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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진흥법 시행령에 존재하는 비평의 자리

이선영

미술진흥법 시행령에 존재하는 비평의 자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지난 5월 23일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미술진흥법 시행령] 제정안 공청회가 있었다. ‘미술을 진흥하기’ 위한 법이라고 하니, 미술계를 주요 생태계로 알고 실천해왔던 이들은 기대가 크다. 아직 ‘시행령’이고 ‘제정안’이라니까, 좀 더 많은 미술인들의 여론이 보태지면 좋을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은 못했지만 시행령 전문을 입수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공청회에 참여했던 한 미술인은 ‘미술비평에 대한 논의가 아주 미흡한 것을 목격했다’고 전한다. 미술계의 절대적인 다수가 작가라서 그런지, 비평을 포함한 이론 부문은 부차적인 취급을 받아온 경향이 있다. 미술비평과 관련은 되지만, 결코 비평과 동일시될 수 없는 미학이나 미술사같이 아카데미를 기반으로 한 학술적 활동은 그에 따른 지원제도가 있다. 하지만 비평은 ‘현장’이라는 모호한 영역에 남아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비평의 영역이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가’라는 그럴듯한 직함도 있지만, 그들은 명확히 코드화 될 수 없는 부분에 존재한다. 


현실에서 비평가라는 직함은 교수, 미술관장, 큐레이터, OO문화재단 직원 등 ‘객관적’(정기적인 급여를 받는) 직함들 사이에 존재하는 과도기, 즉 ‘백수’에 해당되는 시기에 붙는 경향이 있다. 비평가는 작가라는 표현처럼, 그들의 초라한 실존과는 차이가 있는 빛나는 명칭이다. 월급을 받는 ‘객관적’ 직업은 아니어도 그 누군가가 미술 관련 평문을 공식적인 매체에 1년에 몇 편(그 기준은 달라질 수 있다)이라도 발표한다면, 그는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에 관련해서 예술인복지 재단에서의 기준(기준년도 이내에 평문 몇 편 발표 이상 등)이 있다. 비평가는 그들의 비평적 생산물을 통해서만 비평가일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 직업’보다 더 열심히 실천해야 한다. 한편에서 그들에게 ‘독립--’이라는 접두어를 붙이기도 하는데,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비평에 요구되는 보다 다양한 차원은 비평 그자체의 애매함으로 굳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비평은 작품/작가와 학술적인 영역 그사이에 존재한다.

 

비평은 작품/작가, 현실, 이론의 영역 등, 최소한 3가지 이상의 실을 가지고 텍스트를 짠다. 비평은 작품/작가로부터 시작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지점을 향한다. 대개 문자로 실행되는 비평은 작품의 내적 이해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에 와서 작품은 특정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담론의 영역에 속한다. 때문에 비평적 실행은 생산된 미술품을 장식하거나 선전하거나, 설명 또는 해설, 감상 등에 머물지 않는다. 물론 비평이라는 분야의 모호함은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나름의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예술사의 주요 대목에서 알려져 왔듯, 자율성은 해방과 저주라는 양면성이 있었다. 근대가 지나고 현대가 되어 이제 모든 것이 더 촘촘한 연결망을 가지게 되었다. 미학에서 미술 제도론이라는 이론도 있듯이, 좋은 의미든 아니든 ‘자율성’조차도 그러한 연결망의 산물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주관적이고도 객관적인 한계 때문에 공적 기관에 몸담을 경험이 일천한 필자로서는 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비평적 생산물에 대한 사회적 대가의 관행에서 몇 가지 부조리한 대목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가 쓴 원문보다 번역료가 더 많이 책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번역가의 일도 창조적인 부분이 있지만, 원문보다는 덜 하지 않겠나. 최초에 실비로 쓴 원고를 재수록하면서 말로만 허락을 받거나 성의 표시만 하는 경우도 있고, 대개는 나도 모르는 새에 이리저리 편집되어 인터넷을 떠돌기도 한다. ‘기관이라서 원고료를 많이 줄 수 없다’는 말도 황당하다. 기관은 개인(대개 평론 의뢰인인 작가인 경우가 많다)보다 더 많이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닌가. 기관에서의 원고료 책정의 기준은 그 기관에서 사무, 또는 공무를 보는 이들이 사무실에서 문서를 작성을 할 때의 기준이 적용된 것인가. 마지막으로 고무줄처럼 늘어나곤 하는 평문 작성 기간을 최저 임금으로 계산해도 답이 안 나온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비평 또한 예술 작업처럼 ‘자기 좋아서 하는 일’에 무슨 불만인가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현장에 느끼는 부조리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시행령 법안의 몇 대목만 살펴보자. ‘제5조(창작 지원)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법 제7조제2항에 따라 예산의 범위에서 다음 각 호의 사업에 대하여 예산의 범위에서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 1. 미술 창작 및 관련 조사·연구(비평을 포함한다)...’ 법조문에 괄호 안에나마 ‘비평’이란 단어가 사용되어 뭔가 공식화된 것 같아 기분 좋다. 법과 제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필자도 체감한다. 가령 필자가 언론사 신춘문예의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한 90년대 중반과 달리, 2000년대 이후에는 각 지자체에서 문화재단이 서서히 생겨나고 활성화되면서 각종 비평 관련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그러한 장 또한 활동 영역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몇몇 잡지 중심으로 돌아가던 기존 활동무대에서 숨통이 트인 것이 사실이다. 그에 관한 한 평론가도 작가만큼이나 혜택을 받았다. 


물론 그 비평적 활동에 대한 대가는 아직도 객관화되어 있지 않다. 미술 창작의 확실성에 비해, 비평의 위상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조사, 연구, 비평 그 모두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담론’이라는 용어로 포괄할 수 있지 않을까. 비평이 ‘조사 연구’라는 더 중요한 일의 부차적이고 예외적인 것인 양 괄호 안에 갇혀있는 비평(적 담론)을 수평화시킬 필요가 있다. 거창하게 계약서까지 작성하는 사업에 비평적 활동으로 참여하다 보면 연구원(좀 더 높은 급은 ‘책임연구원’)이라는 표현이 간간이 나오는데, 비평은 조사 연구까지 포괄하는 더 총체적인 역할이다. 연구원이라는 표현은 논문처럼 보다 객관적인 산물을 기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몇 년간 모 신문사에서 미술평론 부문 심사도 맡은 경험이 있지만, 많은 응모작을 특징짓는 논문투의 비평(아마도 응모자의 학위논문의 요약본일)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장황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비평은 아직 자기 자리가 확실하지 않은 어떤 대상을 다루는 특수성이 있기에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딱 떨어질 수 없다. 


물론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며 그것이 ‘객관적인 진리’로 승화되면 좋겠지만 말이다, 사실, 괄호 안의 비평은 오히려 전면에 나와야 한다. 조사, 연구도 비평적인 것이고, 심지어 미술 창작 조차도 비평적인 것이다. 법조문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해럴드 블룸은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비코의 [새로운 학문]을 참조하면서, ‘고대 로마법이 엄숙한 극시였고 법학은 엄격한 시였다’는 것을 말한다. 비코는 ‘로마법이 원래 우화적인 요소를 지녔고 노래로 불렸으며 법정은 법이 상연되는 무대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법의 허구적 문학적 기원을 설명한다.’(위 책의 역자 주 참고함) 모호한 위상을 가지는 비평은 타자화 되어왔지만, 타자가 바로 동일자의 몸통인 것이다. 하지만 해당 법조문의 계속되는 표현을 보면 비평의 자리는 불분명하다. ‘제9조(국제교류 및 해외진출 지원의 대상 등) ①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법 제11조제2항에 따라 예산의 범위에서 다음 각 호의 법인․단체 또는 개인에게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 


1. 미술 관련 비영리법인  2. 미술 서비스업자 3. 작가 및 전문인력  4. 그 밖에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미술 관련 법인・단체 또는 개인’이라는 항목에도 비평은 아마도 ‘전문인력’ 쯤에 속하는 유령같은 존재로 간접 지시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국세, 지방세. 소득세, 법인세 등 과세에 대한 법관련 항목은 세부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불균형은 어떤 법이 사각지대에 놓인 존재들에 계몽의 빛을 비출 때 작동되는 ‘권력에의 의지’를 의심하게 한다. 예술계의 많은 지원제도가 사업 마무리 시점에 해야 하는 정산 문제로 보이지 않는 문턱을 만드는 현실을 생각하면, 비평적 생산의 조건이 객관화되고 개선된 정도 보다, 그렇게 ‘갱신된’ 존재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과세 기준이 더 앞서갈 수도 있다. 공적이라는 이유로 너무 복잡한 전제조건이 달려있어, 아예 그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또는 참여할 수 없는) 예술가가 적지 않은 현행 공공미술의 경우가 단적인 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법에 대한 신뢰가 없다. 특히 법조인 출신의 정치가들의 몫이 컸다. 출세를 위해 골방에서 달달 외운 법조문을 앞세우는 이들의 아전인수적이고 교활한 수사학을 매일의 뉴스에서 접한다. 내가 대체적으로 법을 준수하려는 것은 귀찮은 일을 피해서다. 가령 한발 빨리 가겠다고 신호등을 위반하고 가지는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을 살피고 기회를 엿봐야 하지만, 법대로 하면 신경 안 쓰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면 되는 것이다. 피해를 받거나 주거나 하는 신경 쓸 일 없게 하려고 법을 지킨다. 하지만 약자에게는 법이라는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피가 흘렀다. 불행하게도, 기득권은 절대 자연스럽게 자신의 권리를 내어놓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준다. 시간과 돈이 많거나 제도적 보장을 받는 사람과 달리, 사회적 약자들은 최소한의 근로 기준이나 생존권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아마 예술인 진흥법도 그러한 약자 중의 하나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예술은 대개 중산층 이상이 시작하고 향유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계속 그 예술이라는 것을 한다면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 또 한 계층만이 전유하면서 생기는 보편성의 부재도 문제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 자신이 주인이 되는 정신활동에 대한 의미는 크다. 사회가 더 밀접하게 엮일수록 심신의 건강은 중요하다. 가령 건강보험 재정이 보장되려면 병원만큼이나 체육시설을 짓는다든가 해서 개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건강 관리를 하게 함이 합리적이다. 도서관이나 미술관 건립 등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개인에게 출산, 육아, 교육의 문제를 다 떠맡긴 나머지, 국가 자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지 않나. 미술평론을 비롯한 이론 활동은 어떠한가. 활동의 장, 자격, 수입 등이 불확실한 기피 업종 중의 하나다. 그래서인지 젊은 이론가/기획자들이 유입되지 않고 그 세월을 몸으로 버텨왔던 세대들은 늙어가고 있다. 몇몇 사업이 아니라 비평적 토양 자체를 풍성하게 해줄 예술 진흥법을 기대한다.


출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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