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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희 / 관조하는 풍경과 자연의 품성을 닮은 그림

고충환


외관상 종이의 조직이며 표면질감은 균일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 종이의 조직이며 표면질감은 균일하지가 않다. 그 속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혹은 일정한 공기의 지층을 포함하고 있어서 통풍성이 뛰어나고 통기성이 뛰어나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속에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며 공기가 흐르는 통로를 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숨 쉬는 종이라는 말은 그저 무의미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숨 쉬는 종이라는 말은 종이가 자연에서 유래했으며, 그것이 변형된 이후에조차 여전히 자연의 본성을 보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종이가 주는 친근함은 바로 이런 자연의 본성 탓이며, 꽉 막힌 절대평면을 의미하는 캔버스와 차별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꽉 막힌 절대평면은 주체와 상호작용하지 않는 그림, 다만 회화 자체의 형식논리만을 위해 예비 된 평면, 철저하게 제로지점에서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바탕에 연유한 모더니즘 회화, 특히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즘 회화에 걸 맞는 것이었다. 절대평면이란 회화의 조건을 환원주의로 되돌려놓는 것으로서, 의식의 영도로 나타난 현상학적 성찰에 대한 회화적 대응 내지 응답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명희는 품성도 그렇거니와 그림에서도 이처럼 차갑고 무미건조한, 논리적이고 엄정한, 정서적 환기를 위한 자리가 없는 캔버스의 절대평면이 체질에 맞지가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확인된다. 비록 긴 화력을 이어가면서 이따금씩 그리고 때론 꽤나 진지하게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논리며 패러다임을 수용한 적이 없지 않지만, 그 수용은 언제나 전면적인 것이 아닌 유보적인 것이었다. 작가가 그린 그림, 이를테면 최소한의 흔적으로  최대치를 암시하는 그림, 형식적인 그림임에도 왠지 재현을 상기시키는 그림, 추상적인 그림 속에 표현을 함축한 그림, 무분별한 듯 자연스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논리에 대한 이렇듯 유보적인 태도가 읽히고 이로부터 유래한 갈등이 감지된다. 모르긴 해도 그 지난했을 갈등이 숙성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허허롭고 소소한, 헐렁하면서 꽉 찬 그림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래서 좀 과장을 하자면, 아무렇게나 내질러도 그림이 되는 경지며 차원에 도달했을 것이다. 

작가가 지나왔을 갈등 중 특히 추상과 표현의 길항에 대해서는 곰브리치를 떠올리게 한다. 완전한 추상도 없고 표현적이기만 한 그림도 없다. 다만 추상과 표현을 이어주는 연장된 지평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추상은 언제나 표현을 그리고 표현은 추상을 지향하고 머금는다. 그리고 정서적 환기와 형식논리의 부침에 대해서는 가다머의 지평융합을 떠올려준다. 알다시피 작가는 원래 한국화를 전공했다. 당연히 종이에 친숙했고 지역적이고 전통적인 미적 감수성을 체질적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이후 학습이며 창작 과정에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자극제로 그리고 때론 돌파구를 위한 계기로서 흡수되고 수용된다. 이 두 지평이며 멘탈리티가 작가의 회화적 인격 속에 하나의 지층으로 녹아든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종이에 대한 설명으로 서두를 연 것은 작가의 그림이 종이의 품성을 닮았고, 그 품성이 잘 발현되도록 종이의 품성에 자기의 품성을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품성이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질감이며 색감을 비롯한 형식요소 내지 성질의 많은 부분을 이미 함축하고 증언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연유한 것이다. 물론 종이 자체가 저절로 자기 품성을 발현한다고 볼 수는 없다. 종이로 하여금 자기 품성을 발현하도록 하는 계기는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며 문제이다. 작가가 아니라면 종이는 그저 종이일 뿐이다. 작가의 그림은 실제로도 그리고 여전히 종이에 그린 먹그림을 상기시킨다. 혹은 먹그림의 변주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먹이 목탄으로 대체되었을 뿐. 그런데 따지고 보면 먹도 목탄도 하나같이 숯이며 숯 검댕이 아닌가.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종이로 하여금 자기를 발현하도록 이끄는가. 어떻게 그저 종이를 예사롭지 않은 종이로 바꿔놓는가. 

작가는 종이에 흑색으로 바탕칠을 하고 그 위에 흰색 아크릴 물감을 덧바른다. 밑칠이 적당히 굳은 타이밍을 포착해 윗칠을 덧발라 윗칠과 아랫칠이 서로 스며들고 배어나오게 한다. 그렇게 스며들고 배어나오는 현상 자체가 이미 충분히 회화적이다. 얼마다 어떻게 스며들고 배어나오게 할 것인가. 적당한 타이밍을 포착하는 것이나 두 색 층이 어우러져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게끔 유도하는 것 모두가 감각의 문제이다. 그저 무미건조한 바탕화면을 넘어서는, 그 위에 모티브를 받아들이기 위한 예비화면 이상의 남다른 감각이 요구되고 작동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색 층이 적당히 굳은 타이밍을 붙잡아 그 위에 목탄으로 선을 그린다. 외관상 우연을 가장한 듯 무분별한 듯, 사실은 작가의 몸에 밴 감각을 따라 목탄을 북북 그으면 선이 그려지고 그 선의 가장자리로 부셔진 목탄 가루가 우수수 흩어져 내린다. 그 가루 중 일부는 미처 굳지 않은 색 층의 부분으로 흡수되고, 다른 일부는 표면 위에 겉돈다. 그리고 원하는 분위기며 질감이 나올 때까지 재차 그리고 거듭 아크릴 물감으로 지우고 목탄으로 그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어쩌면 이처럼 목탄으로 그리고 아크릴 물감으로 지우는 반복과정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겠고, 그 과정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실제로도 그렇다. 회화 자체의 형식논리며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공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소간 무의식적으로 자동 기술적으로 그리고 지우기를 거듭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를 덩달아 지우는, 그래서 자기는 없고 다만 자신의 몸짓이 만들어준 행위의 흔적만이 남아 오롯해지도록 한 것으로 치자면 예술을 수신의 한 수단이며 계기로 본 동양미학의 정신이며 태도를 계승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유감스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논리에 자기를 환원하고 싶지가 않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자동 기술적으로(사실은 몸에 밴 감각으로, 숙련되고 체화된 감각으로)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고 거듭했을 뿐인데, 그래서 경우에 따라선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논리를 증언하는 징후이며 좌표에 머물 수도 있었는데, 의외로 그리고 보면 볼수록 그림 속에선 재현적인 요소며 성질이 스멀스멀 배어나온다. 플라톤의 상기(관념을 상기시키는 질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룩(재현을 암시하는 추상)에서처럼. 

작가의 그림에는 새와 바람과 숲과 같은 자연을 직접 지시하는 제목 이전에 유독 <바라보다>는 다소간 관조적인 제목이 많다. 뭘 바라보는가. 새와 바람과 숲과 같은 자연을 바라보고, 그 자연을 내재화한 자기 내면을 바라본다. 그래서 작가가 붙인 <풍경>이라는 또 다른 제목은 따라서 사실은 내면풍경이라는 의미로 읽혀져야 한다. 작가는 다름 아닌 내면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자연을 관조하면서, 자연에 동화된, 자연의 품성을 닮은, 혹은 닮고 싶은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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