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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희 / 상큼 발랄한 양머리 소녀의 미소

고충환

미술사에는 신비한 미소 때문에 유명해진 그림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미소가 그것이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기법이란 뜻의 스퓨마토 기법을 적용해 그린 그림으로서, 얼핏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것 같기도 해 도무지 그 표정을 종잡을 수가 없다. 웃음 뒤에 가린 우울 아님 슬픔을 암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님 인간의 이중성이며 양면성을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보이는 기법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모델의 심리에마저 수수께끼를 숨겨놓고 싶어 했던 천재화가의 의중을 쉽게 알 수는 없는 일이니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김지희의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서두에 모나리자의 미소를 물고 들어온 것은 다소간 뜬금없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알쏭달쏭한 미소는 시공간의 차이를 훌쩍 뛰어넘어 김지희의 그림과 만나진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김지희의 그림에는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래서 시선을 온통 집중시키는 소녀의 얼굴이 등장한다. 화면의 나머지 부분은 이 얼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 내지 보조 장치 정도로 봐도 되겠다. 작가 고유의 캐릭터랄 수 있는 이 소녀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고 있다. 특히 미소는 투명하고 맑은 눈과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벌려진 입매에 집중된다. 만화영화에서 곧장 걸어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문구류에서 외출 나온 것 같기도 한 귀엽고 깜찍한, 상큼 발랄 큐티한, 그리고 트랜디한 얼굴과 표정이 마음을 풋풋하게 하고 달뜨게 만든다. 여기에 상큼 발랄 큐티 모드에 빠질 수 없는 양머리까지 풀코스로 갖춘 소녀는 실제로 작가의 그림에서도 그렇지만, 색깔로 치자면 노란색과 연두색 그리고 핑크빛과 딱 어울린다. 다른 비유로 치자면 무지갯빛을 머금은 비눗방울 같은 소녀(버블소녀?)다.    


그렇다면 작가는 다만 상큼 발랄 큐티한 소녀의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꿀꿀한 시대에 청량제 같은 웃음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게 다일까. 그만만 해도 의미는 이미 충분하다. 웃음에 인색한 시대에 웃음을 선사하는 그림은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한다. 모르긴 해도 사람들이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소녀의 미소가 말 그대로 미소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미소 뒤에 무슨 음험한 계략이나 어둠이라도, 아님 무슨 말 못할 속사정이라도 숨겨놓고 있다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소녀는 미소 뒤에 어둠 아님 깊은 슬픔을 숨겨놓고 있었다. 이로써 미소 짓는 얼굴은 다름 아닌 페르소나 곧 가면임이 드러나고, 사실은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연기하는 표정 연출이었음이 판명된다. 페르소나는 연기고 연출이다. 내대신 나를 연기하고 연출하는 제도적 주체며 사회적 주체다. 그리고 나는 그 주체 뒤에 숨는다. 웃음 뒤에 어둠을 숨긴다. 



김지희_Alone_72x60cm_장지에채색_2008

다시, 무슨 말인가. 소녀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님 보면 볼수록 미소 띤 얼굴이 경직돼 있는 것 같다. 웃음 짓는 얼굴 표정 그대로 스톱돼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앞으로도 영원히 웃음 짓도록 고정된 마네킹을 보는 것 같다. 투명하고 맑게만 보이던 눈망울에서 설핏 그렁그렁한 눈물이 비치는 것도 같고, 웃음 짓는 입 매무새가 속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도 같다.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작가가 그림 속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정황을 심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눈망울이 유독 투명하고 맑게 느껴졌던 이유가, 그리고 눈물을 머금은 듯 촉촉하게 느껴졌던 이유가 컬러렌즈를 착용한 탓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웃음의 트레이드마크인 입에는 치열교정기가 장착돼 있다. 치열 교정기는 이빨을 가지런하게도 하지만, 웃음표정을 훈육하고 바로 잡아주는 무슨 웃음 교정기 같기도 하다. 이쯤 되면 완전 사이보그 수준이 아닌가. 다만 그 종류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사이보그들이다. 눈에는 컬러렌즈를 착용하고 이빨에는 치열 교정기를 장착한, 눈매와 입매에 웃음을 머금은 웃음노동자들이고 사이보그들이고 마네킹들이다. 사이보그라도 괜찮아!! 어차피 역할극을 사는 삶이라면 누군가는 웃음을 연기하는 사람도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웃음을 연기하는? 바로 여기서 작가는 욕망의 문제를 건드린다. 웃음을 연기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지름길이다. 아니, 지름길이라기보다는 기본이다. 안 그래도 꿀꿀한데 누가 개인의 어둠 따위를 달가워할까(밀란 쿤데라는 현대를 비극을 상실한 시대라고 했는데, 어둠을 상실한 시대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웃는 눈매와 입매를 만들어줄 수만 있다면 컬러렌즈도 치열교정기도 마다할 일이 아니다. 다시, 소녀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소녀의 웃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웃음은 누구의 웃음이고 누구를 위한 웃음인가. 바로 타인을 위한 웃음이며 나에게 투사된 사회의 욕망을 향한 웃음이다. 나에게 너의 귀엽고 깜찍한 웃음을 보여줘! 나에게 너의 사랑을 증명해봐! 나의 행운의 여신이 되어줄래! 그러면 밤하늘의 별처럼 블링블링하는 보석을 따다가 안겨줄게! 그렇게 작가는 함박웃음 짓는(어쩌면 사실은 속으로 울고 있을지도 모를) 소녀의 미소를 매개로 물고 물리는 욕망의 관계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알다시피 욕망은 결여의 다른 이름이다. 욕망은 취해질 수 없는 것에 부쳐진 이름이다. 그래서 욕망은 어쩌면 권력의 도구일지도 모른다. 취해질 수 없는 것인데도 마치 취해질 수 있는 것인 양 착각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는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키기라도 하듯 어떤 한 그림에서 소녀의 미소 대신 해골을 그려놓았다. 욕망의 부질없음과 욕망 뒤에 어른거리는 죽음을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김지희_sealed smile-protect me from what i want


또 하나,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Protect me from what I want 라는, 영문자 텍스트가 그려진(쓰인?) 그림이다. 알다시피 이 텍스트는 페미니즘 작가이자 전광판 미술로 널리 알려진 제니 홀처의 대표 작품에도 나온다. 대략,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라(아님 지켜라)는 주문이다. 웃음으로 시작해 욕망으로까지 주제의식을 심화시킨 작가가 향후 작업에서 페미니즘으로 그 지평을 확장시킬 수도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더불어 영문자 텍스트를 전통적인 문자도의 형식에 담아낸 것에서는 문화충돌현상 내지 문화번역 개념 혹은 담론에 대한 이해가 엿보인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그림이 또 있다. 다른 그림에서처럼 치열 교정기를 장착한 입매로 웃고 있지만 무채색으로 그려진 점이 다르다. 아마도 초창기에 그려진 그림으로서, 다른 그림들의 원형 격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무채색으로 그려져 있어서 실제보다 더 어둡게 보이고, 우울해 보이고, 내면적으로 보인다. 치열 교정기가 만들어준 입매 탓에 웃고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 웃음은 어둠 속에 묻혀 사실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님 어둑한 화면 탓에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나는 나를 대리 수행하는 페르소나 뒤에 숨는다고 했다. 웃음 뒤에 어둠을 숨긴다고도 했다. 어쩌면 이 그림은 바로 그 웃음 뒤에 숨은 어둠을, 무의식을, 심연을, 슬픔을 증언하는 웃음의 실체일지도 모르고, 호시탐탐 현실을 부정하고 배반하고 위험에 빠트리는 실재계의 잠정적이고 공공연한 출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외관상 이처럼 어두웠던 그림이 어떤 연유로 지금의 상큼 발랄 큐티 버전으로 변신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마찬가지 말이지만 상큼 발랄 큐티 버전의 원형이 어떻게 이처럼 어두운 그림일 수 있었는지가 흥미롭다.  아마도 변신과 반전을 통해 주제의식을 심화시켜나가는 작가의 남다른 역량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베르그송은 웃음이 서먹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해소하는 사회적 장치라고 했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소녀의 해맑은(?) 웃음은 그렇게 서먹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해소해줄 수가 있을 것인가. 웃음을 웃음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웃음 뒤에 숨은 어둠을 헤아릴 일이다. 어둠을 애써 외면하는 웃음은 웃음이 아니다(가식?). 어둠을 껴안을 때에야 비로소 웃음은 서먹한 사람들 사이로 번져 나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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