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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열 / 삶을 매개하는 죽음과 찬란한 진화

고충환

이갑열, 삶을 매개하는 죽음과 찬란한 진화

떠나는 자만이 꿈 꿀 수 있다. 이갑열의 이 말은 작업에 대한 그리고 조각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입장을 함축하고 있다. 어떤 작가는 한 가지 형식과 의미내용을 심화시키고 어떤 작가는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한다. 이 중 이갑열은 시종 자기변신을 시도하는 편에 속한다. 이 말은 단순한 형식논리와 주제의식을 넘어서는 보다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똑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가 없고 똑 같은 시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가 없다. 존재는 물처럼 흐르고 시간처럼 돌이킬 수가 없다. 오직 변화하는 찰나와 순간들의 연쇄가 있을 뿐이다. 그 순간들을 살기 위해선 매번 거듭나야 한다. 이 말은 간단없는 형식실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자의식을 향하고 거듭나기를 통한 자기갱신을 향한다. 

떠나는 자만이 꿈 꿀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은 무엇보다도 간단없는 형식실험을 의미한다. 매번 지금과는 다른 형식을 찾아서 떠나는 것인데, 이는 매순간 자기부정과 자기갱신에 의해 뒷받침된다. 작가가 형식을 만들고 제안하는 조형예술가 혹은 조각가임을 생각하면 그 자체가 형식과 탈형식, 조각과 탈조각, 만드는 조각(직조)과 만들지 않는 조각(개념미술 혹은 빛과 소리와 공기를 매개 혹은 매질로 한 소위 비물질조각)의 논리와도 통한다. 다른 형식은 기왕의 형식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기왕의 형식에 대한 반성이 없이 다른 형식에 대한 욕망도 문제의식도 추동될 리가 없다. 기왕의 형식을 짚고서야 다른 형식으로 나아갈 수가 있고 만드는 조각을 디디고서야 만들지 않는 조각으로 도약할 수가 있다. 그렇게 작가는 형식과 탈형식, 조각과 탈조각, 만드는 조각과 만들지 않는 조각 모두를 아우른다.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떠난다는 것은 삶의 여로를 뜻하며, 그 최종 종착점은 죽음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고, 따라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죽음이 삶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는 동시에 삶의 문제이며 존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은 도대체 하나의 아이덴티티에 연유한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그 스펙트럼이 넓다. 이처럼 넓은 형식의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의식만큼은 하나의 의미론적 지점을 향하는데,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을 묻는 거대담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그 거대담론의 주요한 그리고 결정적인 한 계기가 된다. 이로써 그 자체 삶이기도 한 죽음을 비롯한 존재론적 문제의식이며 자의식을 다양한 형식의 스펙트럼을 빌려 전개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포이에시스. 포이에시스는 만든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질료에는 이미 형상이 있다. 그러므로 그 형상은 이처럼 이미 있는 형상과는 다른 형상일 것이다. 그 형상이 에이도스이다. 사물에 잠재돼 있는 형상이며,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이다. 사물의 잠재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조각가는 그 잠재적인 형태가 잘 드러나 보이도록 돕는 조력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 자체가 말년의 미켈란젤로를 괴롭혔던 문제이기도 하다. 조각에 관한한 능동적인 창조적 주체인줄로만 알았는데, 사물 속엔 이미 완전한 형상이 잠자고 있고 그 잠자는 형상을 주관하는 신의 의지에 부닥친 것이다. 이런 연유로 미켈란젤로가 말년에 제작한 상당한 조각들이 미완성인 채로 방기돼 있고, 그 미완성이 오히려 신의 의지를 암시함으로 인해 더 큰 감동으로 와 닿는 이유이며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이도스라고 부르고 플라톤이 이데아로 명명한 이 잠재적인 형태며 완전한 형상이란 무슨 의미인가. 존재의 본질이며 원형이다. 다른 말로는 자기다움이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자기만의 본성 곧 자기다움을 내장하고 있다. 결국 조형행위란 존재의 자기다움을 오롯하게 하는 것이다. 조형행위 곧 만드는 행위를 통해서 사물의 질료가 가지고 있는 감각적 형상 저편의 존재의 본성이며 원형을, 존재의 자기다움을 암시하고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갑열의 조각에서 이처럼 포이에시스에 해당하는 경우로는 < 신세계를 찾아서>와 <인간의 길, 인간의 문> 시리즈가 주목된다. 이 가운데 신세계를 찾아서 시리즈는 사실상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을 찾아서, 로 고쳐 읽어도 무방하다. 신세계는 미래가 아닌 원형적 뿌리의식을 되짚는 과정이었고, 신화적 사실과 관념적 실재를 현재에 되불러오는 과정이었다. 관념적 실재는 감각적 실재와 다르다. 머리로 구상해낸 것인 만큼 그 결과 역시 일정하게 추상적이고 양식적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길, 인간의 문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더 감각적이다. 외관상 파편화된 신체 그대로를 툭 던져놓은 것 같은 일련의 조각들이 감각적 현실과 닮았다. 그러면서도 실제보다 부풀려진 크기며 군더더기가 없는 매스가 인상적이다. 영원한 시간을 돌 속에 가두려 했던 고대 이집트 조각의 염원을 닮았고 고대 그리스 조각의 기념비성을 닮았다. (그러면서도) 극적인 순간의 포착과 같은 드라마를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동양적인 명상의 계기를 강화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탈 포이에시스 혹은 포이에시스 이후. 편의상 포이에시스는 만드는 조각을, 그리고 탈 포이에시스는 만들지 않는 조각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직조 대 개념미술과의 대비 구도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만들지 않는 조각이란 탈형식과 개념미술, 탈조각과 비물질조각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유기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하튼 작가의 작업을 만드는 조각과 만들지 않는 조각으로 크게 구분해 볼 수가 있고, 이 중 만들지 않는 조각 쪽에 무게중심이 실리고 작가의 개성 또한 더 잘 드러나 보인다는 생각이다. 떠나는 자만이 꿈 꿀 수 있다는 작가의 말로서 서두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중간이 있기 마련이다. 작가 역시 그런데, 소위 만드는 조각과 만들지 않는 조각과의 사이에 해당하는 작업이 <주름질>과 <바람질> 시리즈이다. 직조에서 개념미술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주름도 바람도 자연이 만들어준 현상이다. 자연현상이 주제며 소재인 셈인데, 자연과 주체가 만나지는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모노파와의 일정한 영향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자연이 만들어준 현상이며 자연에 개입해 들어간 주체의 흔적 자체를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현상 그대로를 조형으로 옮겨 고정시킨다는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질 들뢰즈 역시 주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모든 사유며 현상이며 존재에는 이면(본질이 아닌, 접혀진 표면)이 있고, 그 이면이 주름이고 고원이다. 그래서 보면서 다 보지는 못하고 들으면서 다 듣지는 못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들뢰즈의 사유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주름을 향하고 고원을 향한다. 자연현상이며 물리적 현상이라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주름질이 이런 사유의 주름과 무관하다고만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조각은 탈조각에로의 본격적인 탈출을 감행하기 전에 자세를 가다듬는다. 잠시 숨고르기를 한다고나 할까. 여기서 다시, 떠나는 자만이 꿈 꿀 수 있다는 작가의 말로 되돌아가 보자. 떠나기 위해선 기왕을 정리해야 한다. 기왕을 정리하지 않고선 미련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 작가의 경우에 그렇게 정리해야 할 기왕의 대상이 마르셀 뒤샹이다. 작가는 마르셀 뒤샹의 목을 칼로 베었다. 흡사 골리앗의 목을 벤 다윗의 품세다. 흥미롭게도 프랑스의 신구상주의 회화 작가들 역시 합심해서 마르셀 뒤샹을 처단하는 시리즈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세리 레빈의 오마주도 간과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마르셀 뒤샹은 미술사와 관련한 형식의 역사며 양식의 역사, 스킬의 역사며 감각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그 자체로는 결코 닫힐 수 없는 태도의 미술사를 열었다. 태도를 누가 닫을 수 있단 말인가. 정해진 형식도 추구해야 할 형식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매번 그리고 매순간의 태도가 형식을 결정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제안된 것이 변기이다. 변기 자체는 중성적인 기호이고 가치중립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똑같은 기호를 일상과 정상성과 상식과 화장실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변기가 되고, 이상과 비정상성과 미술제도라는 맥락에서 보면 오브제가 된다. 변기를 변기로 읽는 것도 관습(일상이라는 관성)이고 변기를 오브제로 읽는 것도 관습(미술제도라는 관성)이다. 자, 그 기호를 변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오브제로 볼 것인가. 이 관습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저 관성을 취할 것인가. 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점의 문제이며 맥락의 문제이고 태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마르셀 뒤샹의 목을 칼로 벤 작가는 마르셀 뒤샹을 처단한 것인가. 파라오의 목을 뒤샹의 변기로 대체한 것으로서 미술사가 정리되고, 마르셀 뒤샹의 목을 벤 것으로서 현대미술은 정리가 된 것인가. 심지어는 반가사유상의 얼굴을 변기로 대신한 것을 보면 그 결단이며 정리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만큼 뒤샹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처단이며 정리로서보다는 차라리 오마주의 또 다른 한 경우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하튼 작가는 마르셀 뒤샹을 짚고서야 본격적인 탈조각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 작가의 작업에는 비닐봉지에 담긴 물이며 억새풀 그리고 촛불과 밀랍 같은 소재들이 등장한다. 비록 이 소재들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마르셀 뒤샹으로 대변되는 현대미술에 대한 반성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세부적으로 비닐봉지에 담긴 물은 조각이면서 조각이 아니다. 여전히 형태를 가지고 있고 양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조각이지만, 그 형태며 양감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실체, 미처 실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실체라는 점에서 조각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작가는 형태를 만드는 대신 형태가 만들어지게 한다. 형태를 만드는 것과 형태가 만들어지게 하는 것은 다르다. 전통적인 조각이 그렇듯 형태에 대한 작가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작가는 매개적인 역할로 물러나고, 따라서 형태와 작가의 쌍방적인 관계로 무게중심이 옮아간 것이다. 

그리고 물 역시 그렇지만 억새풀도 촛불과 밀랍도 하나같이 일시적인 소재들이다. 더욱이 밀랍이 촛불을 만나면 그 일시성은 더 뚜렷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은 증발되고, 억새풀은 썩어 내려앉고, 밀랍은 촛불과 함께 휘발돼 사라진다. 이처럼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소재며 형태들이 전통적인 조각의 내구성과 항구성에 배리된다. 조각 속에 영원한 시간을 각인하려 했던 예술가들의 욕망과 배치된다. 그 자체가 어떤 존재론적 울림을 발하고 삶에 대한 메타포를 떠올리게 한다. 삶은 짧고 예술은 길다. 예술가는 죽어도 예술은 영원하다. 천만의 말씀! 예술은 삶을 보상해주지 못한다. 예술이 위대한 것은 삶의 덧없음을 주지시키고 삶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현현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의 이 비물질조각은 위대하다. 

그리고 그 위대는 죽음을 향한다. 죽음의 문제는 동시에 삶의 문제이며 존재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했다. 억새풀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사람형상과 사람이 없는 빈 형상을 대비시킨 작업, 밀랍으로 떠낸 자신의 자소상에 촛불을 밝혀 휘발돼 사라지게 한 작업, 배처럼 속을 파낸 사람 형상에 9 개의 굵은 대못을 박아 원죄를 온몸으로 증언하게 한 작업 모두가 죽음을 향한다. 지극히 존재론적이고 자기 반성적이다. 그래서 이 작업들은 허망한가. 그렇지는 않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죽음을 매개로 하지 않고선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복원할 수가 없고 삶과 죽음이 하나로 통합된 전인적 인간을 회복할 수가 없다고 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 호명한 죽음은 결국 매순간 죽음에 맞닥트리며 매번 거듭나는 삶의 계기를 주지시킨다. 죽어야 산다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죽음이 곧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말의 의미 또한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삶 속에 죽음을 불러들이고, 죽음의 제의를 통해 삶의 태도를 상기시킨다. 

빛 조각. 물이 담긴 비닐봉지로 조각을 대신한 것이나, 억새풀로 사람형상을 엮어 만든 것, 그리고 촛불을 통해 밀랍 형상이 녹아내려 휘발되게 한 것은 모두가 일시적이고 가변적이고 덧없는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이며 한계상황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 것들이다. 그리고 자기부정을 통해 거듭나는 삶을 증명하기 위해서 호출된 것들이다. 

그것들이 호출되는 방식은 정통적인 조각으로서보다는 공간설치작업에 가깝다. 장소특정성과 함께 공간설치작업으로 작업의 외연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는 것인데, 근작에서 그 가능성이 진정으로 실현되고 꽃피운다. 조명을 끌어들여 작업의 외연을 공간으로까지 확장하는 것인데, 흔히 그렇듯 정적인 세팅이나 광원과 광도를 조율하는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 조명 자체를 조형의 적극적인 한 요소로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조명을 도입한 일반적인 경우와는 구별된다. 가히 빛 조각이라고 할 만큼 빛이 조형을 견인하고, 나아가 작업의 정체성마저 결정하는 핵심적인 의미기능을 도맡고 있는 것이다. 

부연하면 근작에서 작가는 반투명의 하얀 플라스틱 수저에 필이 꽂힌다. 일회용 수저는 한번 뿐인 삶의 존재를 닮았다는 것이 작가로 하여금 수저를 소재로서 선택하게 한 동기가 된다. 시종 존재론적 자의식이며 문제의식에 천착해온 작가다운 발상이지 싶다. 여하튼 여기서 수저의 반투명한 성질은 결정적인데, 그것이 빛을 투과해 일종의 빛 형상을 만들게 해주는 원인이며 계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일회용 수저 수천수만 개(실제로는 약 십만 개의 일회용 수저가 동원되었다)를 연이어 조립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형상을 만든다. 이를테면 크고 작은 공들이며, 정자세로 직립해 있거나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형상, 그리고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해 원 모양을 만든(법륜 곧 윤회와 깨달음을 상징하는) 부처의 수인 등이다. 사람형상은 완전한 존재며 우주를 상징하는 원 형상을 딛고 서 있거나 해탈을 상징하는 연꽃(진흙 속에서 핀 꽃)을 디디고 서 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로는 지금 막 꽃이 만개하고 있는 중이다. 

부처의 수인도 그렇거니와 연꽃과 같은 소재의 도입이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공감 내지 영향관계를 읽게 한다. 그리고 수천수만 개의 수저가 중첩된 형상은 마치 억겁의 세월을 돌고 돌아 인연이 비롯되는 연기설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그 자체를 난자를 향해 맹렬하게 유영해가는 정자로, 존재의 원초적 생명력의 표출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생명원리나 특히 불교의 도상성(특정 종교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정서로 배어든 일종의 원형의식에 가까운)은 조형에 조명이 도입되면서 극대화된다. 온갖 알록달록한 조명으로 불 밝히고 있는 형상들이 형형색색의 연등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현란한 조명을 덧입은 형상들이 작가가 근작에 부친 주제 <호모사피엔스의 찬란한 진화>처럼 찬란하다.
 
작가는 조명효과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LED와 광섬유를 도입해 첨단의 빛의 질감을 연출하는 한편으로 여기에 관객의 접근과 소리에 반응하는 상호작용성을 도입해 빛에 움직임을 더한다. 실제로 이런 빛의 질감이며 운동성을 덧입은 사람형상이 테크놀로지 인간 내지 디지털 인간과 같은 진화된 인간상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그림자처럼 불교의 전언이 복선으로 깔린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은 색이 아니고 공은 공이 아니다. 색을 색이라 하고 공을 공이라 하는 것 모두가 다만 마음이 불러일으킨 마음현상(착각?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작가의 근작은 외관상 현생인류의 찬란한 진화를 찬미하고 축복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진정한 진화가 어떠해야 하는지 되묻게 한다. 찬란한 표면과 존재론적 이면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돼 있는 것이며(좀 더 쉽게 이야기를 풀자면 빛과 어둠이 대비되는), 그 이중성 내지 양가성이 삶을 통해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매개로 삶을 증언한 전작과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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