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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희 / 텍스트, 가독적인 그리고 난독적인

고충환

텍스트, 가독적인 그리고 난독적인


물질적인 풍요와 더불어서 오히려 정신성을 상실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행위, 라고 정광희는 자신의 작업을 정의한다. 형상에 생각을 가두는 관념의 집착에서 벗어나 대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진정한 비움이며, 자신은 바로 그 비움의 경지며 차원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분청에서와 같은 모습 없는 모습(아마도 형식을 넘어선 형식을 의미하는 수사적 표현일 것), 그러므로 꼭 어머니의 마음 같은, 그런 바탕이며 터를 표현하고 싶다고도 했다. 작가노트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추려본 것이다. 작업에 임하는 창작주체의 태도와 같은 일반론을 피력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고, 작가 자신의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 내지 키워드를 암시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 속을 좀 더 들여다보면, 작가는 작금을 물질적인 풍요가 오히려 정신성을 상실케 하는 시대로 진단한다.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성을 상실케 한다? 이 진단은 그대로 뒤르켐의 아노미 곧 정신적인 패닉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뒤르켐에게 아노미는 풍요 속의 빈곤을 의미한다. 내달리는 물질문명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 채 정체되거나 뒤처지는 정신문명 사이에 갭이 생기고, 그 갭 사이로 공허와 권태와 허무가 파고든다. 바로 자본주의의 허구성을 간파한 것이다. 불교식으로 풀면, 물질적인 풍요는 업 곧 욕망이 된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업을 쌓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욕망의 동물인지라 업을 쌓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고 딜레마가 있다. 선사상도 그렇지만 예술 또한 이런 아이러니며 딜레마 위에 축성된다. 작가는 그렇게 아이러니며 딜레마를 디딤돌 삼아 마음의 고향을 찾는다. 여기서 고향은 실재하는 지정학적 장소라기보다는 인간 본연의 차원 내지 존재론적 원형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작가에게 작업은 바로 그 존재론적 원형을 찾아나서는 여행이며 여로이고 과정이었다. 


생각이 대상을 벗어나다_197x270cm_한지에_수묵._2013


한편으로 물질 자체는 형상이며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그 대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비움이라고 했다. 대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지식이 가능해지려면 사물화, 객체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상화가 전제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대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그 전제를 포기하고 접겠다는 거다. 무슨 말인가. 노자 식으론 분별 이전의 무구별의 상태, 예수 식으론 어린아이 같이 순진무구한 상태, 라캉 식으론 그 자체 자족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상상계의 차원으로 자기를 되돌려놓겠다는 거다. 자기를 되돌려놓는다? 바로 존재론적 원형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진행이 아닌 퇴행이었음을, 채움이 아닌 비움이었음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여기에 아이러니 내지 딜레마와 함께 예술의 또 다른 원리인 역설이 개입된다. 바로 비움을 통해서 채우고, 퇴행하면서 진행하는 것. 그리고 조형의 원리로 봤을 때, 대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우면 무엇보다도 자유자재한 형상 표현이 가능해지고, 열린 형상(그리고 열린 의미마저도)을 표현할 수가 있다. 나아가 분청과 같은 모습 없는 모습 곧 형식을 넘어선 형식, 색감이며 질감을 매개로 바로 그런 바탕이며 터를 만드는 일이 예술을 매개로 작가가 하는 일이며, 최소한 하고 싶은 일이다. 


인(人)_130x162cm_한지에_수묵_2011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이 일을 하는가. 작가의 그림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그림과 함께 공작을 함축하고 있고, 그리는 과정과 더불어서 만드는 과정이 핵심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원래 서예를 통해서 그림에 입문했다. 그런 만큼 서예 곧 칼리그래피가 그림을 뒷받침하는 중추가 되고 있고, 서예와 그림이 구별되지가 않는다. 마치 서화동체라는 말을 실천하고 증명이라도 하듯 그림으로 확장된 서예 내지는 서예 속에 함축된 그림과 같은 서예와 그림 간의 상호내포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서예를 의미로 보고 그림을 이미지로 본다면, 의미와 이미지, 의미와 형상, 텍스트와 그림 간의 상호 긴밀한 경계 넘나들기가 꾀해지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읽을 수 있는 텍스트와 읽을 수 없는 텍스트, 가독적인 텍스트와 난독적인 텍스트, 가독성과 난독성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도 하다. 

그림도 그렇지만 작가는 평소 서예가 몸에 밴 만큼 작업실에는 언제나 서예를 쓴 한지가 수북하다. 작가는 그렇게 수북한 한지를 말아 가늘고 긴 띠를 만든다. 그리고 흡사 모를 심듯 그 띠들을 촘촘하게 심어 화면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일종의 쪽그림 내지 띠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아마도 작가가 의도한 분청의 그것과도 같은 표면질감이며 색감을, 바로 그런 바탕이며 터를 조성하는 작업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분청과 유사한 표면질감이며 색감을 위해선 여기에 고서에서 찢어낸 고서지가 더해져야 한다. 고서는 시간이 만들어준 책이다. 작가는 고서로부터 바로 그 시간이 숙성시킨 아우라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농묵에서 담묵 사이에 이르는 먹 색깔이 적절하게 부가되면서 색 바랜 한지와 서체가, 한지와 먹 자국이 서로 스미면서 일체화되는 유기적인 화면이며 그림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화면 위에 부가되는 먹 자국을 보면 주로 서체의 획이나 점찍기의 과정이 확대 적용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런 만큼 서예 내지는 그림의 기본으로 자기를 되돌려놓는 환원주의적 태도 내지는 자기반성적 사유의 과정이 실천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리고 그렇게 서체와 그림, 서체와 형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일체화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정리를 하자면 획과 점의 변주로 귀결될 수가 있을 것인데, 조형적 차원에서의 환원주의에 의해 뒷받침되면서도, 한편으론 그 의미가 우주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우주의 형상은 하나의 점(최초의 질료원소)에서 시작되었고, 우주의 의미는 하나의 획(최초의 개념원소)으로부터 비롯된 것.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 속에 서예와 그림, 의미와 형상, 우주와 조형원리가 그 경계를 허물면서 하나로 넘나들어지는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을 열어놓고 있었다. 

이처럼 미시적이고(가녀린 띠 위에 깨알 같이 박힌 잔글씨로 표상되는) 거시적인(화면 위에 내지른 먹 자국으로 표상되는) 차원을 속으로 품으면서 열어놓는, 안쪽으로 싸안으면서 열어놓는, 바깥이 아닌 안쪽으로 열리는, 무슨 자바라처럼 생겨서 표면 안쪽에 더 많은 글씨며 의미를 숨겨놓고 있는, 그런 작가의 작업은 그 꼴이 보기에 따라서 질 들뢰즈의 주름을 닮았다. 알다시피 들뢰즈에게 주름은 사유의 형이며 꼴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름은 언제나 외부에 내어준 부분보다 더 많은 부분을 자기 속에 품고 있어서 결코 그 자체며 전체를 가늠할 수는 없다. 노자가 그토록 경계했던 분별과 구분 곧 이것이다 아님 저것이다 하는 것들이 사실은 언제나 표면에서의 논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지엽적이고 심지어는 일정정도 왜곡된 것임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런 의미론적인 주름 내지 자바라 구조가 증언해주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가독성과 난독성 문제에 연동된다. 텍스트가 있고, 작가는 그 텍스트를 읽을 수 없는 텍스트로 만들었다. 그렇게 읽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가독이나 난독과는 상관없이 텍스트는 분명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처럼 읽을 수 없는 텍스트는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아는 것 잊어버리기 그리고 인식으로부터의 자유(그리고 형상과 대상, 생각과 관념에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와 같은 작가의 주제의식이 도움이 되겠다. 어의에 사로잡히지 말 것. 어의는 사물대상을 한정하는 인식론적 감옥이고 틀이다. 어의를 그 인식론적 감옥이며 틀에서 해방시키는 것, 어의 바깥에서 사물대상을 보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물대상 자체를 보는 것 아님 읽는 것 아님 느끼는 것, 그러면 사물대상 자체가 비로소 열린다. 작가의 화면에 나타난 읽을 수 없는 텍스트는 바로 이런 지경이며 차원 곧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의미, 열린 의미, 끊임없이 재생되고 갱신되는 의미가 생성되는 장을 열어놓고 있었다. 

아마도 작가는 서예와 더불어서 자연스레 사물대상의 그리고 문자의 지시적 의미에 눈 떴을 터이고, 그 개안 탓에 이런 개념적이고 의미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작업에 정박했을 터이고, 종래에는 반개념적이고 반의미론적이고 반인식론적인 작업을 지향하기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현재까지의 성과며 결과보다는 추후 그 지향이 전개될 과정이, 이를테면 의미의 숨기기와 드러내기를 중심으로 전개될 방향이 더 기대되고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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