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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 마음속에 이는 바람, 삶에 부는 바람

고충환

김주성의 회화 


마음속에 이는 바람, 삶에 부는 바람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바람이 분다. 바람 자체는 형태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것이어서 언뜻 그 실체를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이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그 실체는 언제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바람 자체보다는 바람이 실어오는 어떤 것, 바람에 부수되는 어떤 것에 의해서 비로소 그 실체를 감지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파르르 떠는 문풍지나 일렁이면서 수런거리는 나뭇잎, 텁텁하고 습한 공기나 갯벌 내음 같은. 작가의 마음에도 바람이 인다. 그 바람은 무엇을 실어오는가. 마음속에서 부는 바람이 자연 속에서 부는 바람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이며, 같은 것을 실어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다시, 그 바람은 무엇을 실어오는가. 마음속에 차곡차곡 쟁여진 응어리며 상처(멍울)를 실어오고, 의지가지없는 낯선 땅에서 맞닥트리는 소외며 이방인의식(이민자의 생존)을 실어오고, 세계에 맞서는 자기보호본능(방어 기제)을 실어오고, 이 모든 투쟁, 이를테면 세상과의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림과의 투쟁을 낱낱이 알고 있을 영혼(영혼의 결과물)을 실어온다. 그래서 주제가 마음에 이는 바람이다.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마음속에서 부는 바람을 그린 것이고, 대개는 폭풍우며 폭풍 사이사이로 이따금씩 불어오는 미풍을 그린 그림이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불고 그림 속에서 부는 바람은 시인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란 시에 나오는 흰 바람벽을 닮았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이역만리의 한 허름한 여인숙(작가의 경우에는 미국)에 든 시인은 그 방의 흰 바람벽에서 쓸쓸한 것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외로운 생각이 헤매이는 것을 보고, 가난한 늙은 어머니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본다. 바람에 의지해 시인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불러냈을 이것들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를 닮았다. 실제로는 아득히 멀리 있는 것인데, 마치 눈앞에서 보듯 하는 어떤 정경이며 경험의 차원을, 이를테면 신처럼 내세적인 어떤 것(혹은 존재)이며 예술처럼 일회적인 어떤 것(혹은 존재)을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아련한 것, 부재하는 어떤 것인데 시인의 지독한 그리움이 현재 위로 되불러낸 것들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되불러내지 않으면 도대체 이 쓸쓸하고 외로운 생각을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렇듯 부재하는 것을 되불러오는 힘이며 계기는 다름 아닌 그리움이며 특히 그리움의 강도와 관련된 문제인 것. 그렇게 바람은, 특히 마음속에서 부는 바람은 대개 쓸쓸하고 외로운 생각을 불러오고(시인의 경우), 자기소외며 이방인의식과 같은 자의식을 불러오는(작가의 경우) 경우가 많다. 물론 아주 이따금씩 미풍도 불지만. 흔히 그렇듯 바람을 삶의 유비로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며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바람 자체는 실체가 없지만, 아님 실체가 희박하지만, 바람이 실어오는 어떤 것에 의해서 비로소 그 실체를 얻는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가시적인 어떤 것(흔들리는 나뭇잎)이 매개가 되어져서 비가시적인 어떤 것(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며, 현재하는 것(지극한 그리움)을 통해서 현재하지 않는 것(노모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실체를 얻는다는 말이며, 존재하는 것(그림)이 부재하는 어떤 것(마음 혹은 마음에 이는 바람)을 밀어 올린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건 다시, 무슨 의미인가. 예술의 존재원리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하지만 그 중 강력한 하나의 정의로 치자면, 예술이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고 드러내는 기술을 의미한다. 예술이란 이념의 감각적 현현 곧 감각적인 것을 매개로 그 자체로는 비감각적인 이념이며 관념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헤겔의 정의도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작가의 마음속에 이는 바람이며 그 바람을 그린 그림은 시인의 그리움과 통하고, 벤야민의 아우라와 통하고, 예술의 존재원리와 통한다. 시인이 시로 풀어낸 것을 작가는 그림으로 푼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사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은연중에 존재론적 자의식이라는, 그리고 예술의 존재원리라고 하는 상대적으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평을 열어놓고 있었다.  


알다시피 작가의 그림에는 멍울이며 이민자의 생존, 방어 기제나 영혼의 결과물과 같은 제목이 붙어있다. 물론 그저 작품이라고 중성적으로만 표기된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이 일련의 제목들은 적어도 작가의 그림이 삶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트라우마를 그린 것이며, 디아스포라의 자의식을 표현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그림 어디에도 트라우마도 디아스포라도, 존재론적 자의식도 세상과의 투쟁도, 그리고 더욱이 영혼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영혼의 흔적이라면 모를까.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은 형식 따로 내용 따로 그린 것이며, 따라서 다만 언행불일치를 확인시켜줄 뿐인가. 당연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작가의 그림은 재현적인 그림이 아니다.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따라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렇다면 뭘 따라 그린 그림인가. 바로 몸의 습성을 따라 그린 그림이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다시,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추상표현주의의 강렬한 원색 대비와 분방한 붓질을 닮았다. 추상표현주의는 다르게는 액션페인팅이라고도 한다. 액션페인팅? 그건 그대로 행위가 그린 그림이며 몸이 그린 그림이라는 말이 아닌가.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몸이 시키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일종의 몸 그림이고 마음그림이다. 


다시, 추상표현주의는 다르게는 뜨거운 추상이며 서정추상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차가운 추상이며 기하추상과 대비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추상표현주의가 뜨거운 추상이며 서정추상으로 분류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비록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 무언가를 재현하고 있다는 말이며, 특히 감정(이를테면 격한 감정과 같은)과 정서(이를테면 어떤 서정적인 정감을 자아내는 것과 같은)를 표현한 그림이라는 말이다. 이를테면 특히 작가의 경우에는 마음에 이는 바람과 같은, 존재를 온통 휘몰아치는 폭풍우와 같은, 삶의 격랑과도 같은 바람을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바람은 무슨 의미인가. 무속으로 치자면 신 내림이 되겠고, 몸짓으로 치자면 춤사위가 되겠고, 심리적으로 치자면 리비도가 되겠고, 서양(혹은 서양화)의 논리로는 내적 에너지의 분출이 되겠고, 동양(혹은 동양화)의 논리로는 기의 표출이 되겠다. 무슨 거창한 신 내림이냐고 하겠지만, 논리가 아닌 직관으로 그림 그림이며, 정신이 아닌 몸으로 그린 그림 정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리비도에 대해선 나의 본성임에도 정작 나 자신마저도 어쩔 수 없는 내면의 맹목적인 힘(정신분석학에서는 욕망으로, 그리고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부르는)을 의미하며, 작가의 그림이 어떤 형식논리를 넘어선 일종의 내적 필연성(맹목적인 힘)에 의해 그려진 것임을 뒷받침해주는 수사적 표현 정도로 이해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내적 에너지의 분출을 암시하고, 분방한 기의 흐름을 상기시키고, 억압된 욕망이 표출되면서 자유자재로 흐르는 리비도의 자기실현을 연상시킨다. 리비도는 때로 격정과 격랑을 불러일으키면서, 그리고 더러는 자기 내부로 상처를 응축한 비정형의 응어리를 만들면서, 그리고 이따금씩은 한바탕 바람이 휘몰아친 뒤에 찾아오는 정적과 정제와 절제된 화면을 표출하면서 자기를 실현한다. 바로, 작가의 마음 밭을 그린 그림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래서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자화상이라고 부른다. 보통 자화상이라고 하면 작가의 감각적 닮은꼴을 따라 그린 그림을 의미하지만, 앞서 말했듯 작가의 그림에서 감각적 닮은꼴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작가는 분방한 붓질로 표출된 기의 흐름을, 파문을 그리듯 반복된 붓질이 밀어올린 격랑을, 마음의 결이며 마음속에 이는 바람의 결을, 그리고 응축된 크고 작은 응어리며 비정형의 얼룩들을 자화상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바로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행위와 자기의 존재론적 자의식을 일치시킨 경우로 보아야 하고,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며 행위에 자신의 인격을 투사한 경우로 보아야 하고,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처럼 그림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그림이 자기가 된, 동일시 내지는 자기 동일시를 실현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루시앙 프로이트는 그림이 곧 살이며 몸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재현적인 그림과 추상적인 그림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림에 대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작가의 경우와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추상이 그 무언가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고 했는데, 외관상 추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체 순수한 형식논리의 소산으로서보다는 마음에 이는 바람을 표상한 작가의 그림에도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뜨거운 추상이며 서정추상, 몸 그림이며 마음그림의 의미도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을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 마음속에 이는 바람을 그리면서 그림 속에 인격을 투사하고 자기를 투자하는 자화상의 또 다른 한 형식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바람이 부는지 되물어온다. 삶은 바람이다. 바람에 맞서는 일이다. 당신의 삶에는 어떤 바람이 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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