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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테크노이미지네이션 / 살과 피가 통하는 미디어, 미디어아트

고충환

2014 테크노이미지네이션 / 살과 피가 통하는 미디어, 미디어아트


프랑스의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는 저작 <스펙터클 소사이어티>에서 이미지의 지배를 받는 현대인의 정황을 비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책 제목인 스펙터클 소사이어티를 우리말로 옮기면 구경거리의 사회가 된다. 그렇게 현대인은 어쩌면 구경거리의 사회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비현실적 현실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영화 <트루만 쇼>에 등장하는 주인공 트루만 버뱅크(짐 캐리 분)처럼 만들어지고 연출되고 각색된 현실을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리얼리티는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리얼리티는 가능한가. 현실과 가상현실을 그리고 실재와 가상실재를 구분하게 해주는 경계는 무엇이고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 이미지가 감각의 차원을 넘어 의식에 침윤되고 무의식에마저 파고들었다면, 그리고 그렇게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지경에 와 있다면 현실은 그리고 현실인식은 가능한가. 이미지의 어원은 허깨비며 귀신이며 허상에서 왔다. 그 허상이 실재의 얼굴을 하고 현실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면? 


이이남_곽희-조춘도 (눈)_영상


장 보드리야르는 실제로는 없는데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가상현실이며 가상실재를 시뮬라크라라고 했다. 어쩌면 현대인은 이미 가상현실을 현실로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연장에서 이라크 전쟁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모니터를 보고 버튼을 누르는 조종사에게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릴 리가 만무하다. 그 정황이 그려 보이는 그림은 비현실을 넘어 차라리 게임에 가깝다. 무슨 말인가. 다시 이미지로 돌아가 보자. 이미지는 원래 죽은 사람 그대로를 본 떠 만든 조각이나 그림을 의미했다. 비록 그 자체는 실재도 현실도 아니지만 실재를 환기시키고 현실을 떠올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미지가 현실을 닮은 탓에 이미지와 현실을 구분할 수가 없고(최소한 어렵고), 그렇게 종래에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현대인은 온통 이미지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러저런 미디어가 등장해 이런 삶을 일반화하고 가속화한다. 미디어아트는 이처럼 보편화된 미디어환경에 대한 반응과 반성으로부터 유래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배경으로 미디어아트를 보면, 그 특성은 크게 형식적인 부분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가 있다. 형식적인 측면은 주로 기술적인 측면과 관련된다. 각종 첨단 혹은 신종의 미디어들, 이를테면 신문, 잡지, 영화, TV, 사진, 복사기(제록스프린트), 2D 프린트와 3D 프린트, 컴퓨터, 인터넷, 웹(웹아트), 넷(넷아트), 레이저, 홀로그램, 그리고 손 안의 컴퓨터랄 수 있는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이런 기기들은 지금도 계속 개발되고 있다. 창작주체는 그 본성상 자기의 표현을 더 효과적으로 구현하게 해줄 미디어를 찾아 기웃거리기 마련이고, 이때의 감각촉수가 이런 첨단 내지는 신종 미디어들에 미친다. 

그리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미디어아트는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달라진 미디어 환경이 초래한 달라진 삶의 질을 조망하는 것에 맞춰진다. 이를테면 현실과 가상현실 그리고 실재와 가상실재의 현저하게 모호해진 경계를 묻는다거나,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한 대체현실 내지 증강현실의 실체를 묻는다거나, 사람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이미지를 주제화한 이미지정치학의 실체를 묻는다거나, 리얼리티를 파고드는 대신 가상의 리얼리티를 만들고 제안하는 일에 복무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게 미디어아트는 현대인이 온통 이미지가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증언하고, 유사현실이며 의사 아우라(심지어는 정서적이고 서정적인 성질마저도 흉내 낸)를 매개로 감각을 확장하고 심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자리에 앉은 채로 자기를 세상 끝까지 보낸다. 


하광석_Reality Illusion_설치


울산에서 이처럼 미디어아트를 겨냥한 전시가 열렸다. <테크노 이미지네이션>이 그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열리는 이 전시는 울산이 대표적인 산업도시임을 감안하면 좀 뒤늦은 감이 없지가 않다. 산업도시의 위상이며 정체성에 걸 맞는 전시가 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을 하자면, 현재 울산에선 시립미술관 건립이 추진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웬만한 지자체들마다 시립미술관이 있지만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미술관 간의 차이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저 지자체들마다 똑같은 미술관 하나씩을 보태는 식의 현실에서 미디어아트로 미술관의 성격을 특성화한다면 다른 미술관과의 차이를 견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쟁력 강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마도 작년 전시에서 세미나의 형식으로 미술관 정책을 주제로 다룬 것도 이런 저간의 사정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말을 하자면 미디어아트로 특성화한 미술관은 그 성격이 기왕의 미술관과는 판이할 것이다. 소장품 관리와 전시 그리고 교육을 미술관의 핵심기능이며 역할로 본다면, 모든 면에서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미디어아트의 상당 부분은 비물질 형태로 존재하고, 작품의 한정마저 불투명한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웹아트나 넷아트처럼. 여기에 원본과 카피 문제에 이르기까지. 따라서 아카이브 중심의 미술관 체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져야 한다. 


다시 눈을 전시로 돌려보면, 이번 전시는 울산이라는 첨단산업도시의 위상에 걸 맞는 미디어아트와 울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선사시대의 반구대 암각화의 지평융합을 꾀하고, 울산의 과거와 미래가 한자리에서 만나지는 상호호환을 시도한다. 전시에는 식전 퍼포먼스(배달래)와 반구대 특별전(이하우)을 포함해 총 12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그 대강의 내용을 보면, 먼저 이이남은 스틸화면을 동영상 화면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고전의 현대화를 꾀한다. 그리고 윤영화(유산-여섯 개의 의자)는 진정한 자기를 찾아 떠나는 정신적인 여행과 여로의 과정을 통해 자기반성적인 작업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일말의 신비주의가 엿보인다. 또한 이태희(화이트보드)는 만국기가 하얀 눈에 덮여져 지워지는 장면을,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눈에 덮여 지워진 만국기가 총성으로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을 대비시킨다. 아마도 국가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폭로하고, 그 실체가 사실은 허구적이고 때론 폭력적이기 조차 한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일 터이다. 그런가하면 하광석은 <허상 속의 실체>라는 제목에서처럼 허상과 실체, 실재의 그림자 아님 실재와 그림자의 모호한 관계며 경계를 다룬다. 실제로는 없는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시뮬라크라라고 했다. 이를테면 최대한의 그림자가 최소한의 실체와 더불어서 실재(아님 실재감?)를 다툰다. 그렇게 제안된 유사현실이며 의사풍경이 어떤 서정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타공법을 통해 뚫어진 구멍 사이로 빛이 새어나오게 한 한호의 작업(영원한 빛-동심)은 빛을 매개로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해 보인다. 타공법은 아니지만 타공법과 흡사하게 그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린 최정유의 작업(존재의 그림자)은 숫자와 기호로 재구성된 사물들을 통해 사물이 담고 있는 기억과 흔적을 형상화한다. 매스를 결여한 사물들의 껍질 내지 허물(사물들의 흔적?)을 공중에 매단 것에서 소프트스컵처 곧 부드러운 조각으로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정진용의 작업(트리니티)은 성삼위로 나타난 종교적 의미를 가족관계라고 하는 세속적인 의미로 재해석하고, 이완승의 작업은 돌 조각이나 철판 조각을 재구성하고 재배열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했다. 돌이나 철판이 원래 가지고 있었을 매스를 박탈하고 전이시키는 과정(아마도 매스로부터라는 제목이 연유했을 과정)을 통해 파괴와 재생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 토드 홀로벡(미국)의 작업(뮤직테이블)이 사운드아트 곧 소리조각 혹은 소리예술의 경우를, 파리드 라히미(이탈리아)의 작업(무지개)이 인공풍경 내지 인공자연의 경우를 예시해준다. 첨단의 미디어로 구현된 자연이 미디어의 미래가 열어놓을 지점에 대해 곱씹게 만든다. 이를테면 사실상 자연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비록 이미지의 형태로나마 자연을 되돌려주는 것과 같은. 


세계적인 미디어비평가인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각각 차가운 미디어와 따뜻한 미디어로 구분했다. 주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미디어와 주체가 간섭할 여지가 별로 없는 미디어를 구분한 것이지만,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전제 하에 기계적인 미디어와 살과 피가 통하는 미디어 아님 인간화한 미디어를 대비시킨 경우로 봐도 무방하겠다. 사실 이렇게 구분을 했지만, 보기에 따라서 모든 미디어는 차갑고 기계적이다. 결국 이렇듯 차갑고 기계적인 미디어로 하여금 살과 피가 흐르게 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미디어를 사용하는 주체의 몫이며 일이다. 미디어 자체는 중성적이다. 이런 미디어로 하여금 성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미디어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이런 미디어로 하여금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이번 전시가 이렇듯 미디어를 매개로 성격을 부여해주고 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살과 피가 통하는 인간화한 미디어를 예시해줄 수 있는, 그런 형식실험의 장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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