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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 존재의 생태와 삶의 질감

고충환

Share. 김희진이 자신의 근작에 부친 이 주제는 대략 공유하고 나눈다는 뜻이다. 공유하고 나눈다는 것은 소유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소유가 있고난 연후에라야 비로소 공유하고 나누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부친 주제들, 이를테면 담는다거나 가진다거나 공유한다는 일련의 주제들을 생각해볼 때 소유 개념은 작가의 작업의 인문학적 근간이 되고 있고 작업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지침이 되고 있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의미로나 형식적으로 소유 개념을 상형하고 변주하고 심화시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얼핏 작업에서 드러나 보이는 형식적인 특징과 이 주제는 선뜻 매치돼 보이지가 않는다. 알다시피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작가의 작업은 추상화의 형식을 띠고 있고, 일반적으로 소유 개념은 경제적이고 사회학적인 실천논리를 담보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구상적이고 형상적인 그림이라면 또 모를까. 이런 연유로 인해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소유 개념이 적어도 경제적이고 사회학적인 실천논리의 맥락에서 찾아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의 인문학적 근간이면서 작업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는 소유개념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디서 찾아질 수가 있는가. 바로 관심이며 호기심이다. 관심에 의해서 그리고 호기심에 의해서 감정이 동해져야 비로소 소유하고픈 욕망도 나누고 싶은 공유(아님 분유?)도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관심이며 호기심인가. 바로 자신의 실제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생활의 주변머리며, 자신의 일상이 진행되고 있는 일상의 주변머리에 대한 관심이며 호기심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지금여기라고 하는 현실성과 현장성을 획득한다. 더불어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다름 아닌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나 현상학자 후설이 소위 생활철학이라고 명명한 개념의 언저리에서 생성되고 양육된 것임이 밝혀진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작가는 의외로 추상화를 그린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생활과 일상이야말로 추상이나 관념이 아닌 현실의 맥락에서나 찾아질 법한 논리이며 개념이 아닌가. 그럼에도 작가의 작업이 구상과 형상에 바탕을 둔 재현회화보다는 추상화에 가까워 보이거나 속해져 보이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추상화의 형식을 견지하면서 어떻게 생활과 일상의 의미며 개념을 담아내고 전달할 것인가. 바로 추상을 순수한 형식논리나 요소로서보다는 의미내용에 대한 일종의 표상형식으로 사용하고 적용한 것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추상과 형상이 상호작용하는 접점에서 의미내용이며 형식논리를 풀어낸 경우로 보면 되겠다. 


생활과 일상에 맞춰진 작가의 관심이나 호기심에는 편식이 없다. 얼핏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이고 다양한 면면들이 생활과 일상의 장으로부터 호출되고, 이는 그대로 이질적이고 다양한 재료며 방법이 혼재하는 형식적인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런 탓에 작가의 그림은 단순한 그리기의 경계를 넘어선다. 필요하다면 생활과 일상의 주변머리로부터 채집된 각종 오브제들이 가세하는데, 이로써 그리기와 만들기의 과정이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는 특유의 화면을 연출해낸다. 그리기와 만들기가 날실과 씨실이 돼 긴밀하게 짜인 구조며 형식 정도로 보면 되겠다. 부연하자면, 그리고 만들고 붙이고 지우는, 그리고 그렇게 지움으로써 드러나게 하는 일련의 이질적이고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서 작가 고유의 형상을 빗어내는 것이다. 

미술사적 성과나 영향관계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략 추상표현주의(드로잉과 페인팅에서 즉흥성과 우연성이 강조되는 경우)와 오브제 미술(일상으로부터 잡다한 기물들이 차용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르브뤼트(Art Brut)의 언저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 혹은 재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이 모두를 하나의 화면에 종합하고 있는 경우 정도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여기서 참고로 아르브뤼트에 대해서 굳이 번역을 하자면 가난한 미술 혹은 빈약한 미술 혹은 최소한의 미술 혹은 자연 그대로의 예술 혹은 천연 그대로의 예술이 될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일상에서 쉽게 접하고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활용한 조형행위와 그 결과물을 뜻하며, 그렇게 화면 속에 불러들여진 연후에도 재료 고유의 성질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특히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오브제 미술로 정의할 만하다. 각종 오브제를 도입해 회화 언어의 확장과 변주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오브제를 도입한 탓에 오브제가 평면 위로 돌출돼 보이는 일종의 저부조 형식의 조형언어도 한 특징이랄 수가 있겠다. 오브제로는 이처럼 그 자체 고유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평면 오브제가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고서와 원서 같은 책자들, 신문과 잡지 같은 대중매체들, 그리고 모눈종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면 오브제들이 그리기의 과정과 어우러져 주로 바탕화면을 조성하기 위해서 차용된다. 이렇게 바탕화면이 조성되고 나면 각종 활자와 기호와 부호와 숫자와 상징들이 모티브로서 부가되는데, 그 중에는 바코드 표식도 보이고 문구용 판박이를 오브제로 사용한 경우도 눈에 띤다. 사실상 가능한 모든 평면 오브제들을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것인데, 그리기의 과정과 긴밀하게 짜여 있어서 그저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화면을 만들고 구축하는 일종의 공작성의 과정을 부각한다. 

페인팅과 함께 드로잉도 주목할 만하다. 이를테면 밑도 끝도 없이 연필로 그려나간 연이어진 선들이며,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기운 흔적이며 자국을 연상시키는 점선들, 그리고 각종 비정형의 얼룩들과 스크래치들이 형식논리의 산물 내지 요소이면서 동시에 일정하게는 그 자체가 일종의 삶의 질감에 대한 표상형식으로서 의미기능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그날그날의 생체리듬 내지 바이오리듬의 질감을 질료에 담아낸 경우로 보면 되겠다. 주로 연이어진 선으로 나타난 드로잉을 통해서 모티브와 모티브, 오브제와 오브제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상형하고 예시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런 분방한 드로잉이나 몸짓이 여실한 붓질 그리고 각종 생활 오브제를 유기적으로 어우러지게 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축성해낸 화면은 작가의 근간(전공)이 한국화에 있는 것임을 잊게 만든다. 사실은 시종 한국화의 근간을 유지하면서도 장르적 특수성의 한계 내지 카테고리에 한정되지는 않는 경우로, 정형화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분방한 사유와 방법론과 형식논리를 풀어낸 경우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내면의 표상이며 내적 에너지의 자연스런 발산의 경우로 봐야 할 것이다. 이로써 궁극적으론 장르적 특수성의 경계를 더 유연하게 확장한 경우로 봐야 할 일이다.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오브제 미술로 정의할 만하다고 했다. 그리기와 만들기, 오브제와 페인팅이 하나의 층위로 혼재하고 혼입되면서 구축된 화면은 꼭 무슨 흙벽을 보는 것 같고 회벽을 보는 것 같다. 그 이면에 시간과 건축의 개념을 머금고 있는. 주로 바탕화면의 경우지만(엄밀하게 작가의 작업에서 바탕화면과 모티브는 사실상 일체를 이루고 있지만, 그래서 바탕화면을 따로 구분해볼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여하튼, 그리고 편의상), 흙과 안료를 반죽해 발라 올린 표면에 덧칠하고 덧그리고 긁어낸 흙벽 같다. 채도가 낮은 색채와 무채색에 가까운 색채 그리고 단색조를 유지하고 있는 색감과 함께 특히 소재와 소지 고유의 질감과 질료와 물성에도 관심이 기울여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런 중성적인 색감과 소재의 질감이 어우러져서 마치 그 이면에 시간의 지층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은 고답적이고 숙성된 느낌을 준다. 이렇듯 시간을 머금고 있는 흙벽의 인상이나 느낌은 일종의 건축적인 프로세스와 결부되는데, 이질적인 재료와 방법을 중층화한 것이 그렇고, 바탕화면과 모티브가, 모티브와 모티브가 층층이 쌓이면서 그 이면의 흔적을 표면 위로 밀어 올려놓고 있는, 그래서 마치 흔적을 형상화한 것이 그렇다(흔적은 비가시적인 시간을 가시의 층위로 불러내는, 시간에 형상을 부여해주는 감각이며 조형방법이랄 수 있겠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에서 확인되는 소재 중 전형적인 경우로는 그물을 들 수가 있겠다. 화면에서 그물은 그때그때의 상황논리에 따라서 드로잉으로 그리고 오브제(이를테면 가녀린 실이나 노끈, 철사와 전선)의 직접적인 도입으로 형상을 덧입으면서 변주된다. 이를테면 가녀린 연필 선으로 그린, 삼각형과 역삼각형이 교차되면서 연이어지는 망구조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 바탕화면에 깔린 모눈종이의 촘촘한 격자무늬가 그물의 망구조를 대신하기도 한다. 한 덩어리로 얼기설기 엉켜있는 실타래 같기도 하고,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이어진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형상, 그리고 특히 근작에선 그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표면에 다양한 각 면을 가지고 있는 유리원석이나 광물의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형상 역시 크게는 그물망의 변주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물은 그물이면서 망이다. 바로 양가성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물은 작가가 일관되게 천착해온 주제의식이랄 수 있는 소유와 공유를 표상한다. 그물에 물고기가 걸려드는 것처럼 욕망이 걸려든다. 그리고 그물은 망과 망으로 연결돼 있다. 바로 관계를 표상한 것이다. 이를테면 주체와 타자, 타자와 타자, 개인과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속된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내포적인 관계의 논리를 상징한다. 덧붙이자면 이런 망구조며 연결구조로 인해 그물은 인연의 계기도 암시한다. 이렇듯 작가는 그물의 변주된 형태를 통해 소유와 공유, 관계와 인연으로 나타난 삶의, 존재의 계기를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개별 작품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 화면을 일궈낸다. 일종의 모자이크에 비유할 수가 있겠다. 작은 화면들을 한자리에 모아 큰 화면을 이루게 한 것인데,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조합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이 가능한 비결정적인 구조며 열린 구조가 특징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합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여하에 따라서 그림이 매번 달라질 수 있는 유기적인 생리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부분이 전체의 일부로 예속되면서도 여전히 그 자체의 자족적인 성질을 유지하고 있는, 이런 특성으로 인해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평면에서 나아가 일종의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 장소특정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공간친화적인 성질을 내재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모자이크 화법을 통해서 작가는 어떤 의미내용을 탑재하고 전달하는가. 작가의 그림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그 꼴이 어슷비슷하다. 바로 서로 다르면서 하나로 통하는 그 꼴이며 형태 그대로 일상에 대한, 삶에 대한, 존재에 대한 표상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소유와 공유, 관계와 인연, 그리고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로 나타난 존재의 생리며 생태를 자신의 작업 속에 잉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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