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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식 /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개

고충환

주후식,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개



주후식은 개를 만든다. 실물 크기 그대로 사실적으로 만든 개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저마다의 포즈와 표정을 지어보이는 다양한 견종들이 마치 개 박람회장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 첫인상은 귀엽고 깜찍하고 예쁘다. 이런 인상이며 반응 자체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반드시 자연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귀엽고 깜찍하고 예쁘다는 것은 인간의 일방적인 인상이며 반응일 수 있다. 개를 매개로 한 작가의 관심은 바로 이렇듯 인간의 일방적인 인상이며 반응에 있고, 그 일방적인 인상이며 반응이 혹 소외시키고 있을지도 모를 개의 입장을 주지시키는 데 있고, 그렇게 왜곡된 일방채널을 상호작용이 가능한 소통채널로 회복시키는 데 있다. 외관상 개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사실은 개를 통해서 인간을 이야기하고,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사회를 이야기하고, 존재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개로 대리되는 자연에 대해서, 자연과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에 대해서, 그래서 종래에는 인간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자연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어쩌면 휴머니즘은 인간의 입장만을 반영한 배타적인 논리일지도 모르고, 인간성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으려는 이기심과 욕망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개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그 외연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넘어 휴머니즘과 인간성 비판에까지 미친다. 휴머니즘과 인간성은 혹 인간중심주의의 허울일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고, 노자의 도덕경에서처럼 자연이 볼 때 인간은 그저 짚으로 만든 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사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철저하게 무관하고 무심하고 무정하다는) 자기반성에 미친다. 이처럼 개의 눈을 통해 사실은 인간의 삶의 행태를 조망한 것이란 점에서 마찬가지로 동물의 눈에 비친 인간세계를 풍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도 통한다. 개를 소재로 한 현대판 우화 정도로 보면 되겠다. 외관상 귀엽고 깜찍하고 예뻐 보이는 개들을 통해서 사실은 그 인상이며 반응, 그 입장이며 태도의 이면에 가려진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이유며 경로로 개를 만들게 되었을까. 필자도 기억하고 있는 한 TV 프로가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휴가철에 한 섬을 찾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키우던 개를 섬에 버려둔 채 떠나버렸으며, 이후 그 개는 줄곧 바다 쪽만을 목 빠지게 해바라기 하고 있다는 슬픈 내용이었다.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인간의 이중성(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양면성)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드러내는 데 정통한 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의 비극이 다름 아닌 비극을 상실한 것에 있다고 했다. 더 이상 비극이 없는 시대, 어떠한 비극도 허용되지도 들어설 여지도 없는 행복한(?) 시대에 현대인은 살고 있다(비극의 반대는 희극임을 상기하자. 말하자면 웃기지도 않는). 그렇다면 개를 버린 사람들은 개로 인해 혹 자신의 것이 될지도 모를 비극이 지레 참을 수가 없었을까. 도대체 자기가 만든 개(자기에게 철저하게 길든 개)를 버리면 개는 어쩌란 말인가. 자신의 반쪽이던 반려견에서 졸지에 유기견 신세로 전락한 개는 무엇이 되는가. 반려견도 유기견도 개가 아니다. 철저하게 인간이 만든 개고, 인간의 삶의 양식에 길들여진 개고, 인간이 부여해준 의미를 덮어쓰고 있는 개고, 인간의 의미로 개조된 개다. 자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앞서 자연이 보기에 인간은 무관하고 무심하고 무정하다고 했다. 이런 자연을 유관하고 유심하고 유정한 자연으로 개조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며 일이지 자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짚으로 만든 개보듯 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여하튼 이 일이 계기가 돼 개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작업장 주변에서 발견된 유기견을 데려다가 어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더불어 산지도 3년이 지났다. 그 세월동안 작업장은 작가가 만든 온갖 개들로 채워졌다. 그렇게 근작에서 각 애완견들, 인간과 교감하는 개, 그리고 어벙이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특히 인간과 교감하는 개는 눈높이를 맞추는데 주의를 기울였는데, 어린아이의 눈높이와 개의 눈높이를 맞춰 쉽게 교감하고 감정이입이 더 잘 일어나게 했다. 인간과 개와의 진정한 관계 회복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인 만큼 개들의 표정이 특히 눈 표정이 쉽게 공감을 자아낸다. 그렇게 귀엽고 예쁘고 깜찍한 개들이지만, 그 인상이며 입장이 다만 인간의 인상이며 입장을 반영한 것이듯 한눈에도 두드러지게 인간의 입장에 맞춘 개들도 보인다. 온몸의 털을 홀라당 벗기는 미용은 그렇다 쳐도, 무슨 군인처럼 털을 절도 있고 각 지게 다듬은 푸들은 좀 아니지 싶다.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유별난 취미야 개인적인 문제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취미를 개에게까지 적용한 것은 좀 아니지 싶다. 여기서 작가는 다만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사실을 극화한 것이 아닌, 실재 그대로를 옮긴 것이어서 작가의 문제의식은 더 크게 와 닿는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뮤탄트(Mutant)라는 주제로 함축된다. 대략 돌연변이 내지 변종을 의미한다. 어떤 목적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개를 의미한다. 그 경우는 좀 다르지만,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말을 빌리자면 혼합견이 되겠고 잡종견이 되겠다. 혼합견도 잡종견도 사실 그대로를 옮긴 객관적이고 중성적인 말이라기보다는 좀 무지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말을 혼합인 내지 잡종인이라고 옮겨 놓고 보면 무지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은 더 분명해진다. 여기서 작가는 순종이라는 이름의 변종이 생산되는 현실에 대해서 풍자하고, 순종과 변종을 가름하는 현실에 대해서 비판한다. 개에 순종이 있고 변종이 있는가. 나아가 도대체 순종이 가능한가. 알고 보면 우성인자끼리 접붙이기를 거듭하는 인공적이고 때론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원하는 개를 만들어 놓고 그렇게 만든 개에 붙인 이름이 아닌가.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고 작은 개(컵 개?)나 주인 밖에 모르는 충직한 개, 그리고 상대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용맹스럽고 무지막지한 개와 같은 이상적인(?) 개를 만들어 놓고 그렇게 만든 개를 순종이라는 부르는 것은 이미 모순이고 이율배반이고 자가당착이고 코미디가 아닌가. 알다시피 순종이란 다른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종자며 혈통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적용해보자면 순혈주의가 되겠다. 그리고 순혈주의는 인종청소를 위한 구실을 제공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참에 인간이 개를 호명하는 이름들을 보자. 애완견, 반려견, 유기견, 혼합견, 잡종견, 순종, 변종, 그리고 믹스견과 컵 개까지.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살아있는 생명체를 부르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영락없는 사물을 지칭하고 지시하는 말이 아닌가. 덧붙이자면 인간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분류한 인종학과 골상학은 식민 제국주의의 구실이며 유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인종담론과 오리엔탈리즘에 이르기까지. 여하튼 개는 사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개를 사물처럼 호명하는 것에는 인간의 언어용법에 서린 이기심과 욕망이 배어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문제는 미셀 푸코가 평생에 걸쳐 천착했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푸코에 의하면 지식이 권력이고 언어가 권력(아님 권력의 도구?)이다. 그리고 권력은 문화적 사실과 사물 현상을 정상성과 비정상성으로 나누고 구분하는 것에서 첨예화된다. 누가 누구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고 판단하고 정의하고 호명하는가. 누가 누구를 순종과 변종으로 나누고 판단하고 정의하고 호명하는가. 뮤탄트 곧 변종이라는 주제는 이처럼 그 이면에서 개와 인간의 관계가 사실은 권력관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작가는 전작에서 남근을 상징하는 기둥 형상과 우주란을 표상하는 원형의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었었다. 비록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기하학적 형태이지만(하나같이 그 표면에 기가 흐르는) 사실은 이를 통해 생명사상이며 생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전작에서 생명이며 생태에 대한 관심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형태로 나타났다면, 근작에서 그 관심은 개라고 하는 그리고 개에 이입된 인간이라고 하는 형상성과 구체적인 실체를 얻는다. 그렇게 구체적인 실체를 덧입고 나타난 개가 개를 다시 보게 만들고, 인간을 재고하게 만들고, 존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가. 개를 가지고 유난을 떤다고 말하지는 말자. 불현듯 술에 취하면 개처럼 바닥을 기면서 왈왈 짖곤 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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