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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승 / 마르지 않는 영감의 강

이선영

마르지 않는 영감의 강

  

이선영(미술평론가)

 


서울 충북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신범승(b.1942-)의 작품은 경기권과 충청권을 잇는 강줄기를 주요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19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제목이 ‘중심 고을 충주 남한강 풍정圖’인 것을 보면, 지역에 대한 작가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남한강물에 멱감으며 철이 들었고’, ‘1960년대부터 강변을 서성거리며 1987년에 생긴 향토 전시인 남한강 전’에 계속 참여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 ‘빛-남한강의 바람’에서 작가는 작품의 주요 소재지인 충주를 ‘풍광(風光) 좋은 남한강, 중원문화의 본산인 중심 고을’이라고 평가했다. 이 전시뿐 아니라 그의 대표작들이 거의 남한강과 관련된 풍경이다. 그는 남한강에서 퍼도퍼도 마르지 않는 예술적 영감을 길어낸 것이다. 충주에 방문했을 때, 산과 물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곳에 거주하며 작업하는 이들이 그 지역의 중요한 자산을 놓치지 않음도 발견할 수 있었다. 




신범승01_소나무야_76x51cm



어떤 작가는 그것이 옆에 있었을 때 잘 모르다가 오랜 외국 생활을 통해 고향을 재발견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행복의 파랑새’처럼 가까이 있는 것의 진면목을 깨닫기 쉽지 않다. 한반도에서 충청 내륙 지역은 바다와 접하지 않기 때문에, 강이나 호수가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해왔을 것이다. 80대의 노장 신범승은 올해 38회째 미술단체 ‘남한강 전’에 빠짐없이 참여해온 창립멤버이자 주요 멤버이기도 하다. 한국화단에 많은 미술단체가 있지만, 한해도 거르지 않고 그룹 전시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그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말 그대로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왔다. 남한강은 신범승 뿐만 아니라 그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지역의 작가들에게도 영감과 예술적 실천의 원천이 되어준 것이다. 자연이라는 실재는 거듭되는 해석을 통해서 더욱 풍부해진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만큼이나 역사적인 존재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에서 ‘우리가 현실을 일반적인 것에 대하여 고찰하면 그것은 자연이 된다. 우리가 현실을 특수하거나 개별적인 것에 대하여 고찰하면 그것은 역사가 된다’고 인용한다. 


장 그르니에도 [일상적 삶]에서 자연과 역사를 대립시킨다. 그에 의하면 자연 속에 있는 사물들은 무한히 반복된다. 하지만 역사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드러낸다. 이처럼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역사와 자연의 차이를 구별하려고 했지만, 현실의 역사는 근본적 새로움보다는 가짜 새로움이 득세한다. 진보와 발전의 구별이 모호해지면서 역사는 역사주의로 매몰되기도 하고,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추구되기도 한다.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예술에서 더욱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어떤 작가들에게는 자연이 새로움의 원천이 되었다. 미술사에서 그 대표적인 유파는 인상주의였다. 남한강을 끼고 함께 해온 작가들의 오랜 동지적 실천은 강가를 중심으로 문명은 발달하지만, 물질적 문명과 정신적 문화와의 상관관계는 자명하다. 또한 신범승은 또한 한국 수채화 작가협회를 이끌어왔다. 그에게 물은 작품 소재로도 작품 형식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그린 강은 맑고 투명한 수채화의 형식과 잘 어울린다. 




신범승08_남한강에_61x73cm



화단에서 작품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지속성과 대표성을 가져온 셈이다. 물론 유화 작품도 많이 발표했지만, 그의 대표적인 매체는 수채화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요즘 화단에서 단절을 더 많이 느낀다. 그것은 그가 막힘없이 흘러야 하는 강으로부터 영감을 얻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강은 한반도 전체를 타고 흐르지만, 이제 민족, 통일 같은 이슈는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함께 가는 흐름이 아닌 섬같은 고립은 단지 작업과 관련된 차원은 아니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또는 사람과 역사가 아닌 사람과 기계의 연결이 더 보편화된 탓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연결에 더 익숙하고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적응해야만 한다. 우리의 일상에 편재한 고립적 상황은 그가 전시를 통해 펼치는 따스한 인간의 세계, 자연과의 교감을 자아내는 풍경이 가지는 의미를 말해준다. 한편 기후 위기를 비롯해서 지구가 받는 압력은 그의 풍경들을 현실이 아닌 유토피아처럼 보이게도 한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 않은가. 300호 크기의 대작 3점이 출품되는 이번 전시의 부제 ‘빛-남한강의 바람’에서 ‘바람’은 동음이의어 유희로 ‘wind’와 ‘hope’를 동시에 포함한다. 그의 전시 부제인 ‘바람’이나 ‘희망’에는 자연적 실재의 충만함보다는 부재가 깔려있다. 그는 자연을 둘러싼 서사, 즉 신화에도 관심을 가진다. 인간은 의식(儀式)을 통해서 다시금 충만했던 그때 그곳으로 회귀하려는 신화에 대한 욕망이 있다. 근본적 시공간으로의 회귀를 통해 인간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예술은 신화나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그것은 단절이 아닌 포함이다. 예술은 단절되었던 것을 잇는 것이며 여기에 예술의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당위(단절된 것을 이어야 한다)와 현실(단편화를 극복하기 힘들다)의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신범승의 작품에서 강안팎의 풍경과 인간은 자연과 덜 적대적이었던 시대를 느낄 수 있다. 




신범승04_빛-남한강의_바람Ⅱ_78x53cm



그가 종이 위에 수채물감으로 그린 강은 맑디 맑지만, 이제 자연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 같은 실재가 아니다. 얼마 전 뉴스에는 붉게 흐르는 강의 사진과 함께 ‘깨끗하고 투명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 서북단 알래스카의 강 수십 개가 마치 녹을 푼 듯한 주황빛으로 변모해 우려를 사고 있다.’(서울=연합뉴스)는 소식을 전한다, ‘이런 산화변색(rusting) 현상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영구 동토 해빙으로 초래됐을 수 있다’고 분석됐다. 언뜻 보면 붉은 빛이 반사된듯한 녹슨 물들이 생태계에 미칠 파장은 가늠하기도 힘들 것이다. 사정은 바다도 마찬가지여서, 현재 바닷물이 뜨거워져서 전 세계 산호초의 2/3가 백화현상을 보인다는 암울한 생태 리포트도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소식은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자연이라는 위안과 평온의 장소가 이제 염려와 불안, 그리고 트라우마의 장소가 된다. 하늘빛을 반사하는 맑은 강 위에 띄워진 옛스러운 배가 있는 작품 [남한강 기행]은 이전 시대와 다를 바 없이 흐르고 있을 오래된 자연의 무대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현대 그곳의 모습 또한 적극적으로 집어넣는다. 유화 작품 [남한강에 뜬 해를 보고, 또 보고]는 작가로 추정되는 화구를 어깨에 맨 사람이 충주의 특산품인 사과를 들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사과는 화면 중앙의 해와 비슷하다. 떨어지는 사과로 만유인력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는 과학계의 신화처럼, 그의 작품 속 자연에는 한 알의 사과부터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까지 동일한 보편적 질서를 따른다. 강 주변에는 문화재, 태권도 등 충주와 관련된 여러 문화적 코드들을 여기저기에 박아 놓았다. 현대인이 어딘가에 여행을 갈 때 그곳의 자연과 문화재는 제 1의 동인이 된다. 신범승의 강은 문명의 젖줄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자연은 문명의 든든한 토대가 되어왔는데, 인간중심의 시대인 ‘인류세’에 위협받고 있다. 우리는 이제 늘 불길한 사건으로만 자연을 접한다. 강은 바다를 향한다는 자명한 사실은 그가 바다 풍경도 함께 그리게 됨을 알려준다. 




신범승02_석가_61x73cm



작품 [新 아침 바다]는 바다와 섬이 등장하는데, 이편의 돌무더기는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비슷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졌을 저편의 섬은 아스라한 색으로 칠해진다. 늘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꾸는 인간의 모습이다. 작가는 천혜의 자연풍경을 최대한 반영하지만, 매체의 속성도 존중한다. 요컨대 그는 아름다운 풍광을 그저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그리다 만듯 칠하다 만듯 여백을 풍부하게 준 작품도 있다. 관객에게 여백은 사실주의가 제공하지 못하는 도약과 비약이 일어날 수 있는 상상의 자리다. 고정된 형식인 그림에서 잠재적인 운동이 일어나는 장이다. 그렇다고 자연이라는 지시대상과 절연된 완전한 추상도 아니다. 추상에 관련된 한 이론은 예술가가 그가 속한 환경과 우호적일수록 사실주의에 기울고, 적대적일수록 추상화 된다고도 말한다. 이때 추상은 현실도피와 초월 사이의 어디엔가에 존재한다. [추상과 감정이입](보링거)의 이론에 의거하면, 신범승은 남한강에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셈이다. 


그에게 땅과 물은 어머니와 다름없다. 40년 가까이 어떤 지역의 이름을 딴 활동을 해온 작가에게 그곳은 떼어낼 수 없는 몸의 일부이다. 그래서인지 강을 무대로 한 분단의 광경은 더욱 우울하다. 작품 [간월도에서]에서 작가는 물을 잔뜩 머금은 붓질의 흔적을 화면에 그대로 남겼다. 물로 물을 표현하는 작품은 세상을 투명하게 비추는 창이 아니라, 매체의 특성을 개입시킨다. 작품 [남한 강변 따라]에서 강물은 물감이 되어 화면 아래로 줄줄 흘러내린다. 수평으로 흘러가야 할 강물을 아래로 떨어뜨린 감정의 무게가 느껴진다. 세상을 그럴듯하게 베껴내는 환영, 그것을 만들어내는 중성적 매체가 아니라 중력의 작용을 받는 물감은 멜랑콜리하다. 신범승의 작품에서 강이라는 소재와 분리불가능한 것이 바로 빛이다. 빛을 받는 강은 3차원의 물리적 속성을 초월하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도약한다. 이번 전시에서 강과 더불어 중요하게 다루어진 빛이라는 키워드는 자연의 보편적 질서를 상징한다. 




신범승22_석가Ⅱ_61x73cm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형이상학의 역사는 더 이상 소재적인 맥락으로는 포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주체를 가리키는 적절한 준거를 확보하기 위해 빛의 은유가 지니는 특징을 활용해 왔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빛이 충만할 때 빛은 진리가 출현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명약관화한 명백함을 창조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빛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원론적 세계관에 속했다고 하면서, 마치 불과 흙처럼 빛과 어둠은 근본적이고 원형적인 진리라고 말한다. 신범승의 작품 [남한강의 빛]에서 강을 둘러싼 주요한 빛은 해와 달이다. 같은 강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오래된 격언도 있지만, 흐름이라는 현상은 영원할 것이라는 작가의 예감은 우주적 현상과 관련된 빛과의 유대로 나타난다. 강 안팎의 사람들은 낚시한다. 이 또한 물에서 생명이 태어난 이후의 역사 동안 행해져 왔던 일이다. 작품 속 인간들은 동양화 속의 인간처럼 작다. 그들은 근대적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듯이,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자연에 속해있다. 그의 작품은 진정한 풍요와 평화가 자연의 섭리를 따를 때 가능함을 알려준다.


출전; 충북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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