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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희재 / 살아있는 것들의 비의를 숨겨놓고 있는 꽃

고충환

허희재, 살아있는 것들의 비의를 숨겨놓고 있는 꽃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로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저런 소재들이 있지만, 아마도 인체와 자연, 풍경과 정물이야말로 가장 많이 그린 소재들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꽃은 단연 주목되는데, 인체와 자연, 풍경과 정물의 맥락을 옮겨 다니면서 인체와 자연, 풍경과 정물을 돋보이게도 하고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하튼 이처럼 꽃이 가장 많이 그린 소재라고 한다면, 꽃 그림이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뭔가 의미심장한 의미의 표상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움 자체가 강박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여하튼 새롭지도 의미심장하지도 않다면, 그 꽃 그림은 잘해야 감각적 쾌감을 자극하거나 충족시켜주는 정도에 머물 것이다. 결국 관건은 관점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흔히 소재의 빈곤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소재 자체가 아닌 소재에 대한 의미부여의 문제일 것이다. 소재 자체는 닳지도 고갈되지도 않는다. 역시 의미부여가 문제인 것. 

김춘수는 내가 그에게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그에게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꽃은 어떻게 꽃이 되는가(세계는 어떻게 세계가 되는가). 여기서 그는 꽃 이전의 익명의 존재며 무명의 존재, 인식 밖의 존재며 무의미한 존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익명의 존재며 무명의 존재, 인식할 수 없는 존재며 무의미한 존재는 내가 부여해준 의미에 의해서 비로소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존재며 유의미한 존재로 거듭난다. 결국 의미부여란 존재를 거듭나지게 하는 인식론적 행위이며 장치일 수 있겠다. 그런 인식론적 장치며 행위가 없다면 의미도 세계도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론적 장치며 행위에 의해서 세계도 달라지고 존재도 구분된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의미부여한 꽃은 네가 의미부여한 꽃과 차이나진다. 

그렇다면 허희재는 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래서 한갓 익명의 존재며 무명의 존재가 어떤 의미 있는 존재로 거듭나지는지, 그래서 그가 그린 꽃 그림이 어떤 의미심장한 의미의 표상일 수 있는지를 살필 일이다. 


허희재_캔버스에 유화_2013

미적 거리 내지 심적 거리라는 말이 있다. 사물대상을 가장 잘 파악하게 해주는 거리다. 대상에서 너무 멀어지면 아득해지고, 너무 가까우면 흐릿해진다. 그저 시각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적 현상이며 미학적 개념으로 보면 되겠다. 흔히 추상이란 실재하는 사물대상을 그리지 않은 그림이며 순수한 형식논리에 천착한 그림을 말한다. 여기에 거리문제를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사물대상에서 너무 멀거나 가까우면 실재는 추상이 된다. 구상이다 추상이다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이처럼 실재와의 관계설정의 문제이며 거리설정의 문제인 것. 

그렇다면 허희재는 꽃이라는 실재와 어떤 관계며 거리를 설정하는가. 주지하다시피 그는 꽃을 그린다. 그런데 그 꽃들은 하나같이 클로즈업돼 있고 그것도 부분 클로즈업된 그림들이다. 사물대상과의 거리로 치자면 지나치게 가깝다. 모든 사물대상은 다른 사물대상과의 관계 속에 놓인다. 이를테면 꽃은 다른 꽃과, 아님 꽃밭이나 정원, 풀이나 바람과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인다. 그 상호유기적인 관계로부터 단절될 때 실재는 추상이 되고, 꽃은 꽃이면서 꽃이 아닌 그 무언가의 메타포가 된다.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사물대상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 사물대상에 밀착한다는 것은 사물대상에 대한 호기심의 표현이며 간절함의 표현이다. 그저 본다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넘어서 만지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시지각적 경험의 층위로부터 촉각시(보면서 만져지는, 만지는 것처럼 보는, 보는 것이 곧 만져지는 것을 의미하는, 그렇게 시각과 촉각이 합치되는)의 경험의 층위로 이행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렇게 사물대상에 근접하면 무엇이 보이는가. 사물대상에 근접하면 실재는 추상이 된다고 했다. 꽃은 꽃이면서 꽃이 아닌 무언가의 메타포가 된다고 했다. 사물대상에 근접하면 꽃이 보이고 내가 보인다. 꽃이 아닌 내가 보인다. 꽃에 의미부여한 내가 보인다. 꽃에 대한 근접은 간절함의 표현이었고, 꽃에 대한 간절함은 결국 나에 대한 간절함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꽃 그림은 자의식의 표상일 수 있었고, 존재 일반의 메타포일 수가 있었다. 


허희재_캔버스에 유화_2013-1


무슨 말인가. 꽃을 부분 클로즈업한다는 것은 꽃 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꽃 속을 들여다보면 꽃의 몸이 보이고 살이 보이고 암술이 보이고 수술이 보이고 성기가 보인다. 꽃은 식물이다. 그리고 몸과 살은 동물이다. 아니, 몸과 살이 동물의 전유물일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그 성질이며 성분은 식물보다는 동물에 가깝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비록 식물을 그리고 꽃을 그린 것이지만, 사실은 아님 보면 볼수록 동물을 그린 것 같고 몸과 살을 그린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식물도 살아있고 동물도 살아있다. 그러나 대개 동물의 생명은 실감하면서도, 정작 식물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식물의 속살을 열어서 보여주는, 식물의 몸과 살을 동물의 그것처럼 그려서 보여주는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식물의 생명을 강조하고 부각하는 기획이며 욕망의 표현으로 볼 수는 없을까. 작가의 그림이 친근하면서도 낯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근한 것은 알만한 꽃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왠지 낯선 것은 꽃의 몸과 살을, 식물성 속에 내재된 동물성을 그린 것에 연유한다. 

그리고 이처럼 동물성을 표상하는 몸과 살이 특히 성기를 닮았다. 동물의 성기가 몸의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듯 식물의 성기도 살의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다. 숨어 있다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의 표상이다. 부끄럽기 때문에 성기다. 신비롭기 때문에 성기다. 부끄럽지도 신비롭지도 않은 성기는 이미 성기가 아니다. 작가는 바로 그런 성기를 그리고 싶었다. 부끄러우면서 당당한 성기를 그리고 싶었다. 조지아 오키페가 그린 꽃 성기 그림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성기의 도상학을 통해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대리하게 한 기획이며, 옴파로스(세계의 배꼽이며 우주적 자궁)를 통해 세계의 중심을 선언하는 자의식의 표상이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꽃 그림은 핑크 프로이드의 음악을 소재로 한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더 월(The Wall)에 등장하는 인상 깊은 애니메이션과도 겹친다. 영상에서 암술과 수술은 서로 희롱하고 애무하고 공격하고 잡아먹고 잡아먹힌다. 애와 증의, 성애와 폭력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모호한 관계며, 나아가 아예 공모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작가는 꽃을 그리고 성기를 그린다. 그 성기는 당당하다. 당당한 성기는 말할 것도 없이 생명력을 표상한다. 이로써 살아 있는 것들의 존재증명을 그린다. 이처럼 작가의 꽃 그림은 그림 속에 꽃의 성기를 숨겨놓고 있었고, 생명의 비의를 탑재해놓고 있었다. 


허희재의 꽃 그림은 육감적이다. 꽃의 살이며 육질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감지되고 감촉되는 감각적인 그림이다. 주로 만개한 꽃잎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해 그린 그림의 소재는 비록 알만한 식물이지만, 그것을 화면에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일종의 이질감 내지 이물감 같은 생경함이 느껴진다. 친근한 소재를 낯설게 해 꽃의 또 다른 의미를 발굴하고 파생시키는가 하면, 꽃의 성기를 통해 생명력의 비의를 전수한다. 이로써 일종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정의할 만한 미학적 관점을 예시해준다. 동물과 식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허무는 작가의 꽃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에로티시즘? 교태? 치명적인 유혹? 건강한 생명력? 살아 있는 것들의 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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