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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아 / 이종과 변종과 혼성잡종이 열어 보이는 신종 우화

고충환

이은아는 동물을 그린다. 그림에서 동물들은 주로 얼굴이나 머리 부위를 클로즈업해 그린(얼굴이 표정을 밀어 올려 개별성을 강조한다면, 머리는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사물 형상에 가깝다), 일종의 동물 초상화로 범주화하고 유형화할 수 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 그림들이 배경화면 없이 그려졌다면, 일부 그림에서 동물들은 숲이나 건축물과 같은 인공구조물의 배경화면 속에 담긴다. 자연도감을 연상시키는,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재현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그림들이다. 여기가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까지고 여기부터다. 그저 선입견을 재확인시켜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얼핏 친숙한(캐니) 동물들처럼 보이는데, 보면 볼수록 낯설고 생경하고 이질적이다(언캐니).


이를테면 하마의 머리와 산양의 뿔과 토끼의 귀가 하나로 결합된 동물(Plant antlers)이 있는가 하면, 코뿔소의 머리와 코끼리의 코가 하나로 결합된(Rhinophant) 동물도 있고, 하마의 입과 코끼리의 코가 하나로 결합된(Hippophant) 동물도 보인다. 코뿔소와 호랑이의 머리에 코끼리의 귀가 하나로 결합된(Tirhinophant) 동물이 있는가 하면, 백곰과 모르모토가 합체된 동물(Situate 시리즈)도 있다. 샴쌍둥이처럼 두 개의 머리가 하나로 결합된 양(Double Sheep)이나 세 개의 머리가 하나로 결합된 양(Triple Sheep)도 보인다. 이 동물들은 여전히 동물일까. 정색을 하고 동물이라고 명명해야 할까. 여기에 작가는 버젓이 학명까지 새로이 지어내 붙였다.


이 낯설고 생경하고 이질적인 동물들이 그들이 속해져 있는 배경화면이며 환경마저 낯설고 생경하고 이질적으로 만든다. 무슨 말이냐면 그저 평범한 숲이나 정원인줄로만 알았는데, 이 동물들의 느닷없는(?) 출현으로 숲과 정원은 졸지에 앙리 루소 풍의 초현실적인 그림이 되고 만다(Jungle Mix, Unfamiliar Jungle). 그리고 동물들이 기웃거리거나 서성이는 구조물마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Situate 시리즈). 사람이 사는 공간 같기도 하고, 동물이 사는 공간 같기도 한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출처불명의 공간 내지 다른 차원의 공간과 공간이 하나로 포개진 겹 공간처럼 보이고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 공간처럼 보인다(개인적으로 동물보다는 동물원이 흥미롭다. 인간의 논리로 지어진 동물의 주거공간이란 점에서 그렇고, 인간의 논리와 동물의 생리가 부닥치면서 의미심장한 차이를 반영하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은아, Jungle Mix, 캔버스에 오일, 2012


여기에 세계관의 문제가 개입된다. 이를테면 모더니즘적 인간과 후기모더니즘적 인간의 차이를 반영하고 드러낸다. 무슨 말이냐면 모더니즘적 인간은 세계와 주체와의 상호 유기적이고 호의적인 관계를 토대로 서로 온전한 총체적 세계 대 세계로서 마주한다. 이에 반해 후기모더니즘적 인간은 세계와 주체와의 관계를 위기로 인식하는 만큼 이렇듯 불안정한 인식구조를 바탕으로 서로 파편화된 세계 대 세계로서 마주선다. 세계도 파편화돼 있고 주체도 파편화돼 있다. 그런 만큼 주체는 여하한 경우에도 세계 자체를 온전하고 오롯한 전체며 총체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세계는 그저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패치들의 우연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만큼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신뢰에도 금이 간다. 부분은 부분일 뿐 결코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예속되지가 않는다. 부분과 부분을 집합한다고 해서 오롯한 전체가 복원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세계가 온전하고 오롯한 전체로서 인식된다고 보는 것은 단순하거나 순진하거나 맹목적인 믿음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가 어렵다. 인식이란 일정정도 형이상학이나 패러다임이나 이데올로기처럼 일종의 발명품이란 점을 인정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상호 이질적이거나 무관계한 동물들의 부분과 부분이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짜깁기된 배경이 설명된다고 보고, 이종과 변종과 혼성잡종이 해명된다고 본다.



이은아, Plant antlers, 캔버스에 오일, 2012


이종과 변종과 혼성잡종이라고 했다.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알만한 동물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알만한 동물을 배반하면서, 알만한 동물이라는 인식을 배반하면서 다른 동물로의 이행 중에 있는 어떤 과정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그림에서 항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친숙한 이미지로부터 낯선 이미지로의 이행이 있고, 자기동일성의 논리로부터 비동일성의 논리로의 이행이 있을 뿐. 다만 잠정적으로 멈춰선 것처럼 보일 뿐인, 인과도 없고 규칙도 없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미지 유희가 있을 뿐. 항상성이 있다면 이처럼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항상성을 배반하는 항상성이 있을 뿐. 여기서 콜라주와 몽타주가 유래한다. 바로 파편화된 세계며 이미지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편집이다. 이처럼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편집은 디지털과 포토샵이 마련해준 미디어환경으로 탄력을 받고 있다. 이런 연유로 현대미술에서 형식적인 콜라주와 몽타주가 일반화된 원인이 설명된다고 보고, 최소한 콜라주 되고 몽타주 된 의식과 인식이 보편화된 이유가 해명된다고 본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며 변화된 환경을 반영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더해 이종과 변종과 혼성잡종은 꽤나 의미심장한 사회학적 의미마저 내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종과 변종과 혼성잡종은 일종의 과잉과 잉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모든 과잉과 잉여는 결정적인 것을 배반하고, 항상적인 것을 배반하고,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배반한다. 하나같이 제도의 준칙을 위반하는 것들이며, 제도에 타자를 대질시키는 것들이며, 상징계로 구조화된 제도에 실재계를 밀어 넣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제도를 위반하는 상징투쟁의 계기일 수 있다는 말이다(비록 식상해진 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여하튼).


작가는 이런 이종과 변종과 혼성잡종을 낯섦 탓에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낯섦이 그림의 원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낯선 경험에 맞닥트리기 마련이다. 작가는 이런 낯선 경험을 동물에 빗대어 그리고 싶었다(근작의 주제이기도 한 낯섦의 대상은 그러므로 향후 다른 소재로 전이되고 확장되고 심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징계의 틈새로 고개를 내민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을 그리고 싶었고, 일상을 이상에 빠트리는 불안과 불안정을 그리고 싶었고, 정상을 의심케 하는 비정상의 위반과 도발을 그리고 싶었다. 

그 욕망이며 원인은 얼핏 친숙한 것처럼 보이는데(캐니), 사실은 보면 볼수록 낯설고 생경하고 이질적인(언캐니) 동물 그림에서 찾아질 수가 있을 것이다. 바로 캐니와 언캐니다. 알다시피 언캐니는 프로이트가 두려움의 원인으로서 지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 개념이다. 두려움과 불안과 불안정과 언캐니와 낯섦(그리고 친숙함도)이 하나의 계열로 묶이는 것. 여기서 캐니와 언캐니는 상호적인 개념이다. 즉 캐니 속에 언캐니가 잠재돼 있다. 친숙한 것이 불현듯 낯설게 다가올 때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언캐니는 캐니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낯선 것은 알고 보니 친근한 것이었음이 판명되고 드러난다. 그렇게 작가는 캐니 속에 잠재된, 캐니로부터 유래한 언캐니를 그린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불현듯 친근한 일상이 이상하게 보이고, 다르게 보이고, 낯설어 보이고, 예사스럽지 않게 보인다. 한편으로는 불안한 일이고(불안정한 일상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론 재밌는 일이다(밑도 끝도 없는 이미지 유희에 빠트린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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