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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 자연의 흔적, 자연의 성정

고충환

김지현 / 자연의 흔적, 자연의 성정



자연의 노래(2003), 내 마음 속에서 되불러낸 또 다른 장면(2004), 어릿한 기억(2006), 무의식 너머(2009), 데자뷰(2010), 기억 속의 장면 혹은 기억으로 되살려낸 장면들(2011), 기억의 재생(2012), 어딘가에(2013), 그리고 형적 곧 형의 흔적 혹은 형으로 남은 흔적(2014). 


김지현이 지금까지 자신의 그림에 부친 주제들이다. 보통 추상화라고 한다면 그림에 딸린 주제나 제목이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구상화로 치자면 문제는 달라진다. 주제나 제목이 그림의 의미내용을 압축하거나 함축하고 있는, 최소한 암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주제나 제목을 실마리 삼아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렇다면 김지현의 경우는 어떤가.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 추상과 구상 사이의 반구상처럼 보이고, 구상을 추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구상의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다르게는 추상화의 형식논리로 그 흔적을 갈무리한 그림처럼 보인다. 구상과 추상 사이, 그림의 의미내용과 형식논리 사이에서 일어날 법한 상호간섭이며 상호관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migrate_60.6x72.7cm_2014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구상에 치우치지 않고 추상에 쏠리지가 않는다. 그래서 유보적이다. 유보적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대상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 순수한 형식논리의 소산인 추상화에서도 그렇다. 결국 유보적이란, 대상에 대한 작가의 태도며 입장이 유보적이라는 말이다. 도대체 나는 지금 뭘 그리고 있는가. 아마도 여기서 그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대상이 될 것이고, 그 대상을 주제로부터 유추해보자. 그러면 덩달아 대상에 대한 작가의 태도며 입장이 어떻게 왜 유보적인지, 그리고 이때의 유보는 의도된 것인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의도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밝혀질 것이다. 


작가는 자연을 그린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연 자체를 대상화하는 것은 작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와 객이 동떨어진 채 자연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자연과 작가가 상호작용하고 상호호흡하고 상호 간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싶었고, 주와 객이 서로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싶었다. 바로 자연의 노래를 그리고 싶었고, 자연이 들려준 화음을 그리고 싶었다. 자연이 들려준 화음? 바로 자연에서 나에게 건너온 어떤 부분을 그리고 싶었고, 이에 대한 화답으로서 자연에 대한 나의 감흥을 그리고 싶었다. 그렇게 화음과 감흥을 매개로 자연과 주체가 상호교통하고 상호 소통되어지는 어떤 차원을 그리고 싶었다. 그렇게 자연으로부터 나에게 건너온 부분이 의식으로 아로새겨졌고, 무의식 너머(메를로퐁티라면 지향호라고 명명했었을)로 저장되어졌고, 어릿한 기억으로 희미해져갔다. 그래서 비록 흐릿해졌지만,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잔상을 남기고 흔적을 남긴다. 작가는 바로 그런 친근하면서 낯선 자연의 잔상이며 기억의 흔적을 그리고 싶다. 그 잔상이며 흔적이 친근한 것은 잔상이며 흔적을 만들어준 자연과의 교감이 누구에게나 한번쯤 일어날 법한 일인 탓이고, 그럼에도 낯선 것은 그 일이 어떤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정리를 하자면, 자연의 노래로 함축되는, 자연과 내가 상호작용했던, 그리고 그렇게 자연과 내가 일체화되어졌던 순간의 어떤 감흥의 경험을 기억으로 되살려내는 일이고, 지금은 다만 잔상으로만 그리고 흔적으로만 남은 그 감동의 기억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 일이다. 그렇게 자연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며 태도는 유보적이었다. 자연 자체가 아닌, 자연과의 상호작용이 그림의 대상이었던 것. 바로 그 상호작용을 복원하고 재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 말하자면 어릿한 기억과 무의식, 데자뷰와 흔적이 그림의 대상이었던 것. 그리고 이렇듯 대상에 대한 유보적인 태도는 정작 그림에서의 형식논리로는 분위기 위주의 감각적인 그림으로 나타난다. 다시,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연유한 감흥을 그린 것이고, 더욱이 그 감흥의 순간을 기억으로 복원해 그린 것이고, 이때 불완전한 기억 탓에 분위기가 강한 그림으로 그 감흥의 순간을 표상한 것이다. 흐릿하고 애매하고 모호한 기억 그대로 그림 특유의 분위기로 투사된 그림이고, 그 분위기가 작가의 그림에 고유한 아우라를 발생시키는, 그런 그림이다. 


한편으로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그린 그림이라고는 했지만, 다르게는 자연을 이미지화한 것이고, 양식화한 것이고, 자기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결국 내가 매개가 되어져서야 비로소 이미지화도 양식화도 자기화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에 주목할 일이다. 화란 전유한다는 뜻이고, 좀 더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해석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여하튼 이런 자연의 이미지화로 치자면 몬드리안의 추상회화가 그 강력한 예증이 되어주고 있다. 알다시피 몬드리안의 추상회화는 원래 자연에서 추상된 것이다. 자연을 수평선과 수직선의 교직으로, 그리고 그렇게 교직된 선과 선 사이의 면으로 환원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작가의 그림 중엔 이런 몬드리안의 추상화 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들이 있다. 모르긴 해도 작가 역시 자연에 숨겨진 선을 찾아서 이리저리 그어봤을 터이고, 그렇게 긋다보니 면이 드러나 보였을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면을 색면으로 채워 넣었을 것이다. 굳이 몬드리안을 의식하고 그린 그림 같지는 않고, 자연에 숨은선을 찾아 캐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맞닿은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작가 역시 자연을 추상화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일종의 환원주의적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이런 선과 면의 어우러짐이 만들어내는 변주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그림에 따라서 이런 면면이 두드러져 보일 때도 있고, 상대적으로 더 느슨하게 드러날 때도 있고, 아님 최소한의 암시적인 형태로만 겨우 드러나 보이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선과 면의 어우러짐이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에는 그림의 구조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최소한으로만 암시되는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강조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선과 선이 교직되면서 면이 드러나 보인다고 했다. 작가의 그림에서 면은 일종의 빛에 해당한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 사이의 중간계조에 해당하는 풍부한 스펙트럼을 품고 있고, 이는 그대로 숲속에서의 감각적 경험 내지 감흥을 옮겨 그린 것이다. 어둑한 숲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얼기설기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빛이 흘러든다. 이때 빛의 강도 여하에 따라서 나뭇가지들의 교직이 강조되기도 하고, 흐릿하게 암시되기도 한다. 빛 자체도 나뭇가지 사이의 면으로 부각되기도 하고, 선을 지우면서 선 너머로 부드럽게 퍼져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면이 아닌 비정형의 원형을 그리기도 하고, 좀 더 멀리서 보면 아예 원형의 땡땡이를 그리면서 아롱거리기도 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빛은 이처럼 면으로, 비정형의 얼룩으로, 그리고 근작에서의 땡땡이로 각각 변주되면서 그림들 저마다에 다른 질감의 분위기며 표정을 부여해준다. 


migrate_53.0x45.5cm_2014


작가의 그림은 숲속에서의 이런 감흥을 그린 것이고, 자연과의 교감을 그린 것이다. 때로 숲을 부각하는가 하면 더러는 숲을 부드럽게 감싸는 빛의 터치를 그린 것이고, 빛의 질감을 그린 것이고, 빛의 희롱을 그린 것이다. 자연에 속하는 부분 곧 바람과 대기, 빛과 어둠, 그리고 여기에 작가에게서 자연으로 건너간 부분 곧 감흥이 상호작용하면서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어떤 차원을 그린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선 말년의 모네가 그린 수련연작에 대한 바슐라르 가스통의 분석을 참조할 수 있을 것). 내가 바라보는 숲을 그린 것이고, 나를 바라보는 숲을 그린 것이다. 내가 그 일부로 속해져 있어서 나와 구분할 수 없는 숲을 그린 것이고, 메를로퐁티의 우주적 살에서처럼 사실은 그릴 수 없는 숲을 그린 것이다. 그릴 수 없는 숲? 그렇다고 섣불리 관념적인 숲 내지는 숲의 관념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작가의 그림은 관념적인 숲이 아닌, 지각된 숲을 그린 것이다. 지각된 숲? 바로 숲의 감촉을 그린 것이고, 숲의 터치를 그린 것이고, 숲의 소리를 그린 것이고, 숲의 향기를 그린 것이고, 숲의 숨이며 온기를 그린 것이다. 바로 빛을 걸러내는, 그리고 그 속에 적당한 어둠을 들어앉히는, 그리고 그렇게 생명에 꼭 필요한 분량의 성정을 품는 숲의 성품을 그린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이 모든 그림들을 자연 자체를 대상화해 그린 것이 아니라,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이다(이때의 기억은 그러나 실증적인 기억은 아니다). 자연과의 감흥 내지 교감의 순간을 그린 것이고, 엄밀하게는 순간들을 그린 것이다. 순간과 순간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고 중첩돼 있는 것이며, 순간들이 아니라면 지속이라고 해도 좋을, 아님 이행이라고 해도 좋을 어떤 과정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해서,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보다는 유독 분위기가 강조되는 그림이다. 작가는 엷은 묵을 수도 없이 층층이 덧발라 올려 우려내는 과정을 통해서, 광목천을 물들이고 빨고 하는 거듭되는 반복과정을 통해서, 여러 겹의 천을 쌓아놓고 위에서 엷은 묵을 수차례 올리면 마침내 그 밑에 먹색과 채색이 배어나오는 일종의 먹지효과를 통해서, 그리고 채색을 올린 광목천을 뒤집어서 그렇게 뒤집힌 화면을 전면으로 취하는 배채법을 통해서 이렇듯 부드럽고 은근한 빛으로 어둑한 숲을 감싸 안는 것 같은, 투명하고 깊은 대기가 습윤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나무의, 숲의, 자연의 성정이며 성품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정이며 성품 그대로 기억에 부수되는 것들, 이를테면 잔상과 흔적과 여운에 실체(몸?)를 부여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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