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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 / 자기 내면을 쳐다보는 사람을 위한 공간, 방, 벽

고충환

김도희의 회화


자기 내면을 쳐다보는 사람을 위한 공간, 방, 벽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양식사의 견지에서 보면, 회화는 크게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에 천착한 경우와 회화 자체의 자족적인 성질에 주목하고 그 고유한 성질을 부각하는 경우로 구분해볼 수가 있겠다. 세계의 외상 곧 세계의 감각적 꼴 자체를 대상화한 재현회화와 회화의 본질에 천착한 추상미술과의 구분과도 통한다. 여기에 추상미술은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회화 자체의 형식요소에서 회화의 당위성을 찾는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과도 통한다. 


이렇게 구분해놓고 보면, 김도희의 회화는 재현적인 회화보다는 추상미술에 가깝다. 회화의 형식요소로 하여금 자신의 그림을 시작하는 형식원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추상미술이 일종의 베이스로서 의미기능하고 있는 것. 작가의 그림을 이렇게 보게 만드는 근거는 우선 그림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색면 구성을 들 수가 있겠다. 작가의 그림은 크고 작은 색면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유기적인 화음을 자아낸다. 서양화의 논리로 보면 색면 콤포지션이 되겠고, 동양의 전통으로 치자면 하나의 색면 구성 속에 조형원리며 우주의 화음을 담아낸 조각보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그림 속에 원근이 없이 평면으로 와 닿는 것 역시 이런 추상미술이나 모더니즘 패러다임과 그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까지는 소위 모더니스트로서의 작가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조성된 화면은 그 자체로 완성되고 완결된 지점으로서보다는 다른 무엇을 받아들일 베이스 내지 배경화면이 되고 있는 것. 덩달아 모더니스트로서의 정체성 역시 전면적이기보다는 부분적으로 되고 있는 것. 그렇다면 그림은 다른 무엇을 자기 속에 품는가. 그림을 가만히 보면 특정 문양과 패턴이 파편화돼 화면 속을 부유하고 있다. 바로 단청문양이다. 단청문양의 조각들이 화면 여기저기에 포치하면서 서로 어우러지기도 하고 단독으로 표표히 떠 있기도 하는 것. 웬 단청문양인가. 단청문양은 언제 어떤 연고로 작가의 그림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작가는 미대 재학시절 우연히 접한 단청문양에서 알 수 없는 끌림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후 잠시잠간 잊힌 적은 있어도 완전히 작가를 떠난 적은 없다. 만약 그 끌림에 논리적인 이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렇게 지속적으로 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가 해명되는 순간 끌림도 덩달아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끌림이라고 했다. 그건, 말하자면 무조건적인 끌림이며 자동적인 끌림이었다. 원형적인 끌림이며 원형에의 견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작가의 그림의 이면에는 색면 구성으로 나타난 조각보의 전통이, 단청문양으로 나타난 원형(원형질?)에의 추구가, 그리고 여기에 색 바랜 벽화를 보는 것 같은 고답적인 느낌이며 분위기가 면면히 배어들고 있었다. 이것들은 다 뭔가. 바로 시간이다.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빛깔도 없는 시간을 형상화한 것이며, 이로써 전통을 현재 위로 되불러온 것이다. 보기에 따라선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시간이며, 작가의 품성으로 아로새겨진 시간의 현현 내지 육화로 볼 수도 있겠다. 작가는 말하자면 일종의 유전자로 물려받은 원형적 미의식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면서 사실은 자기를 그리고 있었고, 그렇게 시간을 거스르면서 사실은 자신의 원형적 존재를 역추적하고 있었다. 색 바랜 것들, 부재하는 것들, 흔적으로만 남은 것들, 그리고 그렇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에 해당할 것들, 그런 것들을 작가는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근작에선 지금까지 그림에서는 없었던 결정적인 변화의 조짐이 엿보인다. 바로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그저 전통적인 유산으로 물려받은 미의식을 현재화한 그림인줄로만 알았던, 존재론적 원형을 찾아 시간을 역류한 그림인줄로만 알았던, 그리고 그렇게 비가시적인 시간을 가시화한 그림인줄로만 알았던 그림 속에 사람이 들어오면서 화면은 전에 없던 긴장감으로 팽팽해진다. 그림 속에 사람이 들어오면서 덩달아 사연이 들어오고 서사가 들어온다. 상대적으로 형식논리에 천착했던 그림에서 서사미술로의 일정한 변화가 확인되는데, 아마도 어떤 식으로든 그림 속에 자기를 투사하고 싶었던 저간의 욕망이 실현된 것이리라. 


실제로 작가는 그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왠지 모를 갑갑함을 느꼈고, 결정적인 뭔가가 결여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바로 그림에 어떻게 자기를 투사할 것인가, 그럼으로써 어떻게 그림으로 하여금 또 다른 자신이 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그림은 일정하게는 자화상일 수 있다. 심지어는 외관상 순수한 형식논리의 소산처럼 보이는 추상미술마저도.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전작)에서 이처럼 자기를 대리했던 경우로 치자면 때로는 단독으로 그리고 더러는 서로 어우러지면서 화면 속에 부유했던 단청문양 조각들을 들 수가 있겠다. 단청문양이 작가를 이유 없이 이끈 배경에는 이를테면 어떤 알 수 없는 원형질 같은, 그럼으로써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그 무엇이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유비적 경우가 아닌,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대리하고 언술을 대신해줄 어떤 존재의 필요성을 느꼈고, 사람은 이런 연유로 작가의 그림 속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처음에 사람 형상은 그 속에 다른 사람들의 초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여러 형식으로 작가에게 영향을 준, 그럼으로써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사람들이다. 이처럼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자기 속에 품고 있는 이 형상은 무슨 의미인가. 사람은 저 홀로 설 수는 없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내가 있고 네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상호영향사 내지는 상호텍스트성을 말해준다. 나의 인격 속에 네가 기입돼 있고, 너의 정체 위엔 내가 등재돼 있다. 그렇게 랭보는 자신이 다름 아닌 타자라고 공언하고 공표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형상은 점차 단색의 실루엣으로 대체된다. 실루엣? 그림자 인간? 그림자로서만 존재하는 사람? 바로 익명적 주체다. 작가는 사람형상을 빌려서 자기를 그리고 싶었고, 나아가 그렇게 그려진 자기가 다른 사람들도 대리하는, 그런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야기가 자기 자신에게만 한정되고 함몰되지는 않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를 획득하고 싶었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를 그리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그릴 수가 있었고,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작가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이기도 한 그림자 인간은 보는 이에게 무슨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아님 최소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 현대인의 초상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인의 초상이 익명적 주체며 그림자 인간으로 현상한다는 것이 그렇다. 현대인이 이처럼 익명적인 그림자 주체로서 현상한다는 것은 자기 속에 더 잘 숨을 수 있는 심리적 기제가 만들어 준 형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림에는 이런 그림자 인간이 저 홀로 그려져 있기도 하고, 여럿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서로 관계하고 소통한다기보다는 저마다 단절되고 고립된 섬처럼 자기 속에, 자기 생각 속에, 자기 독백 속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작가는 그림 속에 자기를 투사하면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자기에 골몰해있는 현대인의 초상을 발견했을 터이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일지도 모를 공간 속에, 방 속에, 벽속에 갇혀있다. 그리고 그렇게 갇혀있으면서 일탈을 꿈꾸고 비상을 꿈꾼다. 자기에 골몰해있는 인간은 꿈꾸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가 꿈꾸는 일탈이며 비상은 아마도 자기내면으로의 일탈이며 비상일 것이다. 사람들 저마다 자기에 골몰한다는 것은 곧 꿈꾼다는 것이며, 자기 내면으로 열릴 세계로의 여행을, 그러므로 자기 정체성을 향한 여로를 예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 하나를 지적하자면, 작가의 그림에선 색면 구성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그림 속에 사람이 들어오면서 색면으로 구획되어졌었던 화면이 공간으로, 방으로, 벽으로 변용된다. 이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화면을 인간의 자기정체성이 생성되고 변용되는, 가공되고 소비되는 자기정체성의 장으로 탈바꿈시켜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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