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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 자연과 예술의 보편적 연관성

이선영

자연과 예술의 보편적 연관성

 

이선영(미술평론가)

 


꽃은 미술의 주요 소재가 되어왔고, 정지아 또한 꽃을 그린다. 꽃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담는 미술과 자연스럽게 연관되는 듯하다. 인공물과 달리,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 자연은 재창조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림은 이러한 상상적 욕구를 비추는 거울 또는 창이었다. 화가에 의해 재현된 자연은 그것이 창조한 존재를 느끼게 한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모든 것이 비롯되고 귀결될 어떤 이치에 대한 감각과 직관이 있으며, 그것이 창조에 대한 관념을 낳았다. 정지아의 작품은 아름다운 자연의 재창조를 통한 창조의 순간을 추체험한다는 점에서, 자연과 예술의 보편적 연관성을 지향한다. 작가는 들판에 이름 없이 피는 꽃들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섬세하고 자상한 손길이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피조물을 통해 창조를 지속하는 사랑의 손길’에 시선을 빼앗긴다. 작가는 그 손길에서 창조주의 손길을 느낀다. 




IRIS-235_72.7X50.0_oil on canvas_2024



사랑으로 창조된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꽃도 인간도 같은 반열에 놓인다. 오늘날 세상을 위협하는 많은 위기들은 인간이 자연보다 위대하고 그로부터 자율성을 가지며, ‘만물의 척도’라는 생각으로 비롯된 것이니 만큼, 인간과 자연을 같은 반열에 놓는 것은 소박함을 넘어서 대안적일 수 있다. 자연의 모방에 기반한 예술은 종교적 세계관과 조응한다. 작품의 색채와 형태, 그 근원은 단지 조형적 언어의 반복이 아니라, 실재의 모방이다.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난 현대미술에서 ‘실재’나 ‘모방’ 같은 개념은 의문에 붙여졌지만, 대안으로 나온 무수한 미학적, 철학적 관념들은 아직도 보편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오감을 이용하는 작업을 축소하거나 생략하는 개념적 방향은 미술계 제도 안에서의 언어게임으로 예술을 환원시키곤 했다. 재현주의냐 아니냐의 문제는 진리의 유무나 논리적 선후의 관계가 아니다. 이제는 서로 경쟁하는 미학이 있을 따름이다. 


개념의 놀이가 제한되어 있는 것과 달리, 그리기의 재미와 기술을 가진 이에게 호명될 수 있는 대상은 무한하다. 자연은 다양성의 모델이기도 하다. 정지아의 최근 작품에는 붓꽃, 팬지, 앵초, 엉겅퀴, 장미 등등이 등장하지만, 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다. 분류와 명명에 의해 아직 인간의 질서에 속하지 않은 들판에 피어난 꽃들은 자연의 더 원초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것들은 이름을 가진 꽃보다 넓은 시야에서 무리로 재현된다. 춥고 긴 겨울이 지나고 나서도 지난 해 봄 꽃을 피웠던 그 언저리에서 다시 싹이 돋는 식물들은 경이롭다. 비록 인간에 의해 재생산되는 화려한 원예식물보다 그 색과 형태들이 더 잔잔해도 말이다. 개별적 종에 집중된 작품들은 색과 형태라는 기본 조형 언어로 말하기 위한 실험적 장이 된다. 특히 정지아의 작품에는 색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데, 그녀의 작품은 코드화될 수 있는 추상적인 색이 아니라, 대상과 결합된 구체적인 색으로 채워진다. 




IRIS-236_60.5X60.5_oil on canvas_2023



가령 수많은 파랑이 있지만, 작품 [PANSY-241](2024)에 나타나듯이, 팬지와 결합 된 파랑은 독특하다. 다른 종의 파랑 또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꽃의 색이 주는 특이함은 색과 빛의 연관 때문이다. 인상파에서 색과 빛을 수렴시키려는 실험적 시도가 있었으나, 미술사의 주류는 이후의 추상적 흐름만 주목한다. 실재보다는 언어로의 전환이며, 이는 만물을 코드화시키는 정보혁명에 의해 더욱 일반화됐다. 하지만 그럴수록 실재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식물은 빛을 받아들여 지상의 모든 유기체들에게 필요한 원소를 제공한다. 활짝 핀 꽃은 물론, 하늘을 향해 펼쳐진 가지같은 식물 고유의 형태도 빛의 수용과 관계된다. 작가는 논문 [회화를 통해 표현되는 자연의 색채에 관한 연구]나 색채학회나 색채연구소 등에서의 활동은 색에 대한 작가의 이론적 관심도 알려준다. 특히 그것이 살아있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모방은 결코 단순할 수 없다. 


요즘은 실제 꽃 못지 않은 조화(造花)도 있지만, 먼지 뒤집어 쓴 인조 식물을 볼 때 살아있는 식물의 특징이 더 분명해진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되지만, 종의 영속을 위한 식물의 자체적인 움직임은 먼지가 앉을 틈이 없다. 색의 변화양상이나 향기의 유무 등도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운명은 벗어나지 못한다. 정지아의 작품 속 존재들은 짧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연의 순환 주기를 타고 부활하기에 경이롭다. 수선화와 펜지 등, 화면 가득히 한 개체가 자리한 작품은 식물의 생식기관이 할 수 있는 잡혀 있다. 스스로 이동할 수 없기에 곤충이나 새 등의 도움을 받아 존재를 퍼트리는 꽃은 열매나 씨앗의 징후이다. 기후 위기에 의해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해주던 (재) 생산활동이 멈춰섰을 때의 재앙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이름없는 풀을 포함한 꽃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종이라는 소우주이면서 대우주의 원리를 내포한다. 




THISTLE-231_60.5X6.5_oil on canvas_2023



이러한 유비적 세계관에 의해 꽃은 단지 하나의 대상이기를 멈춘다. 그것은 상징적 우주를 대변하는 존재로 승화된다. 작품 [PANSY-241]나 [PRIMROSE-241](2024)는 화면의 중심부에 놓인 꽃술을 강조함으로서 꽃과 상징적 우주의 중심을 중첩시킨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세계의 중심이. 고대적 심성에서 자연과 상징은 공존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어떤 의미 있는 존재나 행위가 유효성을 획득하는 것은 사물이 하늘의 원형을 지니거나 행위가 원초의 우주론적 행위를 반복할 때다. 특히 꽃은 그냥 우주가 아니라 살아있는 우주다. 엘리아데는 식물에서 끊임없이 재생하는 살아있는 우주를 본다. [종교사 개론]에 의하면 식물은 살아있는 현실, 주기적으로 재생되는 삶의 표명이라는 사실을 표현한다. 엘리아데는 식물을 통해서 다양한 리듬으로 재생되고 숭배되고 고양되고 촉진되는 것은 삶 전체이며 자연이기에, 식물의 힘은 우주적 삶의 현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정지아의 작품은 단순한 심미적 활동을 넘어서 자연의 실재에 접근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분업의 한계가 명확해 진후 다시 융합의 세계가 도래하고 있다. 근대에 선명성이 부각된 순수예술에 대한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이제 허구에 안착했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작가가 유화로 자세히 그려 넣은 식물의 모세혈관과도 같은 맥들은 다시금 가지와 뿌리 등으로 반복된다. 섬세하게 주름 잡힌 꽃잎들은 그것이 씨앗 속에 접혀져 있던 단계가 하나씩 펼쳐진 것임을 알려준다. 때가 되면 펼쳐진 것은 다시 접혀진다. 유기체에 내재한 주름에 대한 비유는 현대적 사상의 정점에서 반복된다. 작품 [WILDFLOWER-232](2023)는 이름 모를 꽃의 무리이면서,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뭉게 구름처럼도 보인다.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정지아가 그린 활짝 핀 꽃은 지는 꽃 또한 생각하게 한다. 




WILDFLOWER-221_100X50_oil on canvas_2022



WILDFLOWER-232_30.8X30.8_oil on canvas_2023



삶은 죽음을 포함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식물에 내재한 존재 양식의 변화는 삶과 죽음의 극적인 관계인 부활에 메시지를 던져준다. 처음과 끝이 단선적으로 연결되는 세계관이 아닌, 처음과 끝이 이어지는 순환에 대한 사유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인데, 그 모델이 되었던 것은 식물이다. 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의 대표자로 꽃을 표현한 작품에서 부활에 대한 메시지는 식물에 내재된 본성이 사상으로 변화한 예다. 식물은 지금도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사는 유기체 중의 하나이다. 직선적 세계관 보다 더 보편적인 순환적 세계관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우주적 생명의 원천과의 재접촉’(엘리아데)이다. 무엇인가 재현하는 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종교적 관점에 의하면 ‘모든 재생은 그때마다 새로운 탄생이며, 재생되는 형태가 처음으로 나타난 신화적 시간으로의 회귀이므로, 사람들은 우주 창조의 원초적 행위를 반복하는 것’(엘리아데)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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