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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선 / 소금 입자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소우주

이선영

소금 입자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소우주

 

이선영(미술평론가)

 


blue 만재의 작업실은 소금이라는 주재료에 자연적 염료를 활용하다 보니 마치 연금술사의 실험실, 보다 일상적으로는 자신만의 레시피를 탐구하는 부엌같은 느낌이다. 소금은 섭식에 필수적이며, 화학적 과정의 촉매제 역할도 한다는 점에서 요리나 연금술과 비교될 만하다. 이미지를 만드는 재료와는 낯선 것을 가지고 처음 가는 길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지만, 미학은 이를 예술적 실험이라고 평가해 준다. 작가와 소금과의 만남은 일상이나 마술보다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부터 촉발됐다. 작가는 소금으로 소금의 출처인 바다 이미지를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 바다는 더이상 휴식이나 휴가같은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바다는 기후 위기를 비롯한 빈번한 재앙의 무대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blue 만재의 작품은 생태계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촘촘한 그물망 속의 세계에서 자연재해는 사회정치적 차원으로 증폭된다. 

 

10여년 전 사고였지만 오염수 방류는 얼마 전부터 이루어졌기에 여전히 진행형의 문제일 뿐 아니라, 더 긴급한 사안이 되었다. 작가는 핵 오염수 방류 때문에 수산물은 물론, 소금값까지 급등한 일을 겪고 환경문제를 표현하기에 적당한 재료라고 생각했다. 바다에 존재하기에 무한정 제공될 수 있었던 듯한 기본 원소이기에 소금 관련 파동의 충격은 컸다. 환경을 주제로 한 기획전에 출품된 blue 만재의 최근 작품은 주로 우리 해안가에서 채취된 소금을 사용한다. 이 천일염 소금은 작가만의 미학적 레시피에 의해 다양한 색과 빛이 입혀져 물감처럼 사용된다. 나무 패널에 붙이는 작업이라 그림이라기 보다는 꼴라주다. 화면에는 발견된 오브제를 붙이기도 한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오래된 성경 말씀부터 불운을 방지하기 위해 소금을 뿌리는 주술적 행위에 이르기까지, 소금은 인간의 삶과 밀접하다. 전래 이야기에도 무서운 귀신과 짐승이 출몰하는 위험한 산길을 다니는 소금 장수가 종종 나온다. 


지질학적 연대기까지 멀리 보면 생명이 기원한 바다의 성분에도 소금이 있다. blue 만재는 소금으로 바다와 그와 맞닿은 섬이나 육지를 표현한다. 자연적 재료라서 물감보다는 자연적 소재와 더 친화력이 있다. 대개 빵이나 과자 등 식품에 사용되는 염료를 이용한다. 다음 전시에는 현재 주로 사용하는 굵고 하얀 천일염을 염색하는 것을 넘어서, 자체적으로 색이 내장된 소금들도 활용할 예정이다. 작가의 작업실에는 히말라야산의 핑크 소금을 비롯해서, 검정과 회색을 포함한 다양한 천연색 소금들이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도색이 아닌 염색은 소금 결정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다. 즉 소금은 주변의 조건에 반짝거리는 자체적 과정을 통해 색을 빛으로 전환시킨다. 굵은 소금이라 작품 표면의 알갱이 하나하나가 보이고 만져지는 작품들은 입자로 이루어진 세계를 상상했던 원자론자를 떠올린다. 물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물리학적 가설 속 원자들에는 색도 냄새도 맛도 없지만 말이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의 원자론자들은 복합체들 간의 차이가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형태, 배열, 위치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고대 원자론자들에 따르면 물질적 미립자들이 모든 현실의 씨앗이다. 과학사에서 입자론과 쌍은 이루는 것이 파동론이다. 입자와 파동은 우주의 구성과 운동에 있어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섬이나 해안가를 소재로 한 blue 만재의 작품 또한 조금 거리를 두고 보면 입자를 넘어 파동이 보인다. 육지를 표현한 고동색은 커피 찌꺼기와 식용 색소를 사용한다. 작가는 재료 사용에서도 환경을 생각한다. 소금 고유의 특징에 의해 내부까지 자연스레 염색되고 특유의 각 면을 통해 반짝거린다. 색색의 소금을 담은 둥근 화면은 일종의 용기(容器)에 해당된다. 대상을 그림에 담는다는 일상적 표현도 있다. 내용물을 담는 형식이 둥글다면 더욱 용기같은 느낌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름 50cm 정도의 원형 패널에 바다와 섬들을 담았다. 

 

전시에는 사각형 작품도 나온다. 높은 곳에서 보는 지형도같은 느낌을 주는 blue 만재의 작품맥락에서 볼 때 두 개의 패널이 붙은 사각형 작품은 흙(땅)과 눈(또는 얼음)을 연상시키는 배치다. 대상과의 거리에 따라 추상적인 면모가 강조될 수 있다. 소금이라는 거친 재료로 패널에 붙여 만든 형상은 구체적인 대상보다는 화면의 질감과 색감이라는 조형 언어를 강조하는 추상회화처럼 다가온다. 화면 위로부터 파도가 밀려드는 듯한 이미지의 작품에 작가는 실제의 불가사리를 모래사장 부분에 붙여놓았다. 다섯 개의 돌기를 방사형으로 내는 불가사리의 형태는 머리와 사지가 있는 인간의 모습을 중첩시킨다. 원형 프레임이 많은 blue 만재의 작품은 소우주적 상징이 있는데, 풍경 이외의 소재를 방사형 생물체로 선택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상징적 우주론이 견고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 [비트루비우스맨]처럼 방사형의 상징적 구조는 소우주는 대우주의 중심을 교차시킨다. 

 

바다 풍경과 생물체의 자연스러운 조합은 blue 만재의 작품 자체가 ‘그리기’ 보다는 무엇인가를 붙여서 ‘만든’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어떤 일이 있어났을지 모를 바닷가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희망을 암시한다. 말 없는 자연은 징후를 통해서 좋음과 나쁨을 말한다. 생명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화면의 구조를 이루는 율동이 그저 물과 뭍 사이의 물리적 운동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가가 선택한 둥근 프레임은 한 방향만 알고 있는 직선적 발전주의를 거부하고 동서고금에 편재하는 순환적 세계관에 호소한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진보란 오직 한가지의 형태만 취할 수 있는 냉혹한 과정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세계는 한 종류의 과학과 기술에 기초한 한 가지 개발 모델만을 경험해왔다고 지적하면서, 그것은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 생활양식으로 세계를 빠르게 끌고 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오늘날 중앙 집중화된 경제는 많은 양의 에너지 사용에 의존하고 일반적으로 자원의 더 많은 소비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현대가 너무 과열되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현대 사회는 스팀엔진처럼 에너지를 산출하고 소비하고 기술적 비약을 이룩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래된 미래]는 올바른 미래를 찾는 노력은 자연과 더 큰 조화를 이루는 어떤 근본적인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blue 만재의 작품에서 그것이 생겨난 때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을 해안선의 율동은 그 근본적 패턴에 해당 된다. 통일된 형식 속에 다양함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근본 패턴의 위상을 차지할 만 하다. 바다뿐 아니라 배아를 떠오르게 하는 둥근 소우주들은 인간과 자연의 연결망을 다시금 구축하려 한다. 각각의 소우주는 이전 시대의 종교나 낭만주의처럼 ‘존재의 대연쇄’(아서 러브조이)를 이룰 것이다. 인류세를 통해서 인간이 자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가정되거나 자연의 가장 큰 적이 인간으로 생각되지만, 자연은 원래 인간사에 큰 관심이 없다. 


인간을 대단하게 여기는 관념이 지구에 문제를 일으켰다.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와 정상적이고 건강한 자연 생태계는 이해관계를 달리한다. 자연은 자신의 관성을 통해 인간에게 큰 재앙도 줄 수 있다. 둥근 작품이든 사각형 작품이든 바다와 섬, 또는 육지를 나누는 경계선은 가변적이며 작품의 다양성을 추동한다. 환경문제라는 동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니만큼, 블루가 주조색인 blue 만재의 작품들은 푸른 지구별에 대한 은유도 있을 것이다. 화면의 둥근 형태 또한 돌고 도는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을 나타내며, 작품 제작에 활용하는 특이한 재료는 재활용되는 것이 많다는 점에서 순환적인 세계관과 부합된다, 순환은 환경문제가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되돌아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인간이 잘한다면 악순환은 선순환으로 변할 수 있는 상호성을 가진다. 시작과 끝의 구별이 없는 돌고 도는 세계다. 그러한 둥근 화면이 여러 개 배치되어 있다 보니, 작품들 간에는 잠재적인 운동감이 생긴다. 둥근 화면은 자체 내에서 그리고 화면들끼리 운동을 이어간다. 

 

육지를 연상시키는 색감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블루의 조합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해안선을 상징한다. 물론 작가가 어떤 지형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아니나, 자연은 예술보다 더 다양한 계열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만큼, 어딘가에 그 모습 그대로가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 예술은 자연을 흉내내려 해도 결국은 인간의 언어이다. 문예사조사는 언어의 자율성에 대한 이론을 종종 등장시켰다. 일부 추상미술은 자연의 동일성과 언어의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자연과의 뿌리를 끊어내는 오류에 빠진다. 인간의 산물인 문명을 과장하는 비슷한 오류가 결국은 환경문제도 낳았을 것이다. blue 만재는 자연의 재현이 아닌 자연과 유사한 언어, 그리고 재료로 자연을 담는다. 둥근 화면은 다양함을 강조하기 위한 통일적 장치다. 전시에 따라 원의 크기도 갯수도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한 장의 그림이기 보다는 가변적인 설치가 가능한 구성적 단위이다. 

 

작품마다 해안선은 다양하며 육지와 바다의 비율도 다르다. 특히 바다의 블루는 그 색 자체의 무한한 계열만큼이나 다양한 변주가 있다. 작품 속 육지 부분의 숲 또한 ‘푸르다’. 마냥 평화로와 보이지만 드론의 시점이 연상되는 구도는 양가적이다. 그것은 환경이 환경문제를 내포하는 것과 유사하다. 입력된 좌표로 소리 없이 다가가서 목표로 하는 것을 파괴하는 시점, 상대를 관찰하고 감시하는 시선 또한 연상된다. 지구촌 자체가 세계화를 통해 이해관계로 얽혀있다보니 공백 지대는 없는 것이다. 아마 그곳이 평온하다면 관광지로 개발되어 치열한 상업적 경쟁을 하는 곳일 수도 있으리라. 섬과 바다라는 소재는 블루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지만, 작가의 예명인 ‘블루 만재’에 블루가 속해 있을 만큼 이 색은 중요하다.(만재는 작업실 이름). 마가레테 브룬스는 [여덟까지 색으로 본 색의 수수께끼]에서 바다의 블루에 대해 높은 곳의 하늘에 대해 깊은 곳의 또 다른 블루가 응답하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하늘과 바다는 서로를 둥근 거울처럼 비추는 무한 공간이 된다. blue 만재의 작품 속 블루의 원색은 화이트다. 소금 자체의 색인 화이트는 밀려오거나 밀려가는 물살의 거품에서 두드러진다. 하얀 소금은 작품 속 푸른 지대의 내부를 말한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먹거리와 흰색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는 독일어의 ‘흰(weiss)’이 ‘밀’과 관련 있듯이, 영어의 ‘흰’도 ‘밀(wheat)’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하얀 소금과 식용 색소의 만남은 색의 어원을 떠오르게 한다. 한편 식품과 연관된 화이트는 정제된 산물로, 건강에 해롭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화이트는 빛을 상징하는데, 소금 결정은 염색된 색과 어우러져 빛이 된다. 그밖에 화이트에 내재된 청결함, 부활(에바 헬러는 ‘흰색은 부활의 색’이라고 말한다) 등등의 상징은 blue 만재 작품의 원재료인 소금이 조형적 언어로 번역되었을 때 환경적 메시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음을 말한다. 액운과 관련된 민간 신앙에서의 상징처럼, 작품 속 소금은 지구 생태계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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