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우종택 /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다

고충환

어릴 때 집에 가는 고갯길에 당집이 있었다. 담이 따로 없었고 길 폭이 별로 넓지 않은 터라, 그 길을 지나칠 때면 꼭 당집의 앞마당을 가로질러가는 느낌이었다. 다른 길이 따로 없어서 집에 가기 위해선 그 집을 지나쳐야만 했는데, 그렇게 지나가다 보면 곁눈질 할 것도 없이 그 집의 면면들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창호 문 안쪽으로 장군상이며 귀신화상이 모셔져 있었던 것 같고, 시멘트를 되는대로 덧발라 만든 부뚜막에는 밤이면 어김없이 켜놓는 촛불 탓에 촛농이 만든 탑과 함께 시커멓게 그을음이 내려앉아 있었다. 울긋불긋한 색동천으로 목을 질끈 동여맨, 사극에서나 볼 법한 창도 있었던 것 같다. 색동천으로 장식해놓은 것으로 치자면 창 말고도 또 있었는데, 바로 당집 앞에 서 있는 나무였다. 먼발치에서도 벌써 실루엣으로 알아볼 수 있었던 그 나무에는 가지만큼이나 많은 온갖 색동천들이 묶여져 있었고, 바람이라도 부는 밤이면 꼭 무슨 산발한 여자가 젖은 머리칼을 바람에 말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집의 정경은 코끝에 맴도는 향내와 함께 그렇게 유년의 기억으로 각인되었고, 귀신같은 나무가 그 기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린 마음에도 당집의 정경은 삶에서 유리된 별세계 같았고, 머리를 풀어헤친 듯 산발한 나무가 삶의 영역과 별세계의 영역을 가름하는, 범접할 수 없는, 살아있는 경계 같았고 관문 같았고 통로 같았다. 그렇게 당집을 지키고 섰던 나무는 죽음보다 먼저 귀신의 추억으로 유년의 무의식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죽음과 귀신이 삶보다 먼저 존재의 일부로서 자리를 잡았다(어린아이가 삶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 죽음과 귀신,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는 말하자면 일종의 원형적인 이미지며 트라우마로, 언캐니(프로이트)와 실재계(자크 라캉)의 잠재적인 경우로 봐도 될 것 같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연유한 이 경우는 어느 정도 우종택의 작업을 해명하고 해석하는 데에도 일정한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다만 그 정도와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존재론적인 경험이며 원형적인 이미지란 것이 대동소이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종택의 그림이 확 바뀌었다. 바뀌었다고는 했지만 뜬금없이 바뀐 것 같지는 않고, 그런 만큼 단절로서보다는 심화되고 확장된 경우로 보인다. 여하튼 변화가 두드러진 건 분명해 보인다. 변화는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측면에서 모두 발견되는데, 평면에서 공간설치작업으로의 이행이 형식적인 면에서의 변화라고 한다면, 의미상으론 외면에서 내면을 향한다. 목탄 드로잉과 분방한 먹칠에 바탕을 둔 평면회화가 원색적인 색채 대비가 두드러져 보이는 표현주의 경향을 거쳐 종래에는 입체조형과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이행한 것은 한국화의 표현영역이며 범주를 확장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외면에서 내면을 향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이행에 대해선 주제를 비교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바로 줄서기와 시원의 기억이 그것으로서, 형식상의 확장이 꾀해지고 있는 동안 정작 주제의식은 내면화의 경향성이 심화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먼저, 줄서기에 대해서 보자. 주지하다시피 줄서기는 경제논리와 경쟁사회의 부산물로서, 자본주의의 허구성을 갈파한 핵심적 화두며 아이콘이랄 만하다. 줄서기는 잉여인간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빗댄 상징적 풍경으로 보기 때문이다. 잉여인간 이전에 잉여자본이 먼저 있었다. 잉여자본은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불일치로부터 파생되고, 그렇게 파생된 잉여자본이 정작 상품의 생산주체가 아닌 자본가의 몫으로 돌려지고 축적되는 것에서 소외가 발생한다. 여기에 경제효율성의 법칙으로 내몰린 잉여인간에게서 소외는 가중되고 강화된다. 이 모두가 근본적으로 한정된 파이에 맞춰진 문제의식이란 점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라고 본 것이다. 파이를 잘게 쪼개면 상대적 소외감이 강화되고, 파이를 크게 나누면 절대적 소외감이 심화된다. 파이를 나누는 방법에 관한한 해법은 없다. 임의적이고 잠정적인 궁여지책이 있을 뿐. 그렇다면 소외를 없애는 일도 파이를 나누는 일도 요원한 일인가. 줄서지 않아도 되는 날은 기어코 오지 않을 것인가. 줄서기는 인간이 소외되는 풍경이고 인간성이 상실되는 풍경이다. 그래서 작가가 정색을 하고 그려놓고 있는 비루한 인간들은 정작 비루해 보이지가 않고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인다. 비루한 삶에 대한 공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고, 아득바득한 삶에 대한 연민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우종택_始原의 기억_memory of origin


그렇게 작가는 치열한 삶의 풍경을 그렸었다. 그리고 근작에서 이처럼 자기 외면을 향하던 삶의 시선을 거두어들여 자기 내면을 향하게 한다. 외면에서 내면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속에서 성으로, 형이하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저작거리에서 존재의 원형으로 이행하면서 후자를 정조준 한다. 한편으로 이렇듯 구분해 보았지만, 이처럼 구분되는 개념들은 사실은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고 봐야 한다. 이를테면 외면과 내면, 경험과 관념, 존재와 인식, 의식과 무의식, 감각적 실재와 관념적 실재는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한 몸의 다른 면들이다. 그렇게 상호 보충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개념들이다. 


이렇듯 양가적인 개념들에 힘입어서 제안되고 있는 것이 시원의 기억이다. 시원은 알다시피 퇴행적 개념이다. 존재의 원인을 향해 존재를 거꾸로 소급시키는 것인데, 그렇게 소급시키다보면 삶이 유래한 근원에 맞닥트리고, 삶보다 먼저 있었던 죽음에 맞닥트리고, 코스모스에 선행하는 카오스에 맞닥트리고, 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선 의미에 맞닥트리고, 언어 이전의 침묵에 맞닥트리고, 종래에는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한 불가지의 영역에, 바로 신화와 전설, 주술과 마법의 숲속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 숲에서의 화법이며 화술은 미처 의미화를 얻지 못한 탓에 상징적 형식을 빌려 암시하고 암시받을 수밖에 없다. 종교가, 죽음이 일련의 상징들을 거느리면서 도상학에 연동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비트겐슈타인은 종교적 대상이 분석의 대상이 아니므로 논리적인 언어로 말해질 수 없다고 했다. 아마도 그 경우는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해서도 그리고 예술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죽음의 세계를 그리고, 삶과 죽음이 가름되는 경계의 풍경을 그리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굿거리며 푸닥거리의 세계를 그린다. 경계의 풍경을 그리고 경계를 넘나드는 풍경을 그린다는 점에서 작가의 아이덴티티는 어쩌면 무당의 그것과 통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속적인 아이덴티티가 투사되고 조형된 것이 각종 나무 구조물들이다. 구조물을 보면, 작가는 죽은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거대한 밤송이를 연상시키는 방사형의 조형을 만들었다. 중심을 향해 수렴되는(구심적인) 것도 같고 자기 외부를 향해 확장되는(원심적인) 것도 같은 형상의 이 구조물은 존재의 양가성을 떠올리게 한다. 존재의 양가성? 바로 죽은 나뭇가지를 소재로 취한 것을 상기하자. 작가는 그 구조물 위에 온통 울긋불긋한 색채의 옷을 흩뿌리듯 덧입히는데,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아님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이 색채의 옷으로 인해 죽은 나뭇가지로 만든 구조물이 마치 잃었던 생기를 다시 얻는 것 같다. 색채를 흩뿌리는 행위는 말하자면 피를 흩뿌리는 행위이며 생기를 불어넣는 행위에 비유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죽은 나무가 재차 혹은 거듭 환생했다. 그 꼴이 당집을 지키던 신목을 보는 것 같고, 셰르파(셀파)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령스런 나무를 보는 것 같고,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세계수를 보는 것 같다. 그렇게 환생한 나무는 삶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을 가름하는 보이지 않는 관문을 공간에다 들여놓고 있었다. 


우종택_始原의 기억_memory of origin(부분)


여기에 다른 조형들을 보면, 작가는 역시 죽은 나뭇가지의 하얀 맨살에다 길한 의미의 문자를 써넣거나 기호를 새긴다. 하얗게 풍화된 상아나 짐승의 뼈에다가 문자나 기호를 써넣은 주술적이고 마법적인 성물들의 관행을 연상시키는 이 오브제들 역시 그 의미하는 바가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인다. 길한 기운을 불러들여 죽은 것들을 재생시키고 환생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항아리는 생명을 상징하는 태항아리를 연상시키고, 죽음을 상징하는 옹관묘(독무덤)를 연상시킨다. 다시, 삶과 죽음이 하나로 교차되는 존재의 양가성이 변주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런가하면 항아리에 가득 담긴 물은 생명(생명수 혹은 양수)을 상징하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인해 심연을 상징하고, 반영성으로 인해 자기를 반영하는 거울을 상징하고, 사발에 물 떠놓고 비는(흔히 엎어진 항아리 위에 얹힌) 기원을 상징한다. 여기에 죽음의 상징적 동반자로 치자면, 꼭두인형이 빠질 수가 없다. 흔히 상여에 부수되는 꼭두인형은 작가의 작업에선 죽음의 강이며 망각의 강을 건너는 망자의 형태로 등장한다. 신령스런 나무는 살아있는 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망자에게도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고, 망자를 꽃무늬 티셔츠에 버젓이 넥타이까지 갖춰 맨 현대인의 초상으로 그려낸 것이 흥미롭다. 그렇게 작가는 죽음의 기호 아님 사실은 삶의 기호를 부려놓고 있었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고독한 이유가 삶과 죽음의 불연속성 때문이라고 한다.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죽음은 금기시되고 터부시된다. 그렇게 죽음이 금기시되고 터부시되는 이유는 경제효율성의 법칙 탓인데, 경제적인 관점에서 죽음은 생산성을 떨어트리고 효율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건전하고 정상적인 삶의 영위를 위험에 빠트리는 잠정적이고 공공연한 잉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잉여는 바타이유에게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데, 질 들뢰즈의 욕망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가 그런 것처럼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며 자본주의로 첨예화된 세상을 바로 잡을 수도 있을 혁명의 계기가 된다. 여기서 잉여와 욕망 그리고 헤테로토피아는 하나같이 억압이 그 원인이란 점에서 서로 통한다. 


여하튼, 이처럼 화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삶과 죽음의 불연속성을 연속성으로 탈바꿈시켜 어떻게 원천적인 고독을 끝장낼 수가 있는가. 해답은 이미 주어져 있다. 잉여가 그것이고 죽음이 그것이다. 바로 잉여를 끌어안고 죽음을 싸안는 것, 죽음을 삶의 잉여가 아닌 삶의 생산적인 일부로서 인정하는 것, 삶의 한가운데에다 죽음을 들어앉히는 것, 삶을 가동하는 기계로서 잉여를 작동시키고 죽음을 작동시키는 것, 죽음을 통해서 삶을 가동시키는 것, 죽음을 통해서 삶을 살게 하는 것 속에 해법이 있다. 


우종택은 줄서기를 통해서 시원으로 건너왔다. 저작거리로부터 존재의 비의 쪽으로 건너왔다. 외면적인 삶의 현장을 치열하게 통과해온 그는 어쩌면 더 치열할지도 모를 죽음의 현장에 맞닥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어쩌면 삶의 변방으로 멀찌감치 밀려난 죽음과 화해의 손을 맞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시원의 의미를 곱씹을 일이다. 시원은 다름 아닌, 삶보다 죽음이 먼저 있었다는 의미이다. 죽음이 삶의 원인이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작가가 죽음을 테마로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