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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환 / 보는 것과 보고 싶은 것

고충환

손기환의 그림은 문학적이다. 서사가 강하고 메시지가 강하다. 마주보기란 주제 역시 문학적이다. 마주보기란 주제가 에리히 캐스터너의 마주보기란 시를 떠올리게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전언도 있지만, 정작 서사에나 어울릴 법한 야만의 시대에 구상되고 쓰인 서정시다.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 봅니다/ 파랑바람이 붑니다/ 싹이 움틉니다/ 고급 수학으로/ 도시의 성분을 미분합니다/ 황폐한 모래더미 위에/ 녹슨 철골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서로서로/ 핏발 선 눈들을 피하며/ 황금충 떼가 몰려다닙니다/ 손이 야구장갑만 하고/ 몸이 미라 같은 생물들이/ 허청허청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립니다/ 우리가 쌓아온 적막 속에서/ 우리가 부셔온 폐허 위에서/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 봅니다/ 파랑바람이 붑니다/ 싹이 움틉니다/ 피곤에 지친 눈을 들어/ 사랑에 주린 눈을 들어/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 봅니다/ 마술의 시작입니다.


좀 길긴 하지만, 마주보기란 시의 전문을 인용했다. 이 시가 감동적인 것은 그들이 아닌 우리를 이야기하고, 우리를 통해 그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 속에서 핏발 선 눈들을 피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황금충 같은, 손이 야구장갑만 하고 몸이 미라 같은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 보면 파랑바람이 불고 싹이 움트는 마술이 일어난다.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보는 순간 비로소 그 마술은 시작된다.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보는 것이 마술이 시작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보지 않으면 그 마술은 결코 시작되지도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손기환이 제안하고 있는 마주보기에 의해서도 파랑바람이 불고 싹이 움트는 마술이 시작되고 일어날까. 시대와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캐스터너의 마주보기는 손기환의 마주보기와 묘하게 어울린다. 그럼에도 파랑바람이 불고 싹이 움트는 마술은 쉽게 혹은 결코 일어날 것 같지가 않다.


DMZ을 경계로 사람들이 망원경을 통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김정은과 이명박, 김정은과 오바마, 김정은과 주한미군사령관이 마주보고 있다. 북한의 지도자와 남한의 대통령, 북한의 원수와 미합중국의 대통령, 북한의 젊은 어버이와 머리가 희끗한 주한미군의 수장이 마주보고 있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다.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각 국가의 이해관계와 이익을 대리하고 수행하는 대타적 주체들이다. 그들은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것일까. 혹 사실은 뭘 보고 싶은 것일까.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보면서 동시에 분석하고 판단하고 예기하는 총체적 행위이다. 지각하면서 인식하는 동시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보는 행위 속엔 상대방을 향한 욕망과 호기심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이 서려있다. 막연한? 그동안 시간이 꽤나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첨예했던 불안감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조바심 나는 불안감은 견딜만한 불안감으로 변질되고 수그러들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처럼 막연한 불안감은 작가의 그림에서 다시 첨예해지고 극명해진다. 바로 회화적 문법 탓이다. 현실은 관계의 망 속에 놓여있고, 일정한 잡음이며 노이즈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현실은 노이즈에 파묻히기 쉽다. 그런데,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관계의 망으로부터 특정 사실을 떼 내어 따로 부각할 때, 더욱이 그렇게 떼 낸 사실과 사실을 대비시킬 때 갑자기 현실은 분명해지고 불안감은 첨예해진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정국이며 상황논리를 극명하게 하고, 이를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안 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진즉에 현실주의 미학이며 실천논리에 천착해온 작가에게 그 회화적 문법은 낯선 것이 아니다. 어떤 사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며, 특정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마주보기 연작에선 남북대치정국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부각하는 것이 그 사태며 메시지에 해당하고, 실제로도 그 사태며 메시지는 현실적인 사안으로 와 닿는다. 일정한 회화적 성과와 함께 긴박한 현실감을 자아내는 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성공적인 경우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회화적 성과와 관련해, 정작 작가의 그림 어디에도 그 대치정국을 첨예하게 해 줄 DMZ은 그려져 있지가 않다. 그리지 않고도 그린 것에 진배없는 정황에 대한 이해와 이에 따른 일종의 생략화법이 회화적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생략은 꼭 그만큼의 암시를 불러들여 회화의 빈 곳을 채워 넣는 법이다.


시간이 꽤나 흘렀고, 처음에 첨예했을 불안감도 덩달아 막연해졌다고 했다. 작가는 이처럼 막연해진 불안감을 남북대치정국에 대한 현실적 인식이며 보편적 인식인 것으로 진단하고, 그 진단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 각종 군 관련 구조물을 포함한 DMZ 인근의 풍경들이며, 한강변의 풍경들이다. 군 관련 구조물로는 GP(최전방 방어지점 또는 초소) 막사와 벙커, OP(관측소), GOP 통문(남측 GOP에서 GP로 들어가는 출입구), 대전차 방호물과 토치카를 아우른다. 그 구조물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이 최전방이며 최전선임을 알겠다. 실제로 최전방에 근무했던 작가 자신의 군 경험이 뒷받침된 탓에 그 정황은 실감과 함께 설득력을 얻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정작 그림에서 이 구조물들은 그저 대략적인 스케치로만 그려져 있어서, 그리고 더욱이 마치 암실에서 최소한의 불빛만으로 사물대상을 겨우 가늠하듯 적갈색의 모노톤으로 그려져 있어서 전혀 실감나지가 않는다. 사물대상을 실감나지 않게 그려 남북대치정국에 대한 실감나지 않는, 막연한, 비현실적인 현실인식을 표상한 것이다. 이런 실감나지 않는, 막연한, 비현실적인 현실인식은 한강변을 그린 그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최전방만 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서울은 잠정적인 전선과 지척일 수 있다. 작가는 마찬가지로 회흑색의 모노톤으로 처리돼 마치 안개 낀 정국을 보는 것 같은 희뿌연 하늘 위로 GP와 OP 그리고 GOP와 관련한 일련번호와 고유넘버를 기호로 표기해 막연한 대치를 엄연한 대치로, 추상적 현실을 엄연한 현실로 바꿔놓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강변을 그린 그림들에서 화면을 가로지기로 자르고, 그렇게 잘린 화면의 윗부분으로 하늘을 대신한 것이다. 단색으로 처리돼 추상적으로 보이는 화면이 사실전경을 묘사한 화면 아랫부분의 형상그림과 대비된다. 도대체 이 추상적인 화면은 무슨 의미일까. 어둠에 잠긴 한강변의 하늘일까. 어둠에 잠긴 정국에 대한 아님 현실인식에 대한 메타포일까. 남한은 북한을 모르고 북한은 남한을 모른다는, 무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일까. 호시탐탐 남한은 북한을 (엿)보고 북한은 남한을 (엿)보는데 정작 아무런 실체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고 싶은 것을 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마도 이 모든 현실인식이며 상징, 무지며 욕망을 복합적으로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희뿌연 한강변 위로, 안개 자욱한 정국 위로 전운이 감도는가. 여하튼 절반으로 잘린, 꽉 막힌 그 추상적 화면이 일전에 그린 벽 그림 연작의 또 다른 의미론적 버전 같고 재해석 같다. 이렇게 작가는 전작을 근작 위로 되불러내고 있었다.


서로 보는 것이 사실은 서로 보고 싶은 것을 볼 뿐일 수 있다고 했다. 북한으로 치자면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자는 식의 선동적인 구호가 선명한 반미선전 포스터, 불바다에 감싸이거나 불바다 급에 해당하는 전운이 감도는 남한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은 남한대로 지칠 줄 모르는 여전한 맹렬함으로 무장한 반공만화 주인공이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보여주고 싶다? 누구에게? 인민과 국민에게. 여기서 작가는 정치적 현실과 함께 정치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건드린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시금 전작을 근작 위로 호출한다. 만화와 포스터의 형식을 차용하고 각색한 것인데, 작가는 이렇게 차용하고 각색한 이미지를 물리적 이미지라고 부른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글에서 유래한 물리적 이미지는 심리적 이미지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외적 환경과 사건이 개인의 내면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내면을 결정하기까지 한다는 의미 곧 내면이 된 외면이며, 그 일맥상통한 경우와 입장은 미셀 투르니에의 외면일기에서도 확인된다. 예나 지금이나 만화와 영화, 포스터와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광범위한 서브컬처의 매개체들이 여러 형식으로 작가의 작업 속에 녹아들고 서사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 싶다.


문제는 그 의미가 표면에 드러나 보이는 탓에 너무 빤한 형식과 진부한 서사(사실은 빤하고 진부한 것으로 여겨질 뿐인, 그런 통념일 수 있는, 그래서 때론 통념 자체가 의심스러울 수도 있는)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자산을 어떻게 자신의 그림 속에 녹여낼 것이며, 현실성 있는 문법으로 그리고 회화적인 문법으로 재생할 것인가 고민하는 일이며,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한참동안 작가의 일부가 되어줄 것이다. 작가에게 서브컬처는 어느덧 물리적 이미지로, 외면일기로, 그리고 내면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그것도 진부하지도 빤하지도 않은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가의 그림은 얼핏 반공방첩과 삐라의 시대에 시간이 멈춰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정작 정지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아닐까. 어떤 의식이 어떻게 정지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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