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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⑥] 보시기에 좋았더라

진중권


인간이 창조한 생명, 섬뜩한가 가련한가
푸치니니의 작품 '합성생물도 사회의 일원' 주장
유전자조작 반대하는 생태주의, 오늘날 도전 직면

야훼는 자신이 지은 세상이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성서는 세계를 창조한 야훼의 심정을 이렇게 전한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오늘날 유전자 조작 기술과 더불어 인간이 새로운 생명의 창조주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식물을 식품으로 먹고,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동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인간은 생명을 디자인해 쓰고 있다.
2000년에 호주의 멜버른 동물원을 방문한 사람들은 우리에서 이상한 동물(그림1)을 봐야 했다. 호주야 워낙 다른 대륙과 분리되어 있어 신기한 생물이 많은 곳이긴 하나, 그때 관객들이 본 동물은 캥거루, 코알라, 오리너구리는
물론이고, 이미 멸종된 에뮤나 도도새와도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인간이 유전자 변형으로 창조해낸 새로운 생물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자신이 지은 세상에 만족감을 표했다. 인간은 어떨까? 가령 옆의 그림(그림2)을 보라. 역시 인간이 유전자를 변형시켜 창조한 생물의 모습이다. 이런 생명체를 보고 “보기에 좋았더라”고 하기는 어려울 게다. 하지만 신이 창조한 생명이라고 어디 모두 다 아름다운가? 신이 창조한 것 중에도 끔찍하게 생긴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사진 속의 괴물들은 생물이 아니라 작품이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패트리샤 푸치니니는 상상으로 유전자를 변형시켜 새로운 종(種)을 창조한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탄생한 생물의 이미지는 먼저 종이 위에 드로잉으로 옮겨진 뒤 이어서 3D의 조각으로 제작되는데, 묘사가 얼마나 정교한지 진짜 살아 있는 생명처럼 보인다.
가끔은 기계장치를 이용해 이 생명체에 움직임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멜버른 동물원에 전시된 생물은 기계장치를 장착해 진짜 천천히 움직이게 했다고 한다. 일종의 키네틱 아트인 셈인데, 그 덕분에 동물원을 찾은 방문객들은 생물도감에도 나오지 않는 생명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고 한다.
언젠가 푸치니니의 작품 사진이 포털 사이트의 메인 화면에 오른 적이 있다. 어느 네티즌이 어디선가 작품 사진을 실물로 착각하고 놀랐던 모양이다. 이 소동은 결국 문제의 생명체가 예술작품으로 밝혀지는 것으로 끝났는데, 그때 그 기사에 ‘이 작품이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폐해를 경고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식의 설명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푸치니니가 미학적 수단을 이용하여 생명공학에 관련된 윤리적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사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푸치니니는 그저 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이 곧 재앙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만 하려는 게 아니다. 작품에 나타난 그의 태도는 그보다 좀 더 복잡해 보인다.
예를 들어 멜버른 동물원에 전시됐던 <사이렌 몰>을 보라. 처음에는 섬뜩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저 가련한 생명을 왠지 마냥 보호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누어지지 않는>(그림 3)이라는 작품은 어떤가? 아이와 괴물이 다정하게 함께 침대에 누워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과 괴물 사이에 모종의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가족이다>(그림 4)를 보라. 돼지와 인간을 합성해 놓은 생명이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며 고즈넉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성애다. 실제로 그의 작품 중에는 인간과 침팬지의 합성 생명이 품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것도 있다. 이 괴물에 들어 있는 인간의 형상은 푸치니니 자신이라고 한다.
유전공학의 괴물을 대하는 푸치니니의 태도는 모순적이다. 어느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합성생명의 현실을 “맨 눈으로 똑똑히 보되, 애정을 갖고 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먼저 인간이 저지른 짓에 섬뜩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감정은 점차 그 생명들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어 간다.
유전자 조작은 어차피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나, 그것의 발전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기술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스스로 발전하는 관성을 갖기 마련이다. 하이데거가 기술을 인간이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외려 인간을 규정하는 ‘숙명’으로 보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무기물과 유기물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과 더불어, 종과 종을 가르던 벽도 무너져 내리고 있다. 유전자 합성의 테크놀로지로 인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도 희미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에두아르도 칵은 형광 토끼를 인간 사회에 통합시키려 하고, 푸치니니 역시 합성생물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사람들은 벌써 ‘포스트 휴먼 소사이어티’를 얘기한다. 한 마디로 미래 사회는 인간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을 거라 얘기다. 인간이 무기적 생명(로봇)이나 유기적 생명(합성생명)과 함께 사회를 운영해 나간다? 어떻게 보면 끔찍한 호러 비전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라. 인간애를 기계와 동물에까지 확장하는 것만큼 고귀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유전자 조작에 반대하는 생태주의 논리는 오늘날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위협은 생태주의의 주장이 틀렸다는 데서 오는 게 아니다. 진정한 위협은, 그 논리가 늘 진기한 것을 찾는 심심한 대중에게는 마냥 고답적이고 상투적으로만 들린다는 데서 비롯된다.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유전자 변형예술
신이 생명에게 부여한 DNA 인간이 멋대로 고쳐도 될까?
3년 전 광주 비엔날레에서 본 에두아르도 칵의 작품. IBM의 컴퓨터 ‘딥블루’가 당시 체스 세계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를 물리친 사건을 다뤘다고 한다. 작가는 희고 검은 흙을 이용해 체스 판 모양을 만들고, 그 위의 한 지점에 조그만 식물을 심어 놓았다. 컴퓨터가 인간을 물리친 결정적인 수를 놓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재미있게도 그 식물은 유전자를 변형시켜 생성해낸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세계는 식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난번에 소개한 것처럼, 그는 1999년에 구약성서 <창세기>의 한 구절을 모르스의 이진부호로 바꾸어 유전자 염기서열로 번역한 뒤, 그것을 박테리아의 유전자에 기입해 새로운 형질의 박테리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창조(?)를 향한 그의 욕망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1년 후 그는 포유류로 눈을 돌렸다.
그의 작품 (그림 5)는 토끼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그는 열대 해파리에서 얻은 녹색 형광 단백질 유전자를 흰 토끼의 유전자에 삽입했다. 이 토끼는 보통의 조명 아래서는 다른 토끼와 구별이 안 되지만, 어두워지면 곧바로 몸에서 푸른 색 야광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토끼의 몸에 색깔을 입혀 놓은 것에 불과하나, 토끼와 해파리가 한 몸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오싹하지 않은가?
유전자를 조작하는 에두아르도 칵의 작품은 우리에게 유전자 조작에 관한 중요한 윤리적 물음을 제기하게 만든다. 신이 생명에 기입해 놓은 말씀(DNA 코드)을 인간이 멋대로 고쳐 써도 되는 걸까? 여기서 어떤 이들은 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게 인간의 의무라 주장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니체가 죽여 버린 신을 대신하여 이제 인간이 생명의 창조주가 돼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아주 간단할 것이다. 황우석 사태로 판단하건대, 한국인들에게 ‘생명윤리’ 같은 것은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최고의 기준은 국익이고, 그것이 또한 유일한 기준이기도 하다. ‘국익’은 한국인을 선악의 피안으로 옮겨 놓는다. 한국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국익이 결정한다. 국익에 도움이 되면 선한 것이고, 국익에 도움이 안 되면 악한 것이다. 아닌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중앙대 겸임교수)
- 한국일보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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