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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과학, 예술의 혼성 / 우주에서 미래를 캐고 상상력으로 꿈을 캐는

고충환

자연, 과학, 예술의 혼성 / 우주에서 미래를 캐고 상상력으로 꿈을 캐는



전남 고흥은 다도해와 함께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가히 절경이랄 만하다. 더욱이 나로도에는 2012년 역사적인 나로호 발사 성공과 더불어 주목을 받고 있는 나로우주센터가 자리하고 있어서 그 의미를 더한다. 현재 매년 6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대한민국 우주항공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자연과 과학이 어우러져 있으니, 여기에 예술이 더해진다면 그 시너지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남포미술관이 나로우주센터와 협업체계를 구성해 이번 전시를 성사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과 예술의 관계도, 과학과 예술의 관계도 알고 보면 오랜 역사적 연륜을 가지고 있다. 자연에서 배우라는 전통적인 미학의 주문이 그렇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연 그대로만 옮기라는 로댕의 전언이 그렇다. 자연은 그렇다 치고, 과학과 관련해서도 특히 서양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되는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가들은 사실상 과학자들이기도 했다. 더 멀리 소급해보면 예술은 원래 아르스(ars)와 테크네(techne) 곧 예술과 과학, 둘 다를 의미했다. 그리고 근대 들어서는 저작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이 새로운 예술장르로 주목한 사진과 영화가 모두 과학의 성과이기도 하다. 여기에 미디어를 감각의 확장으로 본 루이스 멈포드의 저작 <예술과 기술>이나 마샬 맥루한의 저작 <미디어의 이해>(그 부제가 인간의 확장인)에 개진된 미학적 입장과 견해가 모두 예술과 과학의 밀월관계를 말해준다. 나아가 하이데거는 과학적 진리와 함께 예술적 진리를 주장한다. 그 자체 논증의 대상인 진리와, 애초에 논증의 대상이 아니면서 과학적 진리가 미처 가닿지 못한 부분을 캐내는 진리다. 예술은 그렇게 진리를 매개로 과학과 하나로 만나진다. 여기에 이런 예술적 진리를 예시해주는 예술가들이 있다.    


이재삼. 이재삼은 목탄화를 그린다. 목탄은 부드러운 질감과 조직이 크고 성근 그림에는 제격이지만, 그림 위에 덧그리기가 어렵고 상대적으로 세밀한 묘사에도 까다로운,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종적으로 그림을 정착시키기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다. 그래서 목탄은 흔히 스케치나 드로잉 같은, 본격적인 그림을 위한 밑그림으로 많이 그린다. 작가는 지난한 형식실험 끝에 목탄이 갖는 이런 난점을 해결했고, 세밀한 묘사와 단단한 표면, 그리고 여기에 목탄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이 살아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목탄화를 그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무엇이든 그릴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소나무와 숲과 폭포와 같은 자연을 특유의 정서를 담아 그린다. 그리고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달빛으로 명명한다. 정작 그림 속에 달이 등장하는 그림들이 많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달빛은 무슨 의미인가. 우선 달빛은 달빛을 받아 반사하는 사물대상의 은근한 표면질감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달빛은 달빛으로 형용되는 숲의 기운이며 정령이며 비의를 의미할 것이다. 말하자면 밤에 숲은 달빛의 기운을 받아 마치 어둠 속에서 부각되듯 부드럽게 자기를 드러낸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어서 부분과 부분이 부각되기보다는 부분과 부분이 유기적인 덩어리로 다가온다. 그렇듯 어둠은 부분과 부분을 구별하기보다는 하나로 연속시키고 연장시켜준다. 그렇게 연속되고 연장되는 사물과 사물 사이 곧 어둠 자체로부터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들이며 그림으로 환원되지 않은 것들이 수런거리면서 나무를 흔들고 숲을 일렁이게 한다. 달빛은 말하자면 어둠 자체와 사물 자체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숲의 기운이며 정령이며 비의를 열어 보인다. 



이재삼_달빛-Moonscape 259x582cm Charcoal on Canvas  2012


이재효. 처음에 작가는 돌과 낙엽을 매달아 기하학적인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무를 쌓아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견고한 덩어리를 만든 다음, 그 표면을 깎아내 나무의 단면이 드러나게 했다. 이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인공적인 구조로 번안한 것이며, 도날드 주드 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의 본질을 최소한의 구조로 추출하고 추상한 것이 되겠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이런 일련의 작업들과 연장되면서도 다른 전기를 맞게 되는데, 나무와 못이 하나로 만나지는 작업들이 그렇다. 작업의 대략적인 과정을 보면, 거대한 나무둥치나 연이어 붙여 만든 송판의 표면에 무수한 못질을 한다(사실을 말하자면 작업의 편의상 부분작업을 완성한 연후에 완성된 송판들을 하나로 붙인). 그리고 나무를 불에 태워 숯을 만든 다음, 돌출한 못과 함께 나무의 표면을 갈아낸다. 그러면 나무와 못이, 그 속에 어둠을 머금고 있는 숯과 금속성의 번쩍이는 표면질감을 발하는 못의 단면이, 그러므로 빛과 어둠이 대비되는 작품이 완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매개가 되는 것이 숯의 상징적 의미며 기능이 되겠다. 숯은 알다시피 죽음을 통한, 죽음을 넘어서는 재생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숯을 매개로 나무가 어둠으로 그리고 못이 빛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한갓 물질이 어둠과 빛이 대비되는 감각적이고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현실로 환원되고 환치되는 것이다. 일종의 물질변환이 일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일련의 과정에 대해선 일종의 연금술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위로 별빛들이 아롱거리는 밤하늘 아님 우주를 보는 것 같은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못의 형태를 이용해 일종의 거대한 문자 탑을 만드는데, 인류의 역사를 문명화 이전과 이후의 단계로 구분하게 해주는 언어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최태훈. 작가는 플라즈마기법과 용접으로 노동집약적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감각이 돋보이는 조각을 만든다. 용접에 대해선 철조각과 관련한 전형적인 기법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문제는 플라즈마기법이다. 플라즈마기법은 원래 압축된 공기를 이용해 철판을 절단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이 방법을 자신의 조각에 적용한다. 압축된 공기를 조절하는 여하에 따라서 철판에 비정형의 스크래치를 만들고, 철판을 휘게 만들고, 철판에 무수한 자잘한 구멍을 만든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정형의 철판이 너덜너덜한, 그 표면에 섬세하고 부드러운 굴곡을 가진, 흡사 가죽이나 천 조각과도 같은 비정형의 형태로 변환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형태를 벽에 기대 세우거나 공간에 설치한 연후에 그 이면에서 빛을 쏘이면 마치 은하수 같고 오로라 같은 우주 쇼가 펼쳐진다. 섬세한 구멍 사이로 빛이 새나오면서 밤하늘 위로 무수한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환상적이고 시적인 판타지를 연출하는 것이다. 해서, 이 작업들에 대해선 일종의 가상의 우주 벽으로 명명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처럼 플라즈마기법과 용접을 이용해 일종의 빛이 지나가는 통로 아님 빛이 흐르는 일련의 구조물을 만든다. 그리고 나무와 같은 자연을 만들고, 레이더와 같은 인공물을 만든다. 특히 레이더는 광활한 우주를 떠도는 소리와 같은 정보를 채집하는 구조물로서, 사실상 인류의 미래를 채집하고 꿈을 채집하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일상으로 턴한다. 소파와 같은 생활 기물들을 만들고, 아마도 자화상이지 싶은 속이 빈 사람형상을 만든다. 속이 빈? 실체가 없는, 정체성 혼란으로 방황하는 나의 초상이며 너의 초상이다. 무슨 미아처럼 광활한 우주를 떠돌다가 마침내 그 자체 소우주인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자신의 일상에 정박한 것이라고나 할까. 해서, 이 일련의 근작들에 대해선 오디세이의 귀환으로 명명할 수 있을 터이다.  


최태훈_Aurora, Stainless Steel, Lighting, 5000x1000x1200mm_3


한효석. 한효석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 란 일관된 주제의 그림을 그렸고 조각을 만들었다. 사람의 초상을 한갓 고깃덩어리로 환원해 그린 그림들이고 조각들이다. 조형적 성과도 예사롭지가 않지만, 주제가 특히 흥미롭다. 인간은 감추고 싶은 것이 많다. 그 중 가장 깊숙이 감추고 싶은 것으로 치자면 인간은 정신적인 동물이며, 따라서 육체적인 동물인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정신적인 동물이 육체적인 동물보다 우세하며, 정신적인 동물 사이에도 더 정신적인 동물이 덜 정신적인 동물보다 위대하다. 이런 생각은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주고,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부리는 것을 정당화시켜준다. 지배하고 부린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 대상을 사물화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아무런 양심에 가책도 없이 그 대상을 지배하고 부리고, 때에 따라선 폐기하거나 죽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덕에 거리낄 일도 없는데, 도덕은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간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억지주장을 펴기 위해 인간은 도덕을 팔았고 정신을 팔았다. 휴머니즘을 팔았고 휴머니티를 팔았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종들을 의학과 유전자공학의 실험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하나의 머리에 몸이 둘인, 기형으로 태어난 돼지를 마루타의 증거로 제시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경고한 것이다. 예술은 사람을 감동시키기도 하고, 불편하게도 한다. 작가의 예술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는데, 감추고 싶고 인정하기 싫은 진실 앞에 서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효석_Piglet2


윤종석. 윤종석은 옷을 그린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옷은 취향과 취미 같은,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문화적 성향이며 질을 상징한다. 대외적으로도 그런데, 제도화된 사회에서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옷은 공공연하게 개별주체의 신분과 계급을 상징한다. 유니폼이 그렇고, 보통의 옷도 그렇다. 옷이 그저 입는 의복 이상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그리는 옷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작가는 옷 그림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싶은 것인가. 작가는 왜 옷을 그리는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작가가 그리는 옷은 대개 어린아이 옷이다. 옷 그림을 자세히 보면, 구김이 있고 어떤 형태가 드러나 보인다. 총이나 칼과 같은 무기들이다. 어린아이 옷을 구겨 총을 만들고 칼을 만들었다. 어린아이 옷을 구겨 그 형태 밑에 총이며 칼을 숨겨놓았다. 바로, 반어법이다. 부드럽고 우호적인 옷의 질감을 총칼의 금속성의 질감과 대비시켜 은폐된 폭력을 암시하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중적이다. 이를테면 어머니의 식칼은 살림을 위한 것이지만, 똑같은 칼이 적의를 품으면 죽임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오브제 위에 천을 덮어서 가린 그림을 그린다. 비록 천에 덮여 있지만 형태 위로 드러난 실루엣만으로도 그 오브제의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이를테면 자동차와 같은 욕망의 아이콘), 도통 오리무중인 경우도 있다. 반어법과 이중적 의미를 경유해 본격적인 의미놀이(의미를 드러내고 숨기기 아님 표면적 의미와 이면적 의미 넘나들기)의 차원으로 이행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이 모든 그림들을 주사기로 그린다. 마치 뜨개질하듯 한 땀 한 땀 섬세하게 돋을새김 된 표면질감의 촉각적인 성질이 부드럽고 우호적인 옷의 질감과도 통한다. 


윤종석_나의 어머니  300X100 acrylic on canvas 2010


황선태. 황선태는 유리조형작업을 한다. 유리는 속이 비처보이는 투명성과 빛을 통과시키는 투과성이 특징이며, 이로써 실내에 빛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도 그렇지만 건축구조 상으로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재료 자체의 제약으로 인해 장식품이나 공예 수준을 넘어서는 본격적인 회화적 표현은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는 남다른 회화적 수준이며 성과를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된다. 더욱이 그 성과는 현대미술에 요구되는 동시대적 감수성이며 문제의식에도 부합하는 것이어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의 유리조형작업은 어떤 의미를 어떻게 제안하는가. 작가의 작업은 투명한 유리판에 선으로 드로잉 한 실내공간과, 유리창과 천창을 통해 비쳐드는 빛의 질감을 염두에 두고 만든 샌딩 처리한 판과 같은, 두 개의 유리판을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시켜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조명을 장착하면 마치 적당한 어둠을 머금고 있는 실내공간에 밸벳과도 같은 부드러운 질감의 빛이 흘러드는 듯한 환영적인 효과를 준다. 설계도 내지 청사진이 그런 것처럼 현실공간을 다만 선으로만 표현한 일종의 개념도에 빛의 질감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차갑고 중성적이고 무미건조한, 순수한 개념으로 환원된 현실에 온기가 흐르는 또 다른 현실이 포개진 것 같은, 그런 친근하면서도 낯 설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전통적인 재현문제를 건드린다. 말하자면 재현된 현실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동시에 회화적(평면적) 재현이나 조각적(입체적) 재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의 현실을 열어놓는다. 심지어 사진에서마저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빛의 질감으로 재현된 현실을 확장하면서 넘어선다. 


황선태_작업실,2011, 142x102x8cm,강화유리에 유리전사,형광조명


김세중. 김세중의 작업은 회화적이고 조각적이다. 평면적이고 입체적이다. 회화와 조각이, 평면과 입체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화면으로 합체된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겠고, 컬러가 덧입혀진 회화적 표면 위로 입체형상이 돌출된, 그런 일종의 저부조 형상을 떠올려볼 수가 있겠다. 대개 평면의 프레임 위에는 장식적 패턴이 돋을새김 돼 있고, 프레임 정중앙에 포치한 원형상은 큰 원이 작은 원을 감싸 안는, 그런 중첩된 형태로 구조화돼 있다. 원형상은 일종의 운동성을 암시하는데, 일정한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자기 내부의 돌기며 촉수를 흩뿌리는 것 같은, 그런 잠재된 운동성을 가시화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보이고, 특히 기하학적 구조며 패턴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를테면 정사각형도 원형상도 가장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에 속한다. 정사각형이 가장 안정된 형태에 해당한다면, 원은 처음과 시작이 따로 없는 무한반복 순환구조로 인해 가장 완전한 형상을 상징한다. 이처럼 가장 안정된 형태와 완전한 형상이 하나로 포개져 있으니, 여기엔 필시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탑재돼 있을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최소한 예사롭게는 보이지가 않는다. 게다가 여기에 중심성이 강한 구도며 구조가 가세해, 작가의 작업은 정적으로 보이고 관념적으로 보이고 도상학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원형 패턴이 암시하는 운동성마저도 이런 관조적인 인상을 흩트리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이 도상학적 패턴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니체는 예술의 동기로서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아폴론적 충동을 그 예로 든다. 각각 카오스를 추구하는 충동과 질서를 추구하는 충동이다. 이 가운데 작가는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아폴론적 충동이며 질서를 추구하는 충동에 기울여져 있는 것 같다. 해서 혹 작가의 작업은 자기 내면에 일종의 유사질서의식으로 구조화된 성좌를 기입하고 축성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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