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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면의 세계화/ 내면의 외화, 자기를 찾아서

고충환



한국, 내면의 세계화/ 내면의 외화, 자기를 찾아서


고충환 | 미술평론가


한국, 내면의 세계화란 주제는 몇 가지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K컬처에 힘입은 K 미술의 세계진출을 겨냥한 것이 그중 하나라면, 한국성, 한국적 이미지,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과 같은, 그 자체 한국인의 내면 인격을 형성시켜준 것들이라고 해도 좋을 로컬리티를 매개로 글로벌리즘을 꿈꾸는, 소위 글로컬리즘을 지향하는 것이 그 또 다른 의미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다분히 선언적 의미가 강한 편이라고 해도 좋다. 반면, 예술의 근본과 존재 이유에 천착한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고, 바로 그 또 다른 제3의 의미가 주목된다. 내면의 세계화를 내면의 외화로, 내적 표현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읽을 때가 그렇다. 

내면의 세계화란 말을 풀어 쓰면 내면의 외화가 되고, 내면의 외화는 내면과 세계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 말이, 그 관계가, 그 전제가 하이데거의 대지와 세계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이데거는 진리를 과학적 진리와 예술적 진리로 구분했다.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 논증 가능한 진리가 과학적 진리라고 한다면,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진리, 처음부터 증명의 대상이 아닌 만큼 실제로도 증명 불가능한 진리가 예술적 진리다. 예술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가 간과하거나 접근 불가능한 진리를 파고든다. 그러므로 예술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보다 더 깊고 본질적이다. 

바로 이런, 예술적 진리를 풀어쓰는 과정에,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을 밝히는 과정에 대지와 세계의 변증법이 나온다. 대지는 은폐를 본질로 하고, 세계는 비은폐를 본질로 한다. 대지는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자기 내부에 진리를 은폐하고 있지만, 세계화(외화)를 통해 그것이 바깥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한, 누구도 진리를 알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세계화를 통해 드러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다만, 한때 진리였음을 증명하는 진리의 형해일 뿐. 한때 진리가 존재했었음을 증거 하는 진리의 흔적일 뿐. 그러므로 가능한 한 진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진리 그대로를 보존하면서 진리를 드러내는 일, 그러므로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획이었다고 해도 좋을, 다시 그러므로 역설적인 기획이 과제로서 주어진다. 

이처럼 진리의 형해임을 인정하면서, 진리의 흔적임을 감수하면서, 그러므로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획임을 예감하면서, 그럼에도 진리에 천착하는 일에 예술의 태생적 비극이 있고 숭고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그 형해를, 그 흔적을 제안하는 작가들이 있다. 저마다 품고 있을 내면의 비극을 예감하고, 숭고를 실천하는 작가들이라고 해도 좋다. 

강용석의 입체작업은 재료와 기법이 세라믹이지, 실제로는 도조 그러므로 조각에 가깝다. 작업 전반에 인간과 자기의 존재 이유를 묻는 자기반성적 사유가 깊은 편이다. <소외된 자아들>이 그런데, 하나의 주형으로 떠낸 같은 형태의 사람들이 군상을 이루고 있다. 저마다 차이 나는, 기형의 얼굴을 한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익명(그러므로 군중) 속에서 개성을 잃고 얼굴을 잃은, 자기를 상실한 현대인의 초상으로 볼 수도 있겠고, 복제된 자기와 더불어 분열을 앓는 소외된 자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복제되고 분열된 자기는 또 다른 작업 <속박>에서 파편화된 자기에 대한 자의식으로 나타난다. 파편화된 자기, 분열된 자기, 소외된 자기의 자의식이 자기를 속박하고 있는 것인데, 작가 개인의 자의식을 넘어 현대인의 자의식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그렇다면 존재론적이라고 해도 좋고 비극적이라고 해도 좋을 그 자의식의 원인은 무엇인가. 작가의 또 다른 작업 <사물 유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작가가 부제로 적어놓은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욕망이 그렇다. 불교에서는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결국 욕망도 고통도 인간의 본성이라는 답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 본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라는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사물 유희는 아마도 그 질문(그러므로 욕망)에 대한 형식실험을 다루고 있을 것이다. 세라믹으로 만든 입체 조형과 함께 실물 오브제를 도입해 입체를 넘어 설치로, 조형을 넘어 일상(삶의 현장)으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도 주목해볼 일이다. 


문미원의 평면작업은 표현주의가 강하고 상징주의가 강하다. 주지하다시피 표현주의는 작가의 세계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고, 있는 그대로 전달되는 편이다. 세계감정과 자기감정이 동일시되는 편이라고 해야 할까. 세계감정과 자기가 서로 투명하게 반영하고 반영되는, 마치 마주 보는 거울 같다고나 해야 할까. 그리고 상징주의는 문학성이 강하고, 알 수 없는 세계를 추상적인 기호로, 어떤 의미를 함축한 의미 세계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작가에게 미증유의 세계는 드러나거나 감춘 의미 세계가 된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세계는 무슨 의미를 드러내고 감추는가. 그러므로 작가에게 세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작가의 세계감정은 암울하다(까만 세상). 그림에서 작가는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데, 세상에 대한 자발적인 무지를, 그리고 세상을 향한 두려움을 상징할 수 있다. 작가의 세계감정은 낯설다(누구길래). 작가에게 세계는 곧 타자를 의미하고, 그 타자를 작가는 알 수가 없다. 작가의 세계감정은 양가적이다. 작가가 보기에 세계란 타자는 알 수 없는 낯선 대상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지의 영역이 설레게 만드는, 그리운 대상이기도 하다(그리움의 시간, 그리워하다가, 어려운 일). 작가가 앓는 이런 세상과의 불화,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양가감정은 사실은 우리 모두 앓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이은미의 평면작업 역시 그 결은 좀 다르지만, 표현주의와 상징주의가 강하게 어필되는 편이다. 보통 사람들(특히 표현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가들)의 삶의 방식이 그렇듯 작가의 생활감정 역시 낯선 그리고 알 수 없는 세계와의 불화에 토대를 두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자기에서 비롯된 일상성이 강한(그러므로 생활일기라고 해도 좋을) 편인데, 이런 일상적인 자기감정으로 알 수 없는 세계를 의미 세계로 환원하는 과정을 통해서 불화하는 세계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작업은 원시림으로의 도피, 추억으로의 도피, 미지의 세계로의 도피와 같은,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가 지어낸 환상세계로의 도피를 통해 불화하는 세계와의 화해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형식실험의 장이 된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주목되는 것이 뒷모습이다.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지만, 작가의 그림에는 유독 뒷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많다. 그림에 등장하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그림을 확장한다. 그림 밖에서 그림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림 안쪽을 쳐다보는 그림 속 인물의 시선을 동일선상에 놓는다. 그렇게 시선을 일치시키고, 심리를 일치시킨다. 그렇게 그림 밖에 있는 사람을 그림의 한 부분으로 동참시켜, 마치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준다. 심리적 동일시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미셸 투르니에는 <뒷모습>에서 이런 심리적 동화 현상이 뒷모습일 때 더 강화된다고 했다. 알 수 없어서 오히려 더 호기심을 자아내고, 연민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전봉열의 추상 평면작업은 색면화파의 변주 혹은 재해석을 보는 것 같다. 사실은 바다를 추상화하고 평면화한 그림이다. 화면 안쪽에 보이는 수평선을 경계로 그 위에 하늘을 그리고 그 밑쪽으로 바다를 위치해놓은, 하늘과 바다가 접해있는 경계 주변으로 희붐한 빛의 기미가 설핏 보이는, 빛의 존재를 질감으로 증명이라도 하듯 수면에 물비늘이 아롱거리는, 때로 모래사장에 밀려오고 밀려가면서 남긴 파도의 흔적이 여실한 그림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는 추상화라고 할 수도 없다. 감각적 현실을 모티브로 한 구상적 사실을 추상화한 그림, 그러므로 어쩌면 구상과 추상, 형상과 추상, 감각적 현실과 회화적 사실 사이에 있는 그림, 그러므로 경계 위의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추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구상 속에, 감각적 현실 속에 이미 한 부분으로 포함돼 있었던 추상적 계기를 캐내고 발굴하는 과정을 예시해주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바다 그림은 수평선이 깊고, 아득하고, 멀다. 세상이 멈춘 듯 정적이어서 더 깊고, 더 아득하고, 더 멀다. 그렇게 깊고, 아득하고, 먼 수평선이, 바다가, 정경이 깊고, 아득하고, 먼 존재를, 또 다른 세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누구든 한 번쯤 들었었을 깊고, 아득하고, 먼 사념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렇게 생각이 깊어지고, 아득해지고, 멀어지는 경계 위에, 경계가 지워지는 경계 위에, 그러므로 경계마저 없는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착시가 아니라면, 실제로 수평선은 없다). 


최용대의 추상 평면작업은 추상표현주의를 상기시키고, 후기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고, 단색화의 변주와 자기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익명성과는 비교되는 우연하고 무분별한, 개성적이고 감각적인 붓질이 그렇고, 색채의 절제가 내면적이고 관조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그렇다. 

지금까지 작가는 숲을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숲을 떠나기로 했다. 이제부터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로 했고, 내적인 언어를 그림 위로 옮겨 적기로 했다. 비록 회화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싶다고 했고,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했고, 자기를 찾고 싶다고 했고, 자신의 타자성을 발견하고 싶어서라고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숲을 그릴 때부터 진즉에 어느 정도 예시된 행보며 과정이라고 해도 좋고, 그러므로 전작과의 단절로 보기보다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해도 좋고, 그러므로 어쩌면 전작에서의 주제 의식이 심화하고 확장되는 분기점이며 계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전작에서의 숲이 감각적 실재로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작가의 내면이 반영된 상징적인 숲이며, 알레고리가 강한 숲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향후 작가의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를 자기만의 회화적 언어로 받아 적는 작가의 그림이 어떻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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