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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 젖은 자와 마른 길이, 돌의 주름과 흐르는 물결이 순환하는

고충환




김수호/ 젖은 자와 마른 길이, 돌의 주름과 흐르는 물결이 순환하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하천을 따라 걷는다. 흐르는 물을 따르거나 거스르는 바람의 방향을 살핀다. 나무, 풀, 꽃, 새의 움직임에서 시간의 변화를 본다. 무심히 놓인 돌에 평소 눈에 닿지 않던 시선이 머문다. 단단한 돌 표면을 관찰하다 보면 문득 부드러운 물결처럼 보인다. 손에 잡히지 않던 물살이 잡히는 것 같다...산책은 무거워진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한 것인데 몸짓이 다시 무거워진다. 
-작가 노트

산책. 산책한다. 할 일도 없이, 목적도 없이, 생각도 없이 터덜터덜 걷다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린다. 내 쪽에서 풍경 쪽으로 건너가는 것이 있고, 풍경 쪽에서 내 쪽으로 건너오는 것이 있다. 교감이 일어나면서 풍경과 내가 유기적인 한 몸이 된다. 풍경이 내 안에 들어오면서 내가 되고, 내가 풍경 안으로 들어가면서 풍경이 된다. 세잔은 풍경이 아닌, 풍경의 의식을 그린다고 했다. 풍경의 의식? 내가 풍경이 되고, 풍경이 내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아마도 풍경을 앞둔 세잔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할 것이다. 풍경이 자기 속에 품고 있던 다른 세계, 잠재적인 세계, 가능한 세계를 열어서 보여주는 것인데, 그렇게 나는 평소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고, 듣지 못한 것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작가는 단단한 돌의 표면 질감에서 부드러운 물결을 본다. 흐르는 물처럼, 흐르는 바람처럼, 흐르는 시간처럼, 흐르는 물살(그러므로 물의 몸 혹은 살결)을 본다. 내가 풍경이 된다고 했다. 내가 풍경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풍경과 함께, 흐르는 나를 본다. 


젖은 자와 마른 길, 혹은 젖은 자와 마른 길이 순환하는. 작가는 첫 개인전을 <젖은 자>(2018, 스페이스 9)라고 불렀고, 두 번째 개인전을 <마른 길>(2019, 가창 창작스튜디오)이라고 명명했다. 

그중 젖은 자라는 제목이 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자와 컴퍼스, 그리고 숫자를 조합하는 사각형 형태의 마방진과 같은 사물들 혹은 측량 도구들이 어지러운 가운데 턱을 괸 천사가 우수에 젖은 채 앉아있다. 컴퍼스로 세계를 재는 신을 그린 윌리엄 블레이크의 <건축가로서의 신>과도 비교되는 이 그림을 뒤러는 멜랑콜리아 그러므로 우울이라고 불렀다. 예술가의 알레고리 그러므로 예술가의 초상으로도 알려진 그림이다. 

그런데, 왜 뒤러는 이 그림을 우울이라고 명명했을까. 당시에는 원소 그러므로 물질의 종류와 함량 여부에 따라 사람의 성향과 기질을 진단하는 체질의학(동양에서의 사상의학)이 유행했다. 뒤러는 아마도 예술가란 태생적으로 습기가 많은 사람, 젖은 자, 그러므로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우울한 것은 세계를 재는 사람, 세계를 측량하는 사람, 그러므로 세계를 짓는 사람에 연유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런 예술가에 대한 뒤러의 정의에 끌렸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공감했다기보다는, 반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저절로 체득된 사실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젖은 자를 건너 마른 길로 넘어간다. 그 과정에 몸이 매개된다. 젖은 자의 몸에서 점차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마침내 몸은 건조해지고 퍼석해진다. 우울한 기질이 휘발되면서, 존재의 기질이 산화하면서 다른 거소 그러므로 다른 몸을 찾아 이행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이행하는 기질이 주름 그러므로 결 위에 정박한다. 여기서 주름 그러므로 결은 한때 수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모든 존재는 결을 가지고 있다. 나뭇결이 그렇고, 바람결이 그렇고, 물결이 그렇고, 빛살이 그렇고, 살결이 그렇고, 마음결이 그렇다. 그렇게 건조해지고 퍼석해진 결들이 부재 하는 수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부재가 존재를 증명한다. 단단한 돌 표면에 새겨진 주름이 흐르는 물결을 증명한다. 흐르는 물결이 돌 표면의 주름을 만들었고, 그러므로 돌 표면의 주름은 흐르는 물결의 화석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존재는) 젖은 자에서 마른 길로 건너간다. 마른 길이 부재 하는 젖은 자를 증명하면서, 그러므로 우울한 기질을 소환하면서 젖은 자와 마른 길이 순환한다. 젖은 자는 마른 길을 예비하고, 마른 길은 젖은 자를 환기하면서 밑도 끝도 없이 순환한다. 


죽은 새와 함께 사라진 것들. 일전에 죽은 새를 본 적이 있다. 차에 치여 죽은 듯 도로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름다웠다. 평소 멀찌감치서 지켜보던 새의 자태를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알아볼 수 있었다. 역설이었다. 아마도 죽은 새의 찬란한 자태는 곧 퇴색될 것이었다. 

작가는 그렇게 새를 그렸다. 최소한의 흔적만 남은, 거의 기호를 방불케 하는, 죽은 새를 그렸다. 죽는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새는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죽음과 함께 현실이 될 수도 있었을, 가능한 시간도 사라진다. 허공을 가르며 공기 질을 바꿔놓을 가능성이 사라지고, 누군가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가능성이 사라지고, 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로해 줄 가능성이 사라지고, 누군가에게는 자유 영혼을 일깨워줄 가능성이 사라지고, 시인에게 시상을 줄 가능성의 시간이 사라진다. 새의 죽음과 함께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올 수도 있었을 가능성의 시간이, 사건이, 변화가, 필연이 되었을 우연이, 바람이, 공기가, 위로가, 시대가, 혁명이 사라진다. 그렇게 새는 죽으면서 파토스를 남긴다. 새 그러므로 존재는 죽어서 부재로 건너간다. 존재의 죽음 그러므로 부재 하는 존재는 죽으면서 존재에게 자기의 존재를 내어준다. 그렇게 부재는 있다. 부재는 존재한다. 부재가 곧 존재다. 작가가 죽은 새를 그린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흙탕과 흙물. 작가는 세 번째 개인전을 <흙탕>이라고 불렀다. 그림 하나하나 제목은 <흙물>이었다. 혼탁한 물? 흙물이 섞여 흙탕을 이루는 물? 흙 그러므로 땅을 향해 흐르는 물? 이질적인 것들이 한 길로 흘러드는 물? 세상의 모든 존재가 경계와 차이를 잃고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며 하나로 흐르는 물? 흐르는 물처럼 흐르는 존재를 자각하는 물? 

여기서 작가는 다시 흐르는 물 그러므로 젖은 자를 소환한다. 아니면, 마른 길에서 젖은 자로 재차 순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흙물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단단한 돌의 표면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그림은 돌의 표면 질감도 같고, 땅의 표면 질감도 같고, 나무껍질도 같고, 클로즈업한 피부의 표면 질감도 같고, 그리고 흐르는 물결(그러므로 물의 질감)도 같다. 작가는 돌의 질감에서 수분이 빠져나가 메마른 신체를 보고, 흐르는 물을 보았다고 했다. 아마도 흐르는 존재를 보았다고 해도 좋다. 돌의 질감 그러므로 마른 길에서 흐르는 물결 그러므로 젖은 자를 보았다고 해도 좋다. 돌의 질감을 만들어준, 그러므로 돌의 원인인 물을 보았다고 해도 좋다. 땅의 원인을, 나무의 원인을, 몸의 원인을, 그러므로 존재의 원인을 보았다고 해도 좋다. 흐르는 땅을, 흐르는 나무를, 흐르는 몸을, 그러므로 순환하면서 흐르는 존재를 보았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근작은 (여전히) 젖은 자와 마른 길이 순환하는 카테고리 속에서 맴을 도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 그 카테고리를 파고들면서 깊이를 만들지, 아니면 카테고리 밖에 또 다른 거소 그러므로 의미의 집을 지을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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