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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섭 / 조각의 틀을 깨다, 조각을 재고하는 조각

고충환

양홍섭 / 조각의 틀을 깨다, 조각을 재고하는 조각


정통적으로 조각은 조각(카빙)과 소조(몰딩)로 나뉜다. 조각은 말 그대로 외부에서 안쪽으로 재료를 깎아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형태를 얻는 경우로서, 보통의 석조와 목조에서처럼 원칙적으로 단 하나 밖에 없는 조각이며 일품조각으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고 소조는 점토와 같이 가소성이 있는 재료를 이용해 원하는 형태를 빚어 만든 다음, 이러저런 틀을 이용해 그 형태 그대로 떠내는 경우를 말한다. 보통은 석고 틀을 많이 쓰지만, 형태가 복잡한 정밀주조의 경우에는 실리콘 몰드와 파라핀과 세라믹 셀 몰드를 사용하기도 한다. 실리콘 몰드가 있으므로 원칙적으로 똑같은 형태의 복수제작이 가능하며, 전통적으로 레플리카와 캐스팅 조각이 여기에 해당한다. 


S15C_18x18x22cm_2012


복수제작이 가능한 경우로 치자면 판화에서의 에디션 개념과도 통하는데, 그런 연유로 특히 현대판화에서 판화와 조각의 상호 관계가 논의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질적인 재료와 재료, 부분과 부분을 접붙여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며 형태를 만들어내는 용접조각이 더해지면서 조각의 범주며 영역을 확장시켜놓고 있다. 여기까지가 대략 조각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형적인 방법론이며 문법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에 부드러운 조각이나 빛을 이용한 소위 비물질조각과 같은 사실상 공간설치작업으로 봐야할 경우들을 포함하면 현대조각의 개념이며 정의는 그 장르적 특수성 논의가 무색할 정도로 가장 유연하고 포괄적인 경우로 봐도 되겠다. 소위 탈조각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이 일련의 경우들에 대해서는 조각에 반하면서 조각에서 이탈되는 경우로서보다는, 조각에 반하면서 결과적으론 조각을 연장하고 확장시키는 경우로 봐야 할 것 같고, 조각 안에서 탈조각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수행하는 경우로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조각에 대한 개념과 정의로 서두를 시작한 것은 양홍섭의 작업이 이런 조각에 대한 개념과 정의 혹은 범주와 영역 문제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주형조각 제작에 투신해왔고, 이 일을 업으로 삼을 만큼 특히 정밀주형조각에 관한한 거의 장인적인 수준의 스킬을 내공으로 가지고 있다. 이런 그가 조각의 틀을 깨는 작업을 조각의 이름으로 제안한다. 조각의 틀을 깨는? 작가의 작업에서 이 말은 수사적 표현이 아닌데, 실제로 조각의 틀을 깬다. 이를테면 주형조각에서 하나의 조각이 잉태되기 위해선 틀이라는 모태가 전제되어져야 하고, 작가는 그 틀을 깨는 과정에서 유래한 작업을 자신의 조각으로 취하고 있는 것. 당연히 틀을 벗겨내야(이를테면 깨트리고서야) 비로소 그 틀이 품고 있었을 조각을 꺼내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일반적인 주형조각과 작가의 작업이 뭐가 다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이와는 전혀 다른 과정이며 생리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보통은 틀에다 쇳물을 부어넣어 충분히 굳힌 연후에야 비로소 그 틀을 벗겨 내거나 깨트리기 마련이다. 그래야 틀이 품고 있는 조각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다. 여기서 작가는 주형에 쇳물을 부어넣은 직후에 인위적으로 틀을 깨트린다. 그러면 미처 원형을 간직할 새도 없이 깨어진 틀 밖으로 쇳물이 그대로 흘러내린다. 다만 그대로라고는 해도 여하튼 주형을 통과한 것이므로 주형에 원래 아로새겨졌을 형태며 흔적을 최소한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원형 그대로의 형태를 흔적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부분과 틀 밖으로 흘러내리면서 굳어진 비정형의 부분이 어우러져서 기묘한 조화(아님 부조화?)를 일궈내고 있다. 


무슨 말인가. 전적으로 우연성과 가변성에 노출된 상황이며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주고, 그렇게 조건화된 상황으로부터 형태 아님 결과가 저절로 추출되게 한 것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조각(아님 형태)이 생성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줄 뿐, 철저하게 수동적인 상태에 머문다. 조각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성시키고 만들어가고 완성할지에 대해서는 여하튼 작가의 영역을 떠난 문제이며, 전적으로 조각 자체에 속한 문제이다. 다시, 무슨 말인가. 스스로를 생성시키고 만들어가고 완성하는 조각이라는, 조각에 대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개념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각이 스스로를 어떻게 구현하고 실현해갈지에 대해서 작가는 원칙적으로 아무 것도 알 수도 없거니와 간여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이러저런 상황을 만들어줄 수는 있다. 이를테면 쇳물의 성분 여하에 따라서, 쇳물의 온도 여하에 따라서, 틀을 깨트리는 타임 여하에 따라서, 틀을 깨트릴 때의 환경과 강도와 각도 여하에 따라서 크게는 우연성이라는 틀 안에서 이러저런 변화를 유도할 수는 있다. 


조각에 대한 이런 식의 개념, 이를테면 수동적인 작가(다만 조각이 가능한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어줄 뿐인)와 능동적인 조각(스스로를 실현하는)의 개념을 예시해주는 경우로는 세자르의 소위 팽창조각(자기발포성 소재가 스스로 부풀어 오르면서 굳어진 조각)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조각의 틀을 깬다는 작가의 발상이 실제로 조각의 틀을 깨는 것에 이를지는 미지수지만, 그 발상 자체가 신선하고 참신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고, 자기형식을 찾아 나선 사실상의 첫 시도로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감각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스킬에 관한한 남다른 내공이 뒷받침되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며 도달한 지점이라고 생각되고, 덩달아 조각의 개념이며 정의와 관련한, 조각의 됨됨이와 관련한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작가에게 있어서 조각의 틀을 깬다는 것은 이렇듯 직접적인 표현, 이를테면 자신의 조각에 나타난 실질적인 과정이며 생리이며 현상인 동시에, 일정하게는 수사적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는 말하자면 조각의 틀을 실제로 깨트리면서, 동시에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조각이 계기가 돼 조각에 고유한 본질이며 본성이 있다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틀을 깨고 싶고, 조각에 대한 개념이며 정의의 틀을 깨고 싶고, 그 선입견의 틀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하고 싶다. 이처럼 작가에게 틀은 실질적이면서 유비적이다. 조각의 틀을 깨고, 생각의 틀을 깨고, 발상의 틀을 깨고 다시 태어나는 것, 바로 그런 재생에 대한 유비적 표현을 얻고 있는 것.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서 그 표현은 일정하게는 스스로에게 거는 자기주술이며 자기최면이며 자기암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하튼 그 표현이 자기암시에만 함몰되지가 않고, 조각의 개념이며 정의에 대한 보편적인 문제의식이며 자의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고, 덩달아 작가의 조각 내지 작업이 갖는 의의도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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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추출된 작가의 조각은 원형 그대로의 형태를 흔적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부분과 틀 밖으로 흘러내리면서 굳어진 비정형의 부분이 어우러져서 기묘한 조화(아님 부조화?)를 일궈낸다고 했다. 대개는 미니멀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부분과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분출하면서 흘러내린 용암의 모습 그대로 응고되고 응축된 형태가, 필연성(예측 가능한)이 만들어준 형태와 우연성(예상할 수 없는)이 만들어낸 형태가 기묘하게 어우러진 어떤 초현실적인 비전이며 풍경을 열어놓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초현실적 풍경은 현실에 실현된 풍경이라기보다는 마음속에 잠재된 풍경이다. 현실화되기 이전의 가능한 풍경이며, 가능태로서의 풍경이다. 주체가 매개가 돼 끄집어내주지 않으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풍경이다. 그래서 주체가 매개가 돼 비로소 감각적 층위로 불려나온 풍경이며, 그런 만큼 주체의 잠재의식이 반영되고 현실화된 풍경이다. 


주체의 잠재의식을 반영하는 풍경? 바로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반영된 풍경이며, 그렇게 끓어오르다가 용암처럼 응결된 트라우마가 만들어준 풍경이며, 조각의 틀이든 세상의 틀이든 그 틀을 깨고 다시 만들고 싶다는 재건과 수선의지가 반영된 풍경이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를 세계를 수선하는 사람에다 비유했다. 작가가 향후 조각(조각에 대한 개념과 정의와 형식문제)을 어떻게 수선할지, 덩달아 세계를 어떻게 수선할지 자못 궁금하다. 조각의 스킬에 관한한 남다른 내공을 어떻게 조각에 대한 남다른 감각으로 끌어내고 풀어낼지가 사뭇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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