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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운 /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그리워하다

고충환

윤병운이 겨울풍경을 그렸다. 작가가 그린 그림 속 풍경처럼 겨울 하면 눈이 생각나고 잿빛 하늘이 생각난다. 북유럽의 전설에 등장하는 설인이 생각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생각나고(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잠자는 미녀라는 이상한 소설의 저자이기도 하다) 영화 렛미인(Let me in)이 생각난다. 

특히 스웨덴 영화 렛미인은 북유럽의 겨울을 특유의 정서로 그려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겨울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지만, 겨울을 서사로 그리고 영상으로 옮기면 꼭 이런 식이지 않을까 싶은 영화다. 영화에서 겨울은 단순한 계절이나 일상을 넘어선다.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드는, 어떤 정서적 상태로 녹아든, 순환하는 자연의 관성이 멈춰선,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그런 계절 같고 절기 같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북유럽의 겨울을 서사로 풀어내고 그림으로 옮겨놓는다. 뱀파이어 소녀와 인간 소년 간의 우정과 사랑을 테마로 한 영화는 뱀파이어에 대한, 그리고 뱀파이어를 재현하는 방법에 대한 선입견을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뱀파이어에 서린 피와 죽음이 순백의 겨울정서에 녹아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가 흘린 피가 하얀 눈에 스며들면서 더 잘 대비되고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가 영화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겨울은 영화의 또 다른 축이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와 겨울이 서로 상징하는, 그리고 그렇게 뱀파이어가 겨울의 화신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가 흘린 피나 뱀파이어가 맞닥트린 죽음은 인간의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이고 생물학적인 조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 공감이 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뱀파이어가 묻는다. 내 속에 들어오지 않을래? 어떻게 하면 내가 네 속에 그리고 네가 내 속에 들어가고 들어올 수 있겠니? 바로 초대와 소통의 문제다. 각각 뱀파이어 소녀와 인간 소년으로 대리되는 타자간의 소통을 다루고 있는 것. 소통한다는 것, 그것은 타자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타자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그렇게 타자 속으로 들어가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영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다룬다. 뱀파이어를 매개로 겨울의 상징과 표상을 다루면서(이를테면 죽음과 재생 혹은 환생과 같은. 아님 윤회?) 타자간의 소통을 묻는 영화다. 


윤병운이 그린 겨울풍경은 꼭 뱀파이어가 빠진 영화 렛미인 같다. 상상력의 비약이나 자의적인 연관이라고 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보기에 따라서 영화 렛미인은 뱀파이어를 구실로 사실은 북유럽의 겨울정서를 그린 영화라는 생각이고, 그런 점에서 단순히 겨울풍경을 그렸다기보다는 인간의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정황을 겨울풍경에 빗대어 그린 작가의 그림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불현듯 영화가 생각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화가 그려 보이는 겨울정서가 겨울을 소재로 작가가 재현해놓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와 서로 통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친근하면서도 낯선, 약간은 이율배반적이기도 한 이중적 감정 내지 감성을 공유한다고나 할까. 더욱이 작가의 그림은 영화 제목처럼 자신이 재현해 보인 겨울 정서 속으로, 겨울의 신화와 전설 속으로, 결국 자기 내면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굳이 재현적이어서라기보다는 화면에 사물을 배치하는 것이나 연출하는 행태가 무슨 사진 같고 영화장면 같은 정황도 이런 의미연관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친근하고 낯설다. 뱀파이어가 인간처럼 그려져서 친근하고, 그 설정이며 정황이 상식을 벗어난 것이어서 낯설다. 윤병운의 그림 역시 그런데, 알만한 겨울풍경이어서 친근하고, 그럼에도 보면 볼수록 낯설다. 친근한 표면과 낯선 이면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대로 겨울로 상징되는, 겨울에 투사된 존재의 양가성(이를테면 삶과 죽음이 교차되고 현실과 비현실이 교직되는 것과 같은. 여기서 겨울이 유독 비현실적인 계절감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까)을 암시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겨울풍경다운 잿빛 대기나 희뿌연 공기가 무슨 반투명한 막이나 베일인 양 그림 위에 드리워져서 이런 양가성을 가름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경계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다시, 윤병운의 그림은 친근하다. 무슨 크리스마스카드 속에 들어와 있는 양 부드럽고 포근하고 우호적인 감성으로 감싸 안는 느낌이다. 그림을 보면,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눈발로 감싸인 정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나무 한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나무 사이로 빨간 버스나 자동차가 지나간다. 그리고 이따금씩 어디서 왔는지 모를 말 한 마리가 가로나 공원을 지나쳐간다. 말은 때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눈덩이나 바위처럼 생긴 비정형의 형태 위에 동상처럼 자리하고 있기도 한다. 마치 양 날개인 양 두 마리의 개를 거느린 여인이 얼어붙은 듯 걷잡을 수 없는 눈발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정경도 보인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 곧잘 등장하는 정경도 보이는데, 화면의 전면에 책무더기를 배치해 배경화면이 실제보다 더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풍경이다. 그 자체가 무슨 책의 집 같고 성채 같다. 여기까지는 여하튼 알만한 풍경들이고 모티브들이다. 

그런데, 이런 알만한 정경들이며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정작 보면 볼수록 낯선 느낌이다. 왜 빨간 버스와 빨간 자동차인가. 가로 혹은 공원을 가로지르는 말은 무엇이며, 여인은 또한 왜 눈 속을 홀로 지키고 서 있는가. 그리고 성채처럼 와 닿는 책 더미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알만한 정경에 함정이 있다. 알만한 정경이며 있을 법한 정경은 현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비현실이라고 할 수도 없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풍경이다. 신기루와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는 알레고리적인 풍경이다. 있을 법한 풍경이면서도 정작 실제로는 존재하지는 않는 풍경이다. 작가의 관념으로 재구성된 풍경이며 만들어진 풍경이며 연출된 풍경이다. 바로 겨울로 대리되는 정서와 서정, 신화와 전설을 연출하기 위해 짜깁기되고 재구성된 풍경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짜깁기되고 재구성되는가. 빨간 버스와 빨간 자동차는 알고 보면 작가 자신이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호출한 미니어처 장난감이다. 그리고 말 역시 유년의 작가가 타고 놀던, 부분적으로 칠이 벗겨진 목마다. 그리고 어떤 말은 비록 눈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정황상 신화에 등장하는 유니콘이기 쉽다. 여기서 실제로 그런지, 실제로 작가의 유년이 그랬는지 여부는 중요하지가 않다. 작가는 여하튼 그런 유년의 경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장하고 있고, 사적인 꿈을 일반적인 꿈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경우로 봐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미술사에서 차용한 부분 이미지들(이를테면 알고 보면 거대한 두상임이 드러난 눈덩이나 여인 조상)과 책으로 상징되는 내면화의 경향성(책은 존재의 집이며 내면의 집이다)이 가세하면서 일종의 겨울우화로 부를 만한 어떤 판타지의 경계를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 경계 위로 눈이 내린다. 눈이 시야를 가리는 풍경이 무슨 반투명한 막이나 베일이 드리워진 것 같다. 그리고 그 베일은 풍경을 이쪽과 저쪽으로, 내가 서 있는 곳(혹은 내가 속해져 있는 곳)과 내가 바라보는 곳으로 구분한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는 일종의 사이풍경을 그린다.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신화, 현실과 기억, 기억과 망각 사이의 풍경을 그리는 것인데, 일종의 경계풍경으로 명명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주제 레테의 숲이 갖는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레테의 숲은 원래 레테의 강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망자가 건너는 망각의 강이다. 강이든 숲이든 그곳에서 현실은 망실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망각으로부터 건져 올린 그림이며, 망실될 것들로부터 건져낸 그림이다. 이렇게 해서  그림이 희뿌옇고 흐릿한 이유가 설명이 되겠다. 작가는 말하자면 그저 겨울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겨울풍경에 빗대어 기억과 망각 사이의 역학(심리적 역학?)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막간(Intermission)이라는 또 다른 그림의 제목이 이런 사이풍경이며 경계풍경을 지지하고 강화한다. 기억과 망각 사이를 그린다는 것, 막간을 그린다는 것, 사이와 경계를 그린다는 것, 그것은 결국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다. 멀기 때문에 흐릿하고, 자꾸 멀어지다가 종래에는 지워지기 때문에 그립다. 

여기서 다시, 영화 렛미인의 제목과 의미를 상기해보자. 작가는 겨울풍경에 빗대어 그린 그리움으로, 결국 자기 내면으로 초대한다. 내 속에 들어오지 않을래? 어떻게 하면 내가 네 속에 그리고 네가 내 속에 들어가고 들어올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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