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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 개관 50주년 전 / 상상력이 접고 펼치는 세계

이선영

대화적 상상력이 접고 펼치는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한 세기의 중간단락을 통과하며

 

필자는 1990년대나 돼서야 미술 전시장을 다니기 시작했기에, 2024년에 맞는 아르코미술관 개관 50주년 중, 자료의 역사가 아닌 관람 경험으로 기억되는 시기는 30년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그 이전에 대관 전시가 포함된 시기가 있었기에, 2000년대 초엽 시작된 기획을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인 미술관 시대를 상당 부분 공유한 세대에 속한다. 그 사이에 미술관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빽빽한 상업시설로 복닥거리는 대학로에 숨통처럼 조성된 작은 공원 속 붉은 벽돌로 된 정겨운 건물은 그대로이다. 원래 미술의 중심지였던 인사동 근처 대학로에도 미술 전시장이 꽤 있던 시기를 지나, 거의 유일하게 아르코미술관만 남아있게 된 변화를 목도했다. 그동안 인사동의 변화와 비교해 본다면, 그래도 국가 기관이었기 때문에 그 동네의 거센 상업주의의 압박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되면서, 문화예술에 있어서 공공영역의 중요성을 체감한다.

 

아르코미술관은 이후 인사미술공간과 함께, 이후 가속화된 전시장의 탈인사동 시대의 전조였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도 이 유서 깊은 장소에서 개인전 또는 기획전에서 봤다. 물론 못 본 작가들도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계기로 보게 됐다. 이번 50주년 기념전 《어디로 주름이 지나가는가》는 뇌에 주름을 하나 더 접어줌으로써, 중요한 사건에 대한 기억의 층을 추가한다. 주름은 접히기와 펼치기의 연동운동을 통해 같은 차원에서 만날 수 없는 지점들을 만나게 한다. 50주년 기념 전시이긴 하지만, 이번 전시는 작품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영원으로 고착시키기보다는 그것의 사건성을 택했다. 주름은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세계는 끝없이 주름지고 펼쳐진다. 질 들뢰즈는 [주름-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세계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면서 독특점들 주위에서 수렴하는 무한히 많은 계열’이라고 묘사한다.


그에 의하면 이 독특성들은 ‘일반성들이 아니라, 사건들, 사건들의 물방울들’이다. 차이는 ‘다각형과 원 사이가 아니라 다각형 변들의 순수 가변성’에 있으며, ‘운동과 정지가 아니라, 속도의 순수 가변성에 있다....차이로 이루어져 있는 사건은 흐름’이다. 한 세기의 반을 시작하는 전시 제목에 영감을 준 질 들뢰즈는 중간이야말로 속도를 내는 지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50주년 기념 전이 단순한 회고일 수 없는 이유이다. 구체적으로 전시가 꾸려진 방식은 아르코미술관과 관련을 맺었던 이들에게 ‘아르코에서 다시 만나고 싶은 작가’의 추천, 그렇게 추천된 작가가 교류하고 싶은 작가를 초대했다. 그래서 1+1 방식으로 꼬리를 무는 대화가 시작됐다. 각자도 중요하지만 관계가 더 중요하다. 물론 이들은 선후배도 유명 작가 무명작가의 관계도 아니다. 관계적 예술은 ‘물건들이 아니라 상황들과 만남들을 창조하고자’ (자크 랑시에르) 한다. 


작품을 나란히 한 또는 마주 보게 된 작가들끼리는 ‘영향에 대한 불안’이 있지만, 해럴드 블룸이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썼듯이, 영향은 ‘비의도적이고 거의 무의식적인 경향’이고, ‘오해를 통해서 작용’한다. 그러한 이탈은 작품들을 읽는 관객에게도 해당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창조적 오독’을 보기도 한다. 그래서 짝패를 이루는 작가들은 단지 ‘더하기’가 아닌 ‘곱하기’로 제시된다. 요컨대 대화는 단지 양적인 축적이 아니라 질적인 전환을 겨냥한다. 작고 작가 3인을 포함한 총 22인의 대화의 방식은 다양하다. 1974년 미술관이 설립됐던 시기에 태어난 작가부터, 그 시기에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작가까지 여러 세대가 스펙트럼을 이룬다. 서로 제자인 경우도, 동료 작가인 경우도 있다. 완전한 협업인 경우도, 따로 또 같이 작품이 병렬된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든 대화는 종결되지 않으며, 여기에는 그 대화를 듣고 참여할 미지의 존재 또한 포함된다. 


서용선× 김민우× 여송주의 대화는 역사적 이야기 속의 민초들을 벽화, 애니매이션, 조각 등의 방식으로 제시했다. 신학철×김기라의 대화는 야만의 역사와 삶에 대한 비극을, 최진욱×박유미는 삶과 예술에서 현실의 힘과 그리기의 리얼리즘을 회화와 영상으로 표현했다. 그림 잘 그리는 (고)공성훈은 초기 설치작품과 함께 ‘테크놀로지 작가’에서 다시 ‘화가’로 돌아왔을 시기의 작품이 나왔다. 박기원×이진형의 작품에서 추상의 어법은 200여 점의 구체적 자료들이 총괄된 공간과 어울린다. 조숙진×이희준은 사물과 회화를, 홍명섭×김희라는 사물과 설치를, (고)조성묵은 조각과 설치의 어법을 교차시킨다. (고)김차섭에게 예술은 세계의 이해를 위한 개념적 형식이 된다. 이용백×진기종은 기술 지상주의가 펼쳐놓은 이미 다가온 미래를 심상치 않은 상황으로 연출한다. 채우승×최수련은 민속적 전통에서 낯선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정정엽×장파는 여성과 타자를 연결한다, 


작가들끼리의 만남은 엄격한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다소간 느슨한 병렬을 이루지만,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다양하게 안배되어 있다. 작품들은 하나의 세계를 다루지만 각기 다른 방향에서 본다. 질 들뢰즈는 [주름-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세계는 무한히 많은 점에서 무한히 많은 곡선과 접하는 무한한 곡선, 유일한 변수를 갖는 곡선, 모든 계열이 수렴하는 계열’로 비유하면서, 이러한 세계는 ‘보편적인 유일한 시점의 점’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강력하게 ‘보편적 정신의 교의’를 부정한 철학자로 라이프니츠를 평가한다. [주름]은 ‘신은 죄인 아담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지은 세계를 창조한다’라고 하면서, ‘세계는 주체 안에 있지만 주체는 세계를 향해 있다’라고 말한다. ‘신은 영혼들을 창조하기에 앞서 세계를 만든다’라는 들뢰즈의 사유는 주체의 음울한 독백 대신에 이 세계 안의 무한한 차이 혹은 다양성을 긍정하게 한다. ‘대화적 상상력’(바흐친)은 축제처럼 흥겹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하나의 세계를 보는 수많은 단자(monad)들의 모임이 작품인 것이다. 단자들은 하나의 보편적 관점으로 종합되지 않는다. 대신에 미술관의 반세기 이력에 대한 체계적인 총괄은 전시와 병행해서 열린 아카이브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또한 전시장의 예술작품이 가진 운명과 비슷하다. 하나의 세계를 접고/펼치는 놀이에서 접힌 부분이 좀 더 많을 따름이다. 예술작품이 자료가 되고, 정보가 역사가 된다는 자의식 또한 1990년대 본격적으로 개막된 인터넷 시대를 통과하면서라고 생각된다. 이후에 전시가 열리면 으레 아카이브 전도 함께 열려서 전시에 대한 담론을 수직/수평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카이브 섹션에서 1990년대 당시 화제를 일으켰던 《한국현대미술 신세대흐름전》의 기획자의 인터뷰를 비롯해서, 최근의 안부가 궁금했던 이들의 얼굴도 반가웠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예술, 또는 예술적으로 갈무리된 내용만이 기억된다. 그 자체로 중요한 정보나 예술은 없다. 그래서 50주년이라는 맥락이 중요하다. 

 


이어지는 대화들

  

서용선×김민우×여송주; 다양한 형식으로 조명된 역사적 사건과 주체


서로 비슷한 필치가 엿보이는 서용선×김민우×여송주의 작품은 협업의 강도가 크다. 벽화, 애니매이션, 조각 등 다양한 방식이지만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중심은 확고하다. 인간의 위상이 희미해지고 체계의 힘이 강화되는 현대, 붓과 칼의 맛을 살려 다시 호명된 인간 주체들이다. 하지만 그 주체는 휴머니즘의 주인공이 아니라 민초다. 역사와 도시, 일상에 대한 탐구에 몰두해 온 서용선의 최근 관심사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항일 농민 운동인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 사건이다.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는 것이지만, 형식 또한 어떤 내용을 끌어들일 수 있다. 여러 형식으로 재현된 사람들은 투박한 듯 거친 필치와 어울린다. 고전주의의 예가 있지만, 미술이 역사를 다루기는 쉽지 않다. 역사는 이야기이고 시간적 서술이 논리적이며 지나간 사건들을 이해하게 한다. 회화나 조각은 시간의 단면을 잘라낸 공시적 형식으로 그 전후를 암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적 사연은 계속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서용선×김민우×여송주가 그 단면을 확장하는 방식은 회화의 프레임을 벗어나려 하고, 이미지에 시간을 부여하며, 3차원으로 튀어나온 듯 구체화한 이미지라는 형식이다, 여송주의 경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활용하여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드로잉을 선보였다. 김민우의 벽화는 역사가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관객의 동선을 이어주는 벽처럼 흐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생생한 잊힌 사건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제국주의에 대한 피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없다. 지금도 ‘친일 반민족’으로 규정할 만한 세력들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


신학철×김기라 ; 비극의 장, 기억과 극복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출전은 아르코미술관)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하는 신학철의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은 가공할 만한 역사적 비극을 생생하게 불러세운다. 100년 전 역사적 사건을 담은 희미한 한 장의 흑백사진은 실제 벌어진 사실에 대한 충격을 기념비적인 스케일에 담긴다. 아르코 미술관의 긴 벽면을 활용한 스펙터클한 구도는 이전 개인전에서의 압도적 느낌을 되살린다. 이 소재를 자료상으로 처음 접한 곳도 아르코 아카이브라고 하니, 미술관이 엮어낼 수 있는 시공간적 인연은 깊다. 청년기에 신학철의 [한국 근현대사] 연작에 감명받은 이후 김기라의 작업은 거시적이고 보편적인 맥락을 견지해 왔다. 새로운 세대인 그의 주요 매체는 영상이다. 영상은 현대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효율적으로 담는다. 작품 [눈이 멀고 벙어리인]은 시각장애인 남자와 언어장애인 여자가 서로의 결핍을 이겨내려 결합하는 모습으로, 위험사회에 대처하는 약자들의 공동체를 연극적으로 보여준다. 전문 배우의 연기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전형성을 중시한다. 그것은 80년대 대사회적 메시지 전달에 힘썼던 민중미술의 새로운 맥락화이다.  

 


최진욱×박유미 ; 현실의 대해(大海)에서의 생산적 투쟁




최진욱은 제자 박유미의 작품과 깊게 대화한다. 작품 [여성 어부]에 등장하는 작업실은 망망대해에서 어업활동을 하기 위한 작은 배가 된다. 열심히 그린 작품들로 비좁아진 공간에서 작가는 어부처럼 현실이라는 대해에서 끌어올릴 것에 골몰한다. 배 안의 모든 것처럼 작업실의 이러저러한 물품들은 예술적 생산 기계로 작동하기 위한 여러 부품들이다. 바닷 바람같은 선풍기, 그물을 당기는 듯한 손동작은 바다로 비유될 수 있는 현실계와 상호작용하는 여성 어부의 활동 기구와 중첩된다. 박유미의 [어부(漁婦)]는 ‘리얼리즘의 승리’(엥겔스, 루카치)라고 할 만큼 현실 그 자체로 강도와 밀도가 있다. 보통 뱃일은 거칠고 여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작가가 직접 참여 관찰한 여성은 ‘어부(漁夫)’와 다를 바 없다. ‘세계 중요 농어업 유산’에도 등재된 해녀도 있지만, 작품 속 나이 든 ‘漁婦’는 그러한 타이틀마저 없다. 통상적으로 노년의 여성은 현실 속에서 유령으로 존재한다. 흔들리는 배에서의 능숙한 노동은 여성성에 대한 상상이나 상징으로 포획될 수 없는 현실과 밀착된다.

 

박기원×이진형; 열린 구조로서의 추상




박기원의 [넓이 46번]에서 푸릇한 선들로 가득한 화면은 서로 다른 결을 가진 평면들로 이루어진다. 선은 의미를 낳을 형태를 구성하지 않으면서도 형을 만드는 셈이다. 지시 대상으로부터 조형 언어의 자율성을 꾀하는 추상미술은 자체의 무게를 가지려 한다. 대지도 숲도 아닌 잔디나 논밭 모양의 초록 평면들의 조합은 자연과 인공 사이에 있는 정원같이, 두 영역에 걸쳐있다. 박기원의 작품은 높이를 같이 한 평면들을 보충 내지 대리라는 해체적 문법으로 이어지게 하며 열린 구조를 이끈다. 연이어 붙은 이진형의 [무제]는 다른 색의 바탕에서 서서히 드러나듯 또는 가라앉듯 그려진 형상이다. 이야기로 친다면 기승전결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방식이다. 이어지는 일련의 것들은 상투성을 벗어나 감각 그 자체의 변주이다. 사진이나 영상, 문학 등 다른 형식이 아니라 회화만이 가능한 색감과 질감 그리고 분위기는 누가 무엇을 그린 것인지와 상관없이 이어진다. 두 작가는 무엇인가를 약화함으로써 작품을 더 강하게 밀고 나간다.

 

공성훈 ; 미디어 시대의 회화




공성훈에게 회화에 대한 깊은 사랑은 그만큼의 회의도 동반했을 것이다. 전자공학과를 또 다니고, 한동안 그 방면의 기획전에 자주 등장했던 이력은 이후 회화에도 흔적을 남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개] 연작은 2000년대 초 다시 붓을 잡은 시기의 작품으로, 사진기나 영사기 등 그가 잘 사용해 왔던 기계의 영향이 남아있다. 그가 자주 그렸던 야경은 인공광원의 효과가 크다. 초라한 집 앞에 묶여 있는 개는 무단 촬영이라는 공격적 행위에 날 선 안광으로 대응한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개는 예전의 교외에 난립한 모텔 풍경처럼 척박한 현실을 은유한다. 숲이나 눈 오는 밤 같은 낭만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사진이라는 필터로 걸러지는 세상은 생경하고 낯설다. [개] 연작은 육안과도 다른 미디어의 시점을 육필로 재현한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시점에서 그는 왜 방향을 튼 것일까. 이에 대한 힌트는 이번 전시에 나온 블라인드 설치작품이다. 그것은 매뉴얼에 따라 누군가가 재현할 수 있다면 회화는 그럴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모국인 회화 또한 미디어의 자장 속에서 작동한다는 깨달음이다.


조숙진×이희준 ; 사물과 회화


회화와 사물의 어법은 다르다. 버려진 물건들이나 재료들은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는 지점 때문에 일찍이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신의 욕망과 무의식에 화답하는 사물들을 적극 끌어들였고 모더니즘의 독단성을 해체하려는 전략에서도 활용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예술’이라는 관념을 멀리한 이후, 사물, 텍스트 등의 개념이 미학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조숙진의 경우 사물들을 활용하긴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관철된 구성이나 색채가 있으며, 우연과 필연이 만나는 지점을 중시한다. 작품 [저 너머]와 [십자가]는 수집된 합판의 물성과 낡은 창틀에 ‘균형’이나 ‘중용’ 같은 미학적 필연성을 부여한다. 정사각형이나 원형, 대각선 같은 기하학적 형태가 등장하는 이희준의 작품은 정교한 레이더망이나 과녁같이 어떤 목적을 겨누는 엄밀함이 있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정확성을 기할수록 더 모호해지는 역설을 인정한다. 역설은 가까이 있는 것과 먼 것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낯선 협곡 사이로], [성운들 속으로], [암흑 물질]과 같은 제목처럼 저 먼 곳에 있는 것들은 비계나 채굴같이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소재로부터 출발했다. 

  

홍명섭×김희라 ; 부드러운 것을 당기는 틀




홍명섭과 김희라의 작품은 춤추는 사람과 춤 자체의 구별처럼 서로 나누기 어려운 접합점이 있는 협업의 산물이다. 그동안 필자가 각각 접했던 그들의 작품을 기준으로 한다면, 프레임은 홍명섭이 그 안팎을 채우며 관계성을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천의 활용은 김희라의 몫일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양자는 마치 뼈와 살처럼 긴밀하게 접속하면서 작동한다. 관객이 전시장에 들어설 때 발판처럼 깔린 작품이나 거대한 둥근 틀을 가로지르는 인체 형태의 옷,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 드레스, 액자들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화려한 색감의 표면, 의자에 걸쳐진 매듭 등은 모두 단단함과 부드러움, 틀과 표면, 본질과 현상 등의 관계가 공통적으로 유추된다. 표면과 틀의 관계는 현대미술에서 여러 미학적 개념의 변화를 추동시킨 주요 범주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개념주의의 심각함보다는 놀이하듯 전시 공간의 특수성을 살려서 툭툭 펼쳐놓는다. 초월이나 관념은 놀이하는 듯한 수행으로 지양되었으며, 이를 통해 관객은 자기도 모르게 현대미술의 근원으로 이끌린다.     

 

조성묵 ; 조각과 설치의 종합




전시장의 벽을 막 뚫고 나온 듯한 의자 형태의 작품은 조각과 설치의 중간에 걸쳐있다. 단일한 응집성을 향하는 고전적 조각과 하나의 장으로 해소 또는 화장되는 설치미술의 어법이 종합되어 있다. 그는 돌이나 청동 같은 고전적 소재는 물론, 합성수지까지 유연하게 작업에 활용했다. 고인이 되기 최근까지 국수나 빵 같은 소재로 연극적 무대 같은 장을 연출하는 등, 고정된 조각의 어법을 확장하는 실험을 거듭해 왔다. 전시된 작품은 1990년대 중반의 작품 [메신저], [메신저&커뮤니케이션]으로. 조각이 설치적인 방식으로 흘러간 바탕에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 있음을 암시한다. 정보사회에서 정보란 본질이 아니라 관계를, 요컨대 오래된 이항 대립으로 비유하자면 실재론이 아니라 유명론에 기운다. 밑이 빠져 앉을 수 없으면서 주름진 살이 붙은 조성묵 특유의 의자 형태나 의자를 덮은 천만 조형화한 작품은 의자 자체가 인간(의 부재)과 관련된다. 조각의 기본을 형성했던 인간은 부재의 상징을 통해 현존한다. 인간이라는 조각의 중심은 변조된 채 유지된다. 

 

김차섭 ; 세계의 이해를 위한 개념적 도해




직사각형의 모서리를 없앤 나무 조각은 미술로 세계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하는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엄밀한 기하학을 벗어난 도형은 예술이 법칙이 아닌 규칙의 영역이며, 그 규칙은 작가가 창안함을 말한다. 평면작품에서는 모서리 없는 도형을 계측하는 손의 위상이 강조된다. 그의 작품은 수식이나 도형, 지도나 글자 등이 포함된 개념의 도해 또한 미술일 수 있다는 현대미학의 흐름을 전제한다. 김차섭은 미술가로서 이미지로 사유하고, 그 안팎에 배치된 텍스트들은 서로를 보충하는 관계다. 미술은 작가의 학제적 관심사를 풀어내는 유용하고도 결정적인 형식이다.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오랜 미국 생활이 원인이었을 듯하다. 다른 좌표계에 주체가 던져질 때 그렇지 않은 상태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할 확률이 높다. 차이는 세상의 다채로움을 가능하게 할 감수성을 드높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차별의 동인이 된다. 정체성의 탐구는 개인의 실존이나 미학과 더불어 민족적, 인류학적 탐구로 확장될 수 있다. 다양한 좌표를 가지는 김차섭 개념적 도해는 문명사적인 차원에 이른다.

 

이용백×진기종 ; 디스토피아적 비전

사제 간인 이용백과 진기종은 인공 및 자연재해가 빈발하는 이미 다가온 미래를 몰입도 높은 디오라마 세트로 연출한다. 둘의 작업은 거의 이음매 없이 봉합되어 함께 작동한다. 이용백의 [블루스크린]은 마치 암막 커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블루스크린’은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켰을 때 나오는 화면으로, 이제 거의 모든 것이 컴퓨터의 관문을 통과해야 가능한데, 그것이 오류가 날 때의 총체적 난국을 말한다. 현실을 이음매 없이 재현하려는 가상적 차원은 급격하게 소격된다. 오류는 저편으로 뻗어나갈 어떤 환상도 거둬낸 감옥 같은 벽을 남기면서 전체적 집중이 만들어 낸 위험의 고도화를 경고한다. 진기종은 푸른 벽 또는 하늘과 연결되는 바다를 연출한다. 작품 [항해]는 얇은 재질의 표면에 바람을 불어넣어 폭풍우 치는 바다에 대한 가상적 이미지와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작은 배들은 기후 위기나 난민선의 이미지와 교차한다. 타자들에게 벌어진 가공할 만한 폭력은 이제 푸른 지구별 전체 승객들의 운명이 되리라는 디스토피아적 예감으로 가득하다. 

  

채우승×최수련 ; 오래된 것에서 찾은 새로움




채우승과 최수련은 지금도 잘 보면 보이는 감춰진 전통을 수면으로 끌어올린다. 묻혀있던 것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무의식이 출몰한다. 민속 또한 현대의 대중문화처럼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그들이 취하는 소재는 민속적이기에 집단 무의식일 것이다. 옷자락이나 건축의 일부였을 단편들은 색들이 모노톤으로 빠졌어도 선적 견고함을 유지한다. 영원의 한 조각이었을 그것들은 단편으로서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온전히 자체의 힘으로 서 있거나 공간을 가득 채운다. 채우승 작품은 단절된 전통 때문에 이미 수수께끼 같은 대상이 된 소재 일부를 선택하고, 본래의 재료가 가지는 속성까지 감춘다. 금색 물감이나 종이 등으로 계속 알맹이가 은폐되는 상황은 그가 관심을 가져온 민속과 무속적 유물처럼 거듭되는 해석을 낳는다. 최수련의 작품은 동양의 신화와 전설, 이미지 등을 활용한다. 현대의 대중에게 외계어가 된 한문 텍스트들은 퍼렇게 빛바랜 민속적 무늬들로 과도하게 도배된 굿당 같은 공간에 배치되어 낯설지만 새로운 분위기를 발산한다.

 

정정엽×장파 ; 여성과 타자




정정엽×장파의 대화는 타자로서의 여성이라는 화두를 공유한다. 타자는 동일자에 의해 소외된 존재지만, 그 소외로 인하여 가부장제를 비롯한 지배적 질서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기대된다. 두 여성 작가의 대화는 미소한 존재인 벌레와 창조적 여신을 연결한다. 든든한 지지체도 없이 천정에 내걸린 나방들의 이미지는 작은 것을 확대한 탓에 발견적 경험을 이끈다. 작가의 경탄을 자아냈을 벌레의 무늬와 촉수들은 관객에게도 전이되어 공유된다. 정정엽은 작지만 큰 존재에서 여성의 모습을 본다. 여성 작가들의 대화적 상상력은 세상이 시작된 시공까지 소급된다. 정정엽의 나방이 다소 징그러울 수 있는 것처럼 장파의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연작 또한 그렇다. 여기엔 작가가 연구해 왔던 ‘여성혐오’라는 키워드도 포함된다. 단군보다 선재 했지만 잊혔던 마고는 장기들을 여기저기로 뻗어 세상을 창조한다.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전환된 이래,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인간 이상이거나 이하였다. 장파는 인간 이하의 비천한 이미지로 인간 이상을 표현한다. 벌레와 괴물 할머니는 역전극의 주인공이 된다.


출전; 아르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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