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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철/ 욕망과 기억으로 흐르는 의미, 그리고 어쩌면 존재

고충환



신상철/ 욕망과 기억으로 흐르는 의미, 그리고 어쩌면 존재 


고충환 | 미술평론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 

한글은 나의 모든 기억의 집합체이다. (작가 노트)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그의 인격을 결정한다는 말일 것이다. 언어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라고도 했다. 우리 모두 이미 특정 언어로 구조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 특정 언어를 매개로 축조된 상징체계 속으로, 특정 언어를 도구로 구축된 가치관과 세계관 속으로 던져진다. 그 상징체계로부터, 그 가치관과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 세계의 지배적인 언어체계가 논리와 개념이다. 그리고 언어 용법이 상식과 합리, 도덕과 윤리다. 롤랑 바르트라면 독사(doxa), 그러므로 당대적인 지배 계급의 언어 용법, 다시, 그러므로 부르주아의 언어 용법이라고 했을 것이다. 미셸 푸코의 에피스테메도,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도 당대의 지배적인 지식체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그 결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예술의 특수성이 있다. 언어에 대한 이중적인 관계에 있는 것인데, 언어를 도구로 언어의 틀을 깨는 것(사무엘 베케트), 닫힌 의미체계를 열어놓는 것(움베르토 에코), 의미의 바깥에 의미를 세우는 것에(모리스 블랑쇼) 예술의 딜레마가 있고 아이러니가 있다. 언어를 매개로 언어를 다시 쓰고 고쳐 쓰는, 언어, 그러므로 의미의 새로운 용법을 형식 실험하고 실천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예술이란 언어에 대한 이런 이중적인 관계를 매개로 언어의, 의미의 용법을 갱신하는 일일 수 있다.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 3D 프린트와 레이저 커팅, 그리고 여기에 물(우연적인, 그러므로 비결정적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언어와 의미의 용법에 대한 형식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작가 신상철의 작업이 그 일과 관련이 깊다. 


오랫동안 작가는 한글의 자모, 그러므로 자음과 모음을 모티브로 작업해왔다. 주지하다시피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글꼴을 만들고 그 글꼴로 의미를 전달하는 의미체가 된다. 그 글꼴을 통하지 않고서 사람들은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 욕망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다. 작가의 그림은 주제 면에서 욕망에서 기억으로 갈아타는데, 욕망도 기억도 글꼴 그러므로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고 연속성이 있다. 주제 의식이 심화 확장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세상과 동떨어진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고립된 삶의 방식이 아니라면, 글꼴 그러므로 언어는 존재가 성립 가능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해도 좋고, 존재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가 한글 자모의 임의적인 조합과 해체에 천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글 자모는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이 시작되고 끝나는 최소 단위 원소 그러므로 모나드라고 해도 좋다. 이 단위 원소를 축조하는 방식으로 형상을 그리고(회화) 만드는데(조각과 저부조 입체), 하나같이 글꼴로 이루어진 형상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즉자적으로, 문자 그대로 옮겨놓은 형상이다. 그렇게 세종대왕을, 모나리자를, 링컨을, 자유의 여신상을, 이순신 장군을, 피에타를, 반 고흐의 초상을, BTS와 존 레넌 같은 유명인의 초상을 그리고 만든다. 작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사회적으로도 영웅에 해당하는 캐릭터들이라고 했다. 

때로 상반되는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 속에 병치하기도 하는데, 알만한 초상과 일상적인 오브제를 생경한, 낯 설은, 이질적인 실루엣 형태의 그림자와 대비시킨다. 여기서 그림자는 아마도 억압된 욕망을, 무의식을,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의 희미한 실체를 의미할 것이다. 반가사유상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형태의 그림자와 대비되는,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반가사유상 형태의 그림자와 대비되는 그림도 있는데, 각 동서양의 사유의 전형적인 아이콘이 서로 반추하고 반영하는 것도 같다. 실물과 대비되는 그림자를 통해 잠재적인 의미, 억압적인 의미, 의외의 의미를 덧붙이는, 그렇게 의미를 확장하는, 그림자의 또 다른 용법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한글 자모를 축조해 형상을 그리고 만들다가, 마침내 한글 자모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아마도 자연스러운 순서이며 이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면면을 보면, 파라핀을 재료로 한글 자모를 떠내고, 그렇게 떠낸 한글 자모를 화면에 작위적으로 그리고 무작위적으로 배열한다. 그리고 열을 가하면, 파라핀 소재의 한글 자모가 허물어지고 녹아내린다. 그렇게 한글 자모의 형태를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형태와 글자가 녹아내려 알아볼 수 없는 형태, 그러므로 어쩌면 최초 자모의 흔적, 다시, 그러므로 최초 말하고 싶었던 언어와 의미와 말들의 희미한 흔적이 어우러진, 경계도 없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는 조형이 남는다. 

여기에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애써 만든 한글 자모를 허물어지게 하고 녹아내리게 하는가. 혹 의미가 사라지게 하고 싶고 지워지게 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사라지는 의미, 희미해진 의미, 다만 흐릿한 흔적으로만 남은 의미, 의미의 희미한 그림자, 의미의 형해, 지금은 사라진, 한때 존재했었을 부재 하는 의미에 대한 최소한의 존재 증명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작가는 비록 계획적이고 결정적인 지금까지의 작업 방식에서 탈피해, 좀 더 우연성을 인정하고 열어놓는 작업 방식으로의 전환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의미의 재고가, 의미의 회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의미로 재생되는 기억에 대한 재고가, 기억에 대한 회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근작에서의 아이스 페인팅으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파라핀 대신 물이고 얼음이다. 한글 자모 형태의 틀에 물을 부어 얼린 얼음 자모를 화면에 작위적으로 그리고 무작위적으로 배열한다. 무슨 문이라고 되는 양 화면의 가장자리 안쪽 선을 따라 배열하기도 하고(기억의 문), 화면의 위쪽 가장자리 선을 따라 배열하기도 하고, 정형 비정형의 원형으로 배열하기도 하고, 아예 무작위적으로 배열하거나 한다. 그리고 그렇게 배열된 한글 자모가 만든 형태가 시간이 지나면서 녹아내린다. 파라핀 작업에서는 그나마 최초 자모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형태가 더러 남아있었지만, 얼음 작업에서는 그런, 최소한의 형태마저 없다. 다만 우연하고 무분별한 비정형의 얼룩이 있을 뿐. 얼룩들 상호 간 스밈과 배임이 있을 뿐. 

우연이 만든 그림이고, 우연이 그린 그림이다. 자모에서 얼룩으로, 의미에서 흔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프로세스아트로 볼 여지도 있다. 그렇게 다만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만 남은 우연하고 무분별한 화면에서 실재는 사라지고 흔적 그러므로 실재의 흔적만 남는다. 실재? 자모를 의미의 실재라고 볼 수 있을까. 혹 자모는, 자모가 가리키는 의미는 애초에 다만 실재의 표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 자체 실재를 개념 규정한 개념적 실재이며 관념적 실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진정한 실재, 참 실재, 최초의 실재, 실재 자체는 무엇인가.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사라졌는가. 사라진 무엇이 있어서 원래 있었을 의미를, 기억을, 존재를 증명하는가. 

그렇게 아이스 페인팅 작업은 흔적을 매개로 실재와 개념 간 상관관계를 묻는다. 이런 의미론적인 물음과 함께, 녹아내리는, 사라지는, 그러므로 덧없는 의미에 대한, 기억에 대한,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작가의 자기반성적인 성찰이 이 작업으로 이끌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자화상이 있다. 최소한의 가장자리 선으로 남은 실루엣이 아니라면, 사람 형상임을 알아보기 어려운 형상이다. 한글 자모를 소재로 했다고는 하나, 자모의 형태가 남아있지 않은, 그렇게 자모가, 말이, 의미가 무색해지는 형상이다. 다만 우연하고 무분별한 얼룩들이 비정형의 형상을 만들면서 서로 충돌하고 부침하는 밑도 끝도 없는 운동성이, 그러므로 활성으로 움직이는, 들떠있는, 고요한, 정적인, 내면적인 형상이 존재를 규정할 수 없는 자, 그러므로 무규정자로 규정해놓고 있는 것 같다. 다의적인 존재, 다층적인 존재, 다성적인 존재로 규정해놓고 있는 것도 같다. 

진즉에 랭보는, 나는 타자라고 했다. 미하일 바흐친은 하나의 주체 속에 이질적인 목소리가, 다른 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우연하고 무분별한 타자들의 집합을, 그런 집합체로서의 주체를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주체란, 흐르는 물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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