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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령 / 지구, 꽃나무가 자라는 지상낙원

고충환

임미령 / 지구, 꽃나무가 자라는 지상낙원


태초에 신령스런 나무가 있었다.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나무며, 하늘과 땅을 중계하는 나무(무당)고, 하늘로 치솟은 형상이 우주의 남성원리(남근)를 상징하는 나무다. 세계의 중심은 또 있는데, 우주의 배꼽에 해당하는 옴파로스가 그것이다. 남성원리가 수직(다르게는 계통)을 지향한다면, 여성원리는 수평(다르게는 계열)으로 흐른다. 우주의 여성원리를 상징하는 옴파로스는 우주의 남성원리를 상징하는 세계수와 합치된다. 세계수는 옴파로스에 뿌리 내리고 있으며, 우주의 배꼽이 제공하는 생명력을 자양분 삼아 자란다. 우주적 배꼽의 수유가 세계수를 양육하는 것. 그러므로 세계수는 우선은 우주의 남성원리를 상징하지만, 이처럼 우주적 배꼽의 양육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우주의 남성원리와 여성원리가 합치된 양성구유며 자웅동체를 상징한다. 음과 양이 합치되고, 생과 멸이 무한순환 반복되는 우주의 운동성이며 항상성을 상징한다. 


The Earth-Gloryfy, 73x91cm, 2013


임미령은 이처럼 그림 속에 신령스런 나무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나무가 보통의 나무가 아니라, 다름 아닌 세계수임을 어떻게 알까. 작가는 그림 속에 지구를 상징하는 둥근 원 형상을 그려놓고, 대개는 그 원 형상의 정중앙 위쪽에 나무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는 마치 지구(지모)로부터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그 인상이 세계수로서의 토포스(위상학)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는 그렇다 치고, 원형상은 어떻게 지구를 표상하는가. 예로부터 원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며 완전한 형상을 의미했다. 시작과 끝이 따로 없고 처음과 마지막을 한 몸에 수렴하고 있어서 무한순환운동을 반복하는 존재의 생멸원리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닫힌 구조를, 그래서 자족적인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무한순환운동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자기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뱀이나 뫼비우스의 띠와도 그 상징적 의미가 통한다.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운동?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운동을 원심성이라고 한다면, 자기에게로 수렴되는 운동을 구심성이랄 수 있겠다. 여기서 원은 닫힌 구조며 그 자체 자족적인 구조로 인해 자기 속에 이런 원심성과 구심성으로 나타난 존재의 운동성의 계기를 하나로 합치해 들인다.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그리고 재차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운동성을 통합하는 원리이며, 그 통합원리에 비유되는 자기반성적 계기 내지는 경향성을 함축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처럼 원에는 가장 기본적이고 완전한 형상으로서의 의미가, 그 자체 닫혀 있어서 자족적인 구조가, 그리고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자기반성적인 계기가 탑재돼 있다. 


그래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의 인식 자체는 자연과학의 결과이며 성과이겠지만, 여기에는 이런 원 형상과 관련한 신화적 사실이며 상징적 의미도 일정부분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말하자면 자연과학적 사실과 신화적 사실(이를테면 자연관과 같은)이 합치된 경우로 봐야 한다. 이런 사실의 인식은 최근 과학의 성과가 점차 이런 신화적 사실을 인정하는 경향으로, 신화적 사실을 자신의 일부로서 수용하는 입장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에도 부합한다. 


작가는 이처럼 원 형상으로 나타난, 그래서 완전성을 표상하고 있는(사실은 완전성의 욕망으로 나타난 인문학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지구 속에 이러저런 삶의 풍경을 앉혀놓고 있다. 첩첩이 중첩된 산세가 펼쳐지는가 하면, 산으로부터 발원한 강이 무슨 젖줄처럼 흘러내려 바다로 모인다. 산과 산 사이에는 드문드문하거나 빼곡한 집들이, 성채들이며 현대도시들이, 다리며 교회가 펼쳐진다. 그런가하면 전통적인 민화의 그것을 상기시키는 기암괴석이, 양식화된 파문과 물고기들이, 휘어진 고송이 전경에 포치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비록 알만한 형상을 그린 것이지만 감각적 실재를 그린 것은 아니다. 관념적 실재를 그린 것이며 상징적 실재를 그린 것이다. 세계의 됨됨이에 대한 관념상을 그린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지구를 그린 것이면서 동시에, 아님 그보다는 마치 마술사의 수정 공 위로 파노라마처럼, 만화경처럼 흘러가는 삶의 정경을 그린 그림 같다. 실제로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왜곡돼 보이는 상이나 부분적으로 감지되는 투명성의 암시가 그렇다. 


작가의 그림은 비록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물대상을 그린 것이지만, 감각적 실재를 그린 그림은 아니라고 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아님 도서관에 앉은 채로 세계의 구석구석을 답파하듯 하나의 화면 속에 삶의 풍경들을 낱낱이 불러들여 재편집하고 재구성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처럼 재편집되고 재구성된 그림은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탑재하고 있는가. 아마도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세계의 끝에 가닿고 싶은 욕망이, 그러므로 결국에는 진정한 자기를 지향하는 존재론적 물음이 내장돼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구에는 세계상이 펼쳐져 있고, 그 위(사실상의 중심)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그 세계상을 마치 뿌리로 흙을 아물고 있듯 아우르거나 굽어보고 있다. 그리고 그 나무 밑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는데, 바로 작가의 얼터에고(자기분신)에 해당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의자에 앉은 채로 세계를 답파한다. 바로 공상을 통해서 세계의 끝을 자리에게로 불러들인다. 이따금씩은 말로 화해진 그리고 더러는 새로 분한 자기분신을 자기 대신 내보내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와 만나지고 싶은 욕망을 반영한 것이며, 특히 일종의 유토피아로 나타난 이상세계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세계는 작가의 그림에서 알만한 혹은 알 수 없는 온갖 만개한 꽃들 천지로 나타난다. 특히 지구의 머리맡에 포치해있는 아름드리나무는 감각적 현실로부터 건너온 것이 아니다. 어떤 나무라기보다는 그저 온갖 꽃들이 만개한 나무면 좋은 것이다. 온갖 과일들과 온갖 수종의 꽃들이 종을 무시하고 공존하고 있는 나무는 그래서 작가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고, 풍문으로나 떠도는 지상낙원의 비전을 그린 것이다. 실제로 어떤 그림에는 무성한 꽃나무 사이를 헤집고 일종의 관문과도 같은 통로(아마도 경계 혹은 거듭남의 계기를 상징할)가 설핏 그려져 있기도 해서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는 전통적인 민화에 대한 재해석도 일정한 의미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형식의 차용이나 재해석에 대해선 앞서 살핀 바와 같고,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민화에 반영된 관념이 예사롭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민화에 그려진 세계상은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설핏 감각적 실재를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관념적 실재를 그린 것이라는 점이다. 부귀영화와 무병장수와 같은 세속적인 욕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실상 지상천국에 대한 비전을 반영해 그린 것이다. 그 비전을 통해서, 그 비전이 열어 보이는 환상을 통해서 비루한 세상살이를 견디고 건널 수 있게 해준 그림이다. 결국 풍문으로 떠도는 유토피아를 그린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진즉에 민화에 배태된 유토피아 사상을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나마 전유한, 그리고 그렇게 자기화한 그림으로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만개한 꽃나무로 나타난 작가의 그림은 유토피아(아님 나이브한 세계)를 표상한다. 적어도 유토피아가 갖는 사회학적 의미가 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인 지금 마주하게 되는 유토피아가 새삼스럽다. 혹 개인의 무의식 속에서나마 유토피아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려는 기획이 아닐까. 유토피아가 아니면 삶의 꽃은 이내 시들고 만다는, 환상이 아니면 삶의 의미는 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실되고 만다는 자기반성적 강조를 그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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