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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창작스튜디오 1기 입주 작가

고충환

유중창작스튜디오 1기 입주 작가



보통 조각은 그 의미나 형태가 얼추 결정적이기 마련이다. 여기에 잠정적으로만 멈춰선 조각, 확장을 암시하는 조각, 비선형적이고 비결정적인 조각이 대비된다(김은영). 현대도시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저마다 다른 이해관계가 똑같은 도시에서 다른 도시를 보게 만든다. 그렇게 도시 위에는 다른 이해관계가 보아낸 다른 인상의 지층들이 하나로 포개지고 중첩된다(김지혜). 전통적인 조각보는 추상적인 문양이며 패턴 속에 우주를 담아냈다. 여기에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문양이며 패턴이 변형된 화면이 예시되고, 그 화면 속에 삶이며 존재의 메타포를 탑재한 박음질 작업이 대비된다(노신경). 저 홀로 도약하는 사람들은 고독하다. 도약을 계속할 수도 도약하기를 그만 둘 수도 없다. 아마도 저 스스로에게 도약하는 사람들은 고독한 사람들이고 부조리한 사람들이다(박상희). 이상과 현실은 괴리돼 있다. 그 골은 너무 깊고 넓어서 메울 수도 건널 수도 없다. 어쩌면 이상은 현실의 발명품일지도 모른다(이경하).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피사체 아님 영상의 한 장면은 진실을 말하는가. 이미지는 직설이 아닌 역설을 통해서 말하는가(최성훈). 여기에 이런 두서없는 질문들이 있다. 기꺼이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질문들이다. 


김은영, 조각을 확장하는 동사들. 기대다. 쏟아지다. 이어가다. 잠식하다. 미루다. 지우다. 김은영이 자신의 조각에 붙인 제목이다. 하나같이 동사들이다. 비록 조각 자체는 고정불변이지만 작가는 작동 중인 상태, 고정적이지도 불변적이지도 않은 상태, 어쩌면 탈조각적인 어떤 상태를 암시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동사는 작동이 멈춘, 그래서 그 형태나 의미가 결정적인 상태 대신 작동 중인 상태, 어쩌면 과정 자체며 프로세스 자체를 지시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조각은 고정불변이지만 사실은 고정불변이지 않다. 결정적이지만 사실은 결정적이지가 않다. 

작가는 못 다발을 바닥에다 던지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던진다. 그리고 우연하게 접해진 접점을 용접하는 방법으로 대개는 두 세 개의 못이 하나로 들러붙어있는 파편을 얻는다. 그리고 파편을 다시 바닥에 던져 용접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못이 모여 파편을 이루고 파편이 모여 거대한 덩어리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우연성이 적극적인 계기를 얻는다. 작가는 다만 형상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할 뿐, 우연한 계기가 형상을 생성시킨다. 그렇게 우연이 만들어준 형상이 비정형적이고 거친, 낯설고 생경한 느낌을 준다. 근작에서 못은 가녀린 은 선으로 대체된다.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나 하늘거리는 구조 그리고 레이스 장식을 떠올리게 하는 패턴이 상대적으로 더 부드럽고 유기적이고 섬세한 인상이다. 실체감이 희박한 만큼 오히려 더 시적이고 정서적으로 크게 와 닿는다. 


김지혜, 부유하고 흔들리고 흐르는 도시. 김지혜는 도시에 대한 인상을 형상화하면서 도시를 에디션에다가 비유한다. 알다시피 에디션은 판화와 사진과 조각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으로서 하나의 판이나 틀에서 유래한, 복수 재생산된 일련의 작품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하나의 틀에서 유래한, 그래서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작품들이다. 

아마도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지층들이 하나로 포개져 있는 도시의 다중성이며 복합성을 염두에 둔 비유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라면 다공성이라고 했을 것이다. 도시에는 다른 공간들이 공존하고 있고, 다른 시간대가 중첩돼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아가 잠재적인 비전(청사진)의 형태로 미래마저 하나의 지층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며, 가시적인 공간 위에 비가시적인 공간이 포개져 있는 것이며, 흘러가버린 시간 위로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이 흐르는 공간이며 장소가 도시다. 작가는 도시에 대한 인상이 이처럼 다중적이고 복합적이고 다공적인 이유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의 네트워크에서 찾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도시를 본다. 이해관계가 다른 만큼 같은 도시에서 다른 도시를 본다. 그렇게 도시의 인상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맞춰 분절되고 접합되고 중첩되고 해체되고 왜곡되고 확장된다. 이런 인문학적 배경을 매개로 작가는 마치 초점이 나간 사진처럼 부유하는 도시, 흔들리는 도시, 흐르는 도시의 생태학을 그린다. 


노신경, 얽히고 맺히고 풀리고 흐르는 시간. 한국화의 장르적 특수성은 아무래도 종이와 먹으로 나타난 재료에서 찾아질 수가 있을 것이다. 노신경의 작업에서 재료는 색색의 조각 천과 실을 이용한 박음질로 대체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재료를 다변화한 것이면서 한국화의 표현영역을 확장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재료와 방법은 같이 간다. 재료와 방법이 별개일 수가 없다. 재료와 방법이 달라진 만큼 그 표면질감이며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작가는 장지에 묽은 안료를 덧발라 투명하면서도 은근한 분위기의 바탕화면을 조성한다. 그리고 가녀린 색실을 이용해 흐르는 듯 유기적인 곡선을 박음질하는데, 분방한 드로잉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화면 곳곳에 색색의 조각 천을 박음질해 고정시키는데, 바탕화면의 색조와 색실을 이용한 드로잉 그리고 조각 천의 색면이 마치 한 몸이듯 어우러져 담담한 깊이감을 자아낸다. 시각적이면서 촉각적인, 시각과 촉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공감각으로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심화한다. 여기서 색면은 삶의 편린을 상징하고, 색면과 색면을 이어주는 실선은 삶의 연속성을 암시한다. 별개의 존재와 존재가 어렵사리 만나지는 인연의 계기를 상징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비록 드러나 보이는 형상은 추상이지만, 그러나 그 추상은 이처럼 삶을 상징하고 존재를 암시하는 상징추상이다. 추상으로 드러난 형상 속에 우주를 담아낸 전통적인 조각보와 같은 이치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실선처럼 흐르는 무구한 시간 속에 착종된 존재의 이치를 그려내고 있었다. 


박상희, 이상한 세계 속으로 도약하는 사람들. 다이버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고 높이뛰기선수가 장대의 탄력을 받아 하늘 높이 도약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는 공중에 붕 떠 있다. 하나같이 역동적인 동작들이다. 게임? 스포츠? 그런데 의외로 작가의 그림은 동적이지가 않다. 동적이기는커녕 정적이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적막감마저 감돈다. 역설이다. 동적인 동작 내지 상황을 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역설이 있고 작가가 숨겨놓은 의미가 있다. 

선수는 있는데, 정작 선수들을 응원하고 열광하는 관중이 없다. 철저한 적막 속에서 절대적인 고독과 더불어 선수들은 저 홀로 도약을 한다. 존재들 저마다는 삶이라는 미지의 영토에 던져진 선수들이다. 다른 선수들과 경쟁하지 않는 이상한 선수들이다. 다른 선수도 없고 관중도 없고 심판도 없는, 이상한 상황논리와 경쟁하는 선수들이다. 이상한 상황논리? 부조리다. 열광하는 사람도 없지만 간섭하는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도약을 멈추는 순간, 여지없이 추락하고 만다. 도약하기를 그만 둔 존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밑도 끝도 없는 추락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도약하기를 멈출 수도 없다. 그림 속 누군가는 공중에 붕 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열린 어떤 이상한 세계 속에 붕 떠 있는 이방인들이며, 삶에 관한한 이해되지도 적응되지도 않는 외계인들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그림에는 유독 화면을 비스듬하게 가르는 사선이 많고 예각구도가 많다. 그 사선이며 예각으로 구조화된 낯선 세계 속으로 몸을 날리고 있는 존재가 고독하고 불안하다. 


이경하, 현실과 이상의 틈새. 이경하는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유화를 덧그린다. 목탄그림이 배경화면처럼 보인다면, 그 위에 덧그린 유화그림이 모티브로 보인다. 배경화면이든 모티브든 세세하고 정치한 묘사가 돋보인다. 작가에게 목탄그림은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고 절대적인 이상세계를 상징한다. 이에 반해 유화로 그린 모티브 부분은 유한하고 덧없는 세계, 가시적이고 물질적이고 상대적인 현실세계에 해당한다. 플라스틱이나 페인트를 연상시키는 인공적인 색채가 무채색으로 나타난 목탄그림과 대비돼 보인다. 아마도 이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차이와 간극을 강조한 것일 터이다.

한편으로 그림에 나타난 구상적인 스타일이나 세부적인 묘사가 어떤 서사적 상황을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뱃전에 기대어 서서 바다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심연과 대면하고 있는 것 같고, 천막이나 텐트를 치는 것 같기도 하고 걷는 것 같기도 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애매한 상황논리가 양가적인 삶에 대한 상징 같고, 막다른 길이 존재의 비유 같고, 애써 그린 그림을 지우는 화가며 페인트공이 회화적 재현에 대한 반응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상징이며 암시가 이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차이와 갈등을 테마로 한 작가의 주제의식과 때로는 긴밀하게 그리고 더러는 느슨하게 맞물린다. 어쩌면 이상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허구)이며, 현실이 고안한 세계(이데올로기)이며, 현실이 만들어낸 세계(일탈)일지도 모른다.   


최성훈, 역설적인 이미지. 처음에 사진과 영상은 현실을 기록하고 진실을 증언하는 매체였다. 그리고 이후 점차 사진과 영상이 보편화되면서, 그리고 특히 디지털과 결합하면서부터는 거짓말 때문에 더 많이 호출되는 매체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사진이며, 새로운 사실을 조작하고 제안하는 영상의 이해관계가 허구를 창조하는 기술에 바탕을 둔 예술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다. 최성훈의 영상작업은 바로 이런 역설적 상황논리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그런데 그 장면은 알고 보면 야간폭격이 한창인 전시장면(아마도 이라크?)이다. 도심의 야경이 은하수처럼 아름답다. 그런데 사실 그 장면은 폭격 중인 공항장면(아마도 바그다드 공항?)이다. 멀리서 보면 불꽃놀이가 보이고 은하수가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폭격 중인 도시가 보이고 파괴된 공항이 눈에 들어온다. 상황논리에 따라서 하나의 장면은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인다. 그리고 칠흑 같은 화면 위에 밝은 점들이 빼곡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점들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화면을 좀 더 근접시켜보면 그렇게 움직이는 점들이 사실은 아파트 창문임이 드러난다. 줌인하면 아파트가 보이고 현실이 보인다. 줌아웃하면 하나의 모나드가 반복 재생산된 패턴이 보이고 모더니즘이 보인다. 거리의 문제이고 의식의 문제이다. 감각적 현실의 어떤 층위에 초점을 맞추고 의식을 세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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