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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철 / 생명의 원형을 찾아서

고충환

Flow of life. 생명의 흐름이란 의미이다. 순환하는 생명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최근 수년 간 안병철이 천착해온 주제의식이며 일정한 일관성과 함께 심화시켜온 주제다. 이 주제에서 보듯 작가는 삶을 흐르는 것으로 그리고 순환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흐르는 삶과 순환하는 삶은 상호적이며 결국 동격이다. 삶은 삶으로부터 죽음으로 그리고 재차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끊임없이 순환하고 흐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삶에 대한 작가의 관념은 과연 사실 그대로일까.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고독한 이유가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연속성의 끈이 단절되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에 인간은 고독하지가 않았다. 삶과 죽음이 연속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 인간이 점차 문명화되면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삶의 관성이 맞춰지게 되고, 덩달아 죽음은 가장 비효율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고 금기시되면서 삶의 변방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래서 현대인의 의식 속에 삶과 죽음의 불연속성은 당연한 진리로 정박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 고독을 끝장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처음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길 밖에 없고, 효율성의 법칙을 심각하게 재고하는 길 외에는 없다. 그래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무분별한 낭비이며 전면적인 파국(파국을 통한 거듭나기? 파국을 통한 재생? 파국을 통한 다시 시작하기? 죽음과의 화해?)이다. 죽음의 속성을 삶의 속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현대인의 의식 속에서 죽음은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고, 가급적 삶의 가장자리로 멀찌감치 떼어놓고 싶은 것이 사실이고 상식이다. 삶이 흐르고 순환한다는 것 그러므로 삶과 죽음이 연속돼 있다는 작가의 관념은 이런 사실이며 상식과 배치된다. 어쩌면 작가는 이 관념이며 주제를 매개로 삶을 다시 흐르게 하고 순환하는 삶을 재가동시키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에게 삶은 흐르는 것이며 순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을 의미한다. 흐르고 순환하는 것은 생명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가 있는가. 작가는 그 계기를 씨앗에서 찾는다. 어떤 사람은 세포에서 그 계기를 찾기도 하지만, 세포나 씨앗이나 최초의 생명이 발아하는 생명의 근원이며 최소단위원소란 점에서 일맥상통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로써 작가는 식물의 씨앗이며 배아 그리고 떡잎을 형상화하기도 하고, 씨앗으로부터 이제 막 싹이 움트는 극적인 순간을 조형하거나 한다.



안병철.생명의 흐름, 스테인리스스틸, 2012

식물의 씨앗은 그 형태가 천태만상이다. 그렇다면 씨앗을 조형하기 위해선 그 다양한 형태 모두를 일일이 되살려내야 할까. 여기서 작가는 재현적인 방법 대신 일정한 양식화의 방법을 취하고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다. 비록 그 형태가 천태만상이지만 얼추 어슷비슷한 형태로 추슬러낼 수는 있다. 실제를 양식화하고 추상화한다는 것은 실제와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요구한다. 실제를 양식화하고 추상화한 것이므로 실제 그대로일 수가 없고, 실제에 근거한 것이므로 실제와 동떨어지지가 않는다. 최소한의 닮은꼴을 통해 재현적인 요구며 씨앗을 알아볼 수 있는 근거를 충족시키면서, 양식화와 추상화의 과정을 빌려 자신의 관념을 담아낼 수가 있다. 얼추 씨앗의 재현적인 형태와 삶 내지 생명에 대한 작가의 관념이 결합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삶은 흐른다. 흐르는 것에는 모가 없다. 그래서 모가 없는 곡선이 취해지고 유선형의 형태가 취해진다. 그런가하면 흔히 직선은 문명의 소산으로 여겨지고 곡선은 자연의 소산으로 받아들여진다. 해서, 곡선이야말로 유기적 형태의 전형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일단 곡선으로 이뤄진 유선형의 형태를 취한 씨앗이며 배아며 떡잎의 기본 꼴이 만들어지고 나면, 이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고 심화하는 것이다.


곡선이며 유선형의 형태는 유기적 존재의 전형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치자면 원형일 수가 있겠다. 실제 자체가 아니라 실제를 상기시키는 전형적인 형태며, 실제 그대로가 아니라 실제를 암시하는 원형적인 형태로 이해하면 되겠다. 작가의 조각에서 엿보이는 최소한의 형태며 단순한 구조는 바로 이처럼 실제 자체 내지는 실제 그대로에 부수되기 마련인 일체의 우수리가 떨어져나간 경우, 그래서 씨앗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만이 오롯해진 경우, 그리고 그 속에 삶이며 생명의 원형적 관념이 압축된 형태로 깃들여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의 조각은 단단하다. 금속으로 만든 것이니만큼 단단한 것이 당연하다. 군더더기가 없는 심플한 구조며 형태로 인해 더 단단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대개의 씨앗이 그런 것처럼 그 단단한 껍질 속에 여린 생명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의 거울을 떠올리게 할 만큼 그 표면이 광택으로 번쩍거린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작가는 동판용접과 더불어 씨앗이란 소재에 입문했다. 동판용접으로 형상화된 씨앗은 지금의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씨앗보다 더 씨앗답다. 적갈색의 색조나 우둘투둘한 미세요철표면이 자연의 색을 닮았고 흙의 질감을 닮았다(보기에 따라선 부드러운 질감의 가죽을 떠올리게도 한다). 자연을 닮았고 흙을 닮았으니 그로부터 유래한 씨앗 역시 닮은꼴일 수밖에 없다. 그 닮은꼴에선 반영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결국 반영은 동판으로부터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로 옮겨가면서 새로이 생겨난 반응이며 현상이랄 수 있겠다. 동판에선 없었는데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에서 새로이 발견된 반응? 아님 현상? 그 이면에선 소재 저마다의 물성에 주목하고 그 차이를 강조한다는, 소재 고유의 물성에 조형원리를 일치시킨다는 소위 물성조각의 기획이 작동하고 있다. 양식화 내지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서 가급적 군더더기를 없앤 최소한의 원형적 형태로 대상을 환원하는 것이나 소재 고유의 물성에 주목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물려받은 혹은 은연 중 몸에 밴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적이고 체질적인 유산일 것이다.


이런 소재의 물성과도 무관하지가 않은 것이지만, 동판으로 재현된 씨앗은 그 속성이 내재적이고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씨앗은 외재적이다. 동으로 만든 씨앗이 그 속에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면,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씨앗은 그 생명의 원리랄 수 있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확장한다. 이런 발산과 확장은 말할 것도 없이 소재의 거울 같은 표면효과에 기인한다. 거울 같은 표면이 자기 외부의 환경을 흡수해 들이고 공간을 빨아들인다. 그래서 그 공간이며 환경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고, 스스로는 그 공간이며 환경으로까지 연장된다. 스스로의 경계를 열어 공간이 그리고 환경이 속해져 있는 장과 하나로 통한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환영과도 같은, 그러면서도 실제를 되비친 것이므로 순수한 환영으로 볼 수는 없는 일루전 환경이 일말의 긴장감으로 조형물을 감싸고 공간을 뒤덮는다. 이런 거울환경이 닫힌 형태를 열어놓고, 무거운 형태를 떠다니게 한다. 실제로는 단단하고 무거운 조각이지만 보기에는 가볍게 부유하는 것 같은 인상이 일종의 역설적 상황을 불러들여 작가의 조각에 논리적 견고함(아님 논리적 유희?)을 더한다는 생각이다.


안병철, 생명의 흐름, 스테인리스스틸, 2012


작가는 씨앗을 소재로 한 근작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작업노트에 적고 있다. 어두운 땅속으로부터 작고 단단한 씨앗이 싹을 틔워 여리고 여린 새순이 척박한 땅 위로 머리를 내미는 모습은 신비롭고 삶에 대한 경이감을 느끼게 한다고. 씨앗이 싹을 틔우는 모습이 삶에 대한 경이감을 느끼게 한다? 삶에 대한 경이감은 고사하고 씨앗이 싹을 틔우는 모습을 실제로 지켜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삶을, 생명을 경이감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경이감이 무슨 아득한 전설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작가의 조각은 단단한 껍질로 감싸인 씨앗을 조형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속에는 생명이 흐르고 순환하고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생명에 대한 경이감이 의심스러운 시대에 생명에 대한 경이감을 제안한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 크게 와 닿는다. 잘하면 단단한 껍질 속에 감싸인 생명이 내쉬는 숨과 함께 미세한 파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온몸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가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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