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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예술가의 활대와 푯대, 혼과 정신

고충환

천애약비린 - spirit of Asian artist

아시아 예술가의 활대와 푯대, 혼과 정신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이번 전시는 지난 2012년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열린 한국의 인천과 중국의 사천 간의 상호교류전이 그 계기가 되었다. 지역과 지역이 상호 교류하는 것을 통해 국가적 차원의 교류가 갖는 의미를 확대재생산하거나 심화시킨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국가 중심 체제로부터 지자체 중심의 지역분권화 시대에 걸 맞는 교류 방법론을 시도하고 적용해본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차제에 한국, 중국, 일본, 태국, 인도를 아우르는 아시아 5개국 예술가들이 상호 교류하는 것으로 전시며 행사의 범위를 확장해나간다는 복안이고, 그래서 전시 주제도 이처럼 확장된 플랜에 맞췄다. 천애약비린 - sprit of Asian artist가 그것이다. 전시주제와 관련해 잠시 언급을 하자면 sprit는 네모꼴 돛에 비껴 질러 돛을 세우는 활대를 의미한다. 활대가 없으면 돛이 설 수가 없고, 활대가 선 연후에라야 비로소 돛도 배도 설 수가 있는 일이다. 여기서 배는 삶의 메타포를 의미한다. 망망대해의 바다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에다가 삶을 비유한 것이다. 그 삶이라는 배가 잘 항해하기 위해선 활대가 바로 서야 하고 돛이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활대는 어쩜 배의 축이며 삶의 본질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의미가 정신이며 혼 그리고 마음을 뜻하는 spirit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 의미가 spirit와도 연동되면서도, 한편으로 삶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라는, 삶의 유비적 의미도 함께 담아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해서, spirit of Asian artist란 주제는 대략 아시아 예술가의 혼 내지 정신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sprit가 독어로는 연료, 기름, 휘발유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예술을 위해선 연료가 있어야 한다. 혼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 혼이라는 연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예술은 멈춘다. 무슨 말인가. 예술가의 혼 내지 정신을 물질적이고 질료적인 차원으로 풀이해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정리를 하자면 이번 전시는 한국, 중국, 일본, 태국, 인도를 아우르는 아시아 5개국 예술가들이 상호 교류하는 것을 통해 아시아 예술가들의 혼 내지 정신으로 부를 만한 어떤 현상 내지 개념의 추출 가능성을 모색해보자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말하자면 소위 아시아성 담론의 형성 가능성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아시아성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선 항상성과 비항상성을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시아의 문화적 특수성으로 부를 만한 항상적인 지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한편으론 그 문화적 특수성이 시대적 상황에 맞춰 가변적이라는 사실 곧 비항상적인 지점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져야 한다. 세계에 대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 곧 특수성이 뭔가를 알아야 하고, 그 차이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지정학적 장소가 어디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특수성으로 하여금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시아성 담론의 문제의식 내지 자의식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일까. 그 배경엔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동양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정의내리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과정이 깔려 있다. 서양의 시각에서 볼 때 동양은 호기심의 대상이면서 욕망의 대상이다. 일본의 경우에 자포니즘, 인도의 경우에 구루(정신적인 스승)들의 나라, 그리고 한국의 경우엔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정의하는 것이 바로 호기심의 대상성을 투사한 것이고, 동양의 실체를 신비주의로 각색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신비주의가 차이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매력적인 상품과 시장에 연동되는 것이란 점에서 욕망의 대상성이 투자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이런 호기심의 대상이며 욕망의 대상성이 식민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작용하고 기능했음은, 그리고 그 논리는 이후 신제국주의와 후기식민주의 그리고 세계화를 앞세운 신자유주의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으로 이처럼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을 재단한다면, 이와는 반대로 동양의 관점에서 서양을 판단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나와진 것이 옥시덴탈리즘이지만 현재로선 설득력은 차치하고라도 오리엔탈리즘만큼 파급력을 갖는 경우로는 보이지가 않는다. 미셀 푸코는 지식이 곧 권력이라고 했다. 담론도 권력이고 지식도 권력인 것. 말하자면 헤게모니의 문제인 것이며, 아시아성 담론의 형성 가능성 문제가 정치적인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의 문제에 연동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아시아성 담론 형성을 위해선 문화를 문화 자체로서보다는 문화의 얼굴을 한 정치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피에르 부르디외의 상징투쟁이나 인정투쟁과 같은 개념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문화란 말하자면 정치의 침전이며 상징인 것이고, 저마다의 상징으로 하여금 인정받으려는 투쟁의 과정인 것. 


여기서 정치니 투쟁과 같은 단어에 민감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보기에 따라선 모든 것이 정치고 만사가 투쟁이다. 특히 개인적인 층위에서 투쟁은 자기갱신을 의미하며, 예술가에게 자기갱신(다르게는 자기부정)만한 덕목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시아적 특수성이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며, 그 구성요소랄 수 있는 예술가의 혼이 먼저 변한 연후에라야 비로소 그렇게 흐르는 현상이며 변하는 지점을 따라잡을 수가 있을 터이다. 이번 전시가 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근대화의 과정이며 경험을, 그리고 최근 급변하고 있는 국제관계며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를, 나아가 아시아의 문화적 특수성을 건져 올리는 그물(네트워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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