대한) 좋음 (보상과 이익)이 가장 많이 주어질 때, 가장 잘 유지되고 통합된다. 그러나 인간 사회와 공동체의 자연적 본성과 원리에 대한 탐구는 더 높은 심급에서 논의돼야 할 것이다. 첫번째 원칙은 인간이라는 종을 보편의 심급에서 묶는 연대(societas)를 통해서 구별되고, 이 연대라는 사슬(vinculum)은 이성(ratio)이고 언어(oratio)이기 때문이다. (이성 혹은 합리로부터 뒷받침되는) 언어는 (문제 거리를) 증명하고 명백하게 하고(docendo), 교육하고(discendo), 의사소통하게 하며(communicando), 묻고 따지면서 토론하게 하고(disceptando), 판단하게 하여(iudicando) 사람과 사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서로 묶고 연결시키는 바, 이는 자연 본성이 인간에게 부여한 어떤 사회성(societas) 때문에 가능하다; 사실 어떤 인간도 들짐승의 본성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때때로 말이나 사자도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종종 인정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짐승들이 정의(iustitia), 평등(aequitas), 선(bonitas)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짐승들은 이성과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키케로의 ‘의무론’ 제1권 50장).
〈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경향신문 2007.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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