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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 물수제비의 추억을 그릇에 담다

고충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연어가 최초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듯, 소가 자기가 삼킨 것을 재차 게워내듯 인간의 의식은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자기가 유래한 곳으로 흐른다. 자기가 유래한 곳이며 자기의 의식이 잉태된 곳, 그곳은 다름 아닌 유년이며 자궁이며 원형이며 자연이다. 그러므로 연어의 회귀나 소의 되새김질 그리고 인간의 의식은 모두 일종의 원형의식에 의해 견인되고 원형의식으로 귀결된다. 현재를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때론 과거를 사는 것이 더 중요하고 결정적이고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저 자기반성의 계기와 같은 단순한 계몽적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실제로 과거가 현재보다 풍부한 또 다른 현실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자기 아이들이 태어나는 족족 아이들을 집어삼키는 것이나 사진의 본질을 죽음이라고 본 롤랑 바르트의 입장이 모두 이런 과거가 담지하고 있는 또 다른 현실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재는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현재는 현재와 거의 동시에 과거 속으로 편입된다. 사진은 결코 현재를 붙잡을 수가 없다. 사진이 현재를 붙잡는 순간 현재는 과거 속으로 미끄러지고 존재는 부재 속으로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다기보다는 저장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진은 존재의 흔적이며 한때 존재했었음의 증언이고 증명이다. 바로 시간이, 과거가, 사진이 아우라를 잉태하고 품고 게워내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시간의 지층과도 같은 흔적, 존재를 증명하는 부재, 의식의 데이터베이스 아님 현상학의 지향호 아님 존재의 원형 아님 의식의 자궁과도 같은 무의식, 실재와 실재를 각색하는 욕망이 무분별하게 공존하는 기억과 추억과 회상의 한 가운데로부터 아우라가 샘솟는다. 바로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가 흐르는 원천이며, 자크 라캉의 주이상스가, 고통마저 달콤한 쾌락이 흘러넘치는 원천이다.


마들렌 과자를 베어 물때 나는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며 입속에 감도는 과자의 향이 화자를 과거로, 유년으로 데려다준다. 그 의식의 여행을 프루스트효과라고 한다. 이상민의 경우에 물수제비가 프루스트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지금도 물수제비를 보면 어린 시절 강변에서 물수제비 놀이를 하며 놀던 때가 생각난다. 물수제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님 아예 물 자체, 이를테면 강변이나 바다와 마주하는 것만으로 작가의 의식은 저절로 유년시절로 되돌려진다. 물수제비, 물과 돌, 물과 돌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파장이며 파동이 존재의 자궁이며 원형으로 각인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물에 돌을 던지면 미세한 파동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다가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다기보다는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감각너머로 계속 퍼져나가고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어딘가에 부닥쳐 또 다른 파장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유년시절에 내가 만든 파장은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계속 연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감각은 나비효과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멀게도 넓게도 깊게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게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관념이 대신 가서 미친다. 바로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여운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시감이다.


다시, 물에 돌을 던지면 파동이 인다. 그렇게 파장을 그리면서 퍼져나간다. 그 꼴이며 행태가 꼭 잠자던 의식 아님 무의식을 일깨우는 것 같다. 실제로도 의식을 곧잘 물에다 비유하질 않는가. 내 의식을 일깨우는 것, 내 의식을 동하게 하는 것, 왠지 마음 설레게 하고 가슴 뛰게 하는 것, 현실에서 도피해 내가 숨어드는 곳, 작가에게 물수제비는 바로 그런 것이며 곳이다. 흐르지 않는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문득 멈춰선 시간 속에 잠시잠깐 머물다 가게 하는, 아님 아예 그 시간 속에 마냥 살고 싶은, 고여 있으면서 흐르는 시간을 사는 일이고 의식을 사는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물수제비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더욱이 그림이 아닌 질료적인 형태며 실감나는 형태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 자연현상 중엔 형상으로 옮기기가 까다로운 것들이 많다. 바람이 그렇고, 공기가 그렇고, 물이 그렇고, 빛이 그렇다. 이 까다로운 것들이 어우러지고 상호작용하는 경우라면 그 형상화의 과정이며 방법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물수제비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정지된 듯 흐르는 수면에 돌을 던지면 미세한 파동을 그리면서 물이 퍼져나간다. 그렇게 퍼져나가면서 만들어진 굴곡 위로 빛의 파장 아님 빛 알갱이가 부닥치면서 서로 희롱한다. 집요한 관찰과 섬세한 감각이 없으면 이처럼 정체된 듯 흐르는 수면과 수면에 이는 미세한 파동 그리고 빛과 물의 희롱을 형상 속으로 붙잡아 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상민. Cloud bowls. Plate Glass Engraved 96x96x6cm 2012


유리조형에 여러 경우가 있지만, 작가는 유리판을 매개로 작업한다. 작가에게 유리판은 마치 결정화된 물과도 같다. 유리판의 평면이 정체된 듯 흐르는 수면과 통하고, 이면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성이나 빛을 투과하는 투과성 그리고 외부환경을 반영하는 반영성이 그대로 물의 성질을 닮았다(반영성은 유리에 거울을 입힌 작업으로 한층 강화되기도 한다). 물의 단면을 그대로 가두리로 가둬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재료와 소재의 궁합이 이처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기도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저 우연한 일로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평소 작가의 집요한 의식과 섬세한 감각이 미친 결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재료 자체가 대상의 성질을 이미 상당할 정도로 포함하고 있는 경우, 그래서 재료 자체가 대상으로 와 닿는 경우(이 경우는 그대로 일본의 물파와 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와 닿는 경우를 오롯이 하기 위해 가급적 인위적인 손길을 최소화하는 일종의 미니멀리즘에 기울어진 작가의 감각이며 감수성의 레이더가 찾아낸 성과로 보아야할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수면인 유리판에 물수제비를 조형하고, 수면에 일렁이며 퍼져나가는 파장이며 파동을 조형하고, 빛과 물의 상호작용을 조형한다. 그라인더를 이용해 유리판의 뒷면에 형태를 음각하는 것인데, 정작 정면에서 보면 음각은 유리의 투명한 성질 탓에 양각처럼 보인다. 형태며 덩어리가 유리판 속에 갇혀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 형태며 덩어리는 그라인더로 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반투명한 작업에서 두드러져 보이고, 간 흔적을 없앤 투명한 작업에서 상대적으로 애매해 보인다. 반투명한 작업에서 덩어리가 강조된다면, 투명한 작업은 더 오묘한 느낌을 준다. 실제 수면과의 닮은꼴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말할 것도 없이 물방울은 물의 일부이며, 물방울과 물은 구분되지가 않는다. 작가의 투명한 유리조형작업은 그렇게 물방울과 물의 경계를 허물고, 재료(유리)와 소재(물)의 경계를 허문다. 형태의 가장자리를 따라 산란하는 빛의 파장이나 형태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형태와 어우러지면서 이런 물의 실감이나 경계 허물기는 눈에 띠게 강조된다. 경계 허물기라고 했다. 작가의 유리조형작업에선 물방울과 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형태와 그림자와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다시, 물과 빛이 희롱하고, 형태와 그림자가 희롱한다. 형태와 그림자가 실감을 두고 다툰다. 무엇이 형태이고 무엇이 그림자인가.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구인가. 무엇이 실상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가. 정적인 듯 고여 있는데, 사실은 볼 때마다 틀리고, 비켜설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형태는 있는 것인가, 아님 없는 것인가. 손을 뻗치면 잡을 것 같고 잡힐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무엇이 잡히는가. 물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물이 잡히는가. 물을 거머쥘 수가 있는가. 물을 거머쥘 수가 없다면, 그럼에도 실재하는 물은 무엇인가. 작가의 유리조형작업은 경계 허물기의 고전적 미덕인 장자몽과 물아일체의 경지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작가는 그릇을 조형한다. 발품을 팔아 박물관에서 발췌한 유적들이다. 유적을 조형한다는 것,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시간을 조형한다는 것이고, 흔적을 조형한다는 것이고, 부재를 조형한다는 것이다. 없는 듯 있는 그 유적들을 타임머신 삼아 작가는 다시금 유년으로, 존재의 자궁으로, 원형적 시간으로 자신을 되돌린다. 그릇은 무언가를 담는 용기이다. 그 그릇에 작가는 자신의 유년을 담고 싶고, 물수제비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다. 그런데, 그 추억은 없는 듯 있는 그릇처럼, 희미하면서 또렷한(결정화된 형태로 각인된) 그릇처럼 이중적이다. 간절함이 추억을 또렷하게도 하고 희미하게도 한다. 절실함이 추억을 부각하기도 하지만, 때론 손에 쥘 수 없는 물처럼 망각 속으로 밀어 넣어 망실되게도 한다. 그리고 다시, 유적은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더 이상 그릇이 아니고 용기가 아니다. 박물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박물관에 유치되는 것도 알고 보면 이렇듯 용도 변경과 정체성 변질에 따른 것이다.


쥘 수 없는 물을 형상화한다는 것, 담을 수 없는 유적을 조형한다는 것, 물수제비의 추억을 화석으로 만들어 간직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바니타스의 현대판 버전일지도 모르고 작가식의 비전일지도 모른다. 현재는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과거는 정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 부재하는 시간 위로 고통마저 달콤한 주이상스가 흐른다. 여하튼 과거는 고통마저 달콤한 법이다. 물수제비의 추억을, 달콤 쌉사름한 회상을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작가는 그렇게 없는 듯 있는, 그림자와 실감을 놓고 다투는, 어쩌면 아예 없을지도 모를, 그 자체가 공과 허와 무의 표상일지도 모를 빈 그릇 앞에 서게 만든다. 작가의 오묘한 조형이 아니었다면 마주할 일이 없었을 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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