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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완 / 흐름과 환, 흐르고 퍼져나가고 포개지는 삶

고충환

배정완은 미국에서 공학과 건축학을 전공했다. 이 베이스만 놓고 보자면 적어도 좁은 의미로서의 그러므로 일반적인 조형예술과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어떤가. 특히 후기모더니즘 이후 본격화되고 가속화된 경우로서, 탈장르 현상이 두드러지고, 다원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상호간 이질적인 범주와 영역들이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합류되는 소위 통섭의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물론 작가의 작업이 갖는 특수성을 그저 전공과 같은 학문적 베이스에서 찾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건 분명 조형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감각과 해석에 연유한 것일 터이다. 여하튼 작가의 베이스는 미술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경계와 영역을 넘나드는 현대미술의 이런 추세에 부합해 보이고, 고정된 문법에 구속받을 일이 없으니 오히려 더 파격적이고 실험적이고 전면적으로 보인다. 

작가와 여타의 국내 미디어 작가들과의 눈에 띠는 차이점으로 치자면, 남다른 공간해석을 들 수 있겠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국내 미디어 작가들은 내러티브에 집중하는 편이다. 아마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인식에서 작업의 존재 이유를 찾는 저간의 환경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미디어와 사진이 특히 이런 현실참여미술 내지 정치미술의 연장선에서 주제의식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경우가 많다. 해서, 레이저와 같은 인공적인 빛의 질료며 질감에 감각적으로 천착하는 것과 같은 일부 경우를 제외한다면, 좀체 공간연출에까지 확장되는 경우는 잘 없는 편이다. 

BaeJungwan_2009. TOPOHAUS GALLERY_On Love_0005

남다른 공간해석이며 공간연출이라고 했다. 작가는 애초에 공간에 관심이 있었다. 여기서 다시, 그가 다름 아닌 건축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에게 건축은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유기적인 관점에서 조형이며 공간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해서, 그에게 건축은 처음부터 공간이었고, 집이었고, 삶이었고, 우주였고, 광장이었고, 사회였고, 몸이었고, 존재였고, 서사였고, 빛이었고, 소리였고, 조형이었고, 질료였고, 관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의미론적이고 형식적이고 감각적인 지점 지점들이 서로 부닥치고, 충돌하고, 스미고, 어우러지고, 합류되어지는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와도 같은 것이었다. 

작가의 작업은 공간에 대한 남다른 인식과 해석이 밑바탕이 되고 있다고 했다. 바로 공간을 결정적이고 고정된 실체로서보다는 비결정적이고 유기적인 공간, 흐르는 공간이며 이행하는 공간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공간을 탈바꿈시켜놓기 위해 작가는 공간 속에다 거울을, 비정형의 비닐을, 그리고 낚싯줄이며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스트링을 설치하고, 이렇게 설치된 소재들을 스크린 삼아 그 위에 조명과 영상을 투사한다. 그리고 그렇게 투사된 영상 이미지는 이미지를 되비치는 소재들의 성질로 인해 공간을 자잘한 조각들로 분절시키고, 이질적인 이미지의 편린들이 흐르는 유기적인 공감체험에로 이끈다. 

이미지들이 흐르는? 그 공간체험은 보기에 따라서 스산한 그리고 때론 불온한(불안한?) 공기가 흐르는 도시의 뒷골목으로, 인공조명 아래 흐느적거리는 클럽으로, 옴니버스(아님 보다 무분별한 경우로 치자면 아포리즘?) 식의 분절되면서 연이어지는 불완전 서사 위로 부유하는 느와르 영화 속으로 이끈다. 그 영화(영상) 속에서 노인은 어둠이 내려앉은 파리한 풀장 속을 힘겹게 걸어가고(걸어오고?), 전철에 몸을 실은 노파는 굳은 표정 간간이 틱 장애를 의심케 하는 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적어도 영상 속에서만큼은 노인의 힘겨운 걸음 떼기 아님 옮기기는 무슨 천형처럼 계속될 것 같고, 노파를 실은 전철은 고장 난 테이프처럼 무작정 달려갈 것만 같다. 반복 재생되는 영상의 기술적 속성상 당연한 일이지만, 그 자체가 무슨 삶에 대한 알레고리 같다. 

BaeJungwan_2009. TOPOHAUS GALLERY_On Love_0013

그리고 성인남자가 트램블린에서 춤을 추고, 성인여자가 나른한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흐느적거린다. 아마도 가게 점원이지 싶은 무명인이 문을 열고 닫고, 여름 한철 한 집시 아님 히피가 쓰레기 통 옆에 버려진 냄새 나는 베드 위에 피곤한 몸을 누인다. 그렇게 영상도 흐르고 음악도 흐른다. 영상과 음악이 상호작용하면서 일종의 공감각을 실현하고 있는 것. 작가의 작업에서 음악은 영상만큼이나 중요한데, 공간 전체에 흐르는 영상과 더불어서 공간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스피커(마치 클럽에서와 같은) 내지 일종의 현악기(특히 공간에 스트링을 설치한 작업에서)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 내지 하이퍼링크와도 같은, 어떤 내적 필연성도 없이 부유하는 삶의 편린들이 만나지고 부닥치고 헤어지고 연속되면서 흐른다. 흐른다? 다시, 작가의 공간연출이 밀어 올리는 서사는 어떤 심각한 논평도 유보한 채, 어쩜 그 논평과 더불어서 거저 흐를 뿐인 삶의 알레고리로 모아지는(아님 흩어지는?) 것 같다. 

보기에 따라서 우연성의 개입을 허용하면서 작업에 대한 일관된 읽기를 거부하는 것 같은 작가의 작업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오히려 분명한 편이다. 작업과 마찬가지로 삶 역시 우연하게 흐르는, 일관된 독해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삶은 독해의 대상이며 인식론적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사는, 그저 살 뿐인 존재론적 경험의 대상일 뿐. 그래서 삶의 경험에 대한 모든 서술을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일 뿐. 해서, 작가의 작업은 비록 공간에 대한 인식과 해석에서 출발하지만, 종래에는 공간에 대한 존재론적 경험에로 이끈다. 인식된 공간보다는 지각된 공간체험을 예시해주고 있다고나 할까. 

다시, 작가는 공간을 단일의 완결된 형태며 구조로서보다는 우연적이고 이질적인 계기들이 합류되어지는 어떤 유기적인 특히 복수적인 총체로 본다. 탈장르 내지 학제 간 연구방식에 대한 동물적인 반응으로서 음악과 빛이 합류되고, 소리와 이미지가 스미는 식의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협업의 방식이 자연스럽다. 음악을 빛으로 재해석한, 음악연주와 빛 연주가 어우러진, 음악의 질료와 빛의 질료가 합주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실제로 작업을 접한 한 평론가는 이 장엄하고 스펙터클한 장면을 전통적인 미와는 차별되는 숭고며 또 다른 숭고라고 표현했다(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또 다른 숭고? 알다시피 숭고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자연의 스케일에 맞닥트렸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을 지칭했다. 그렇다면 인공도시와 인공도시에서의 삶에도 이 숭고의 감정은 일어날 수 있을까. 일어난다면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인공도시에서 발견한 자연의 스케일이며, 인공도시에 이식된 자연의 스케일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죽음? 불안? 흐름? 인식의 용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식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용량과 한계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스케일과의 상관성에 주목할 일이다. 우연적이고 이질적인 계기들을 하나로 종합해 들이는 이런 작업방식이며 태도는 그대로 통섭에 맞춰진 당대의 인문학적 테제와도 맞물린다. 

이처럼 공간을 고정된 실체로서보다는 흐르는 유기적 실체로 보는, 공간을 단일의 완결된 실체로서보다는 복수의 우연한 실체로 보는, 공간을 인식의 대상으로서보다는 지각의 대상으로 보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간을 공간 자체로서보다는 삶의 메타포며 알레고리로 보는 작가의 공간해석은 장소특정성과 관련한 남다른 해석과 함께 특히 존재론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경험으로, 그래서 궁극적으론 의미심장한 삶의 경험에로 이끈다. 


행위는 그저 생성의 정지된 한 순간일 뿐, 생성조차 반사일 뿐이라는 작가의 논평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생성마저 반사일 뿐이라는 대목에 방점이 찍힌다(당신의 불확실한 그림자). 생성이 반사라면, 생성은 무엇의 반사인가. 생성을 반사시키는 원형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생성의 원형이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있는가. 생성이 반사라는 말은 사실상 모든 것이 반사라는 말이다. 그래서 생성은 없고 오직 반사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담을 수 있을까(아마도 예술과 표현을 매개로), 라는 작가의 의심은 당연하고 의미심장하다. 당연히 나는 나를 담을 수 없다. 다만 반사된 나, 나를 반사시키는 원형이 없는 나를 담을 수가 있을 뿐이다. 반사된 나는 영상이며 이미지며 일루전이다. 작가는 흐르는 영상이며 흐르는 이미지 그리고 흐르는 일루전 위로 나를 흘려보낸다. 

그리고 작가는 내가 내 자신이 되는 횟수를 세기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 질서와 체계(예술의 틀? 표현의 틀?)를 요청한다. 내가 내 자신이 되는 횟수? 여기서 작가는 자신을 흐름으로 파악하고 환으로 표현한다(Life on Loop). 나는 흐름이고 환이다. 환은 파동이고 파장이다. 무한정 퍼져나가면서 하나로 포개지고 중첩된다. 흐름도 복수이고 환도 복수이다. 그 복수들 전체를 아우른다면 나의 실체를 붙잡을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흐름은 붙잡을 수가 없고, 환의 운동성은 무한정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붙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질서와 체계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붙잡을 수 없는 나를 붙잡기 위해서 요청된 것인 만큼 유보적이다. 그럼에도 정작 질서와 체계가 요청된 연후에도 여전히 나를 붙잡을 수가 없다면? 그래서 더 유보적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의 틀이며 표현의 틀, 그리고 특히나 존재의 틀에 대해 유보적이다. 작가는 이렇게 유보적인 것을 흐름으로 파악하고 환으로 표현한다. 

발터 벤야민은 인공도시를 다공성 개념으로 설명하고 정의한다. 인공도시에는 다양한 공간의 층위들이 하나로 포개지고 중첩된다. 여기서 공간은 그저 물리적인 측면을 의미하기보다는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속성을 아우른다. 가시적인 것으로 치자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타난 시공간적 개념이 되겠고, 비가시적인 것으로 치자면 여러 이질적인 체계며 제도 그리고 가치관이 상호 충돌하고 스미는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오래된 미래를 현재 위로 불러올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미래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는 작가의 이율배반적인 기획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In Memory of the Future). 벤야민의 다공성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 작가의 경우에는 흐름이고 환이다. 작가는 도시를, 도시에서의 삶을, 존재를, 존재의 삶을 흐름으로 풀고 환으로 푼다. 삶은 붙잡을 수 없는 흐름으로 흐르고, 무한정 퍼져나가는 환으로 포개진다. 옴니버스와 아포리즘 그리고 느와르 영화와 같은 불완전 서사 위로 흐르고, 퍼져나가고, 포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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