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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정/ 풍경과 상처, 구멍이 있는

고충환




안하정/ 풍경과 상처, 구멍이 있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구멍이 있는 풍경, 작가라면 o가 있는 풍경이라고 했을. 우연하고 무분별한 붓질이 비정형의 얼룩을 만드는, 그리고 그 얼룩들이 모여 미증유의 알 수 없는 풍경을 만드는, 그렇게 낯설지만,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빗물에 씻기고 시간에 풍화된 몽유도원도를 보는 것도 같은, 그러므로 신 몽유도원도라고 해도 좋을, 그렇게 꿈과 현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같은, 그렇게 경계 위의 풍경 그러므로 양가적인 풍경을 보는 것 같은, 그런, 풍경이 있다. 

그 풍경 위로 칠흑 같은(더러 칠흑 같지는 않지만, 무중력의 중성적인 공간에 떠 있는) 구멍이 있다. 지하세계로 연결된 통로인가. 작가의 내면세계로 인도하는 관문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로 연이어진 입구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작가의 말대로 그저 영문자 o인가. 그런데, 왜 칠흑인가.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뜻인가. 심연인가. 침묵인가. 슬픔인가. 미증유의 알 수 없는 세계에 입문하기 전, 두려움과 설렘인가. 존재가 들고(블랙홀) 나는(화이트홀) 우주의 구멍(그러므로 우주의 섭리)인가. 

그 칠흑 같은 구멍 위로 흐릿한, 칠흑 같은 구멍의 흔적 같기도 하고 실루엣 같기도 한, 또 다른 구멍들이 포개져 있다. 또 다른 세계로 열린, 또 다른 관문이고 구멍들인가. 존재는 하나의 시공간을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 다른 시공간을 산다는 의미인가. 그러므로 다중세계 혹은 평행세계의 겹 구조를 그리고, 주름 구조를 그려놓은 것인가. 그 풍경 위로 실낱같은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에 놀란 새들이 점점이 날아오른다. 작가 자신의 내면을 외화 한, 그러므로 내면 풍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호수가 있는, 사막이 있는, 동굴이 있는 풍경. 호순가. 사막인가. 동굴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처음부터 호수와 같은, 사막과 같은, 동굴과 같은 감각적 실재를 의식하고 그린 그림일 수도 있겠고, 그려놓은 그림이 사후적으로 감각적 실재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일 수도 있다. 그 선후 과정을 따지는 것이 불분명하고 무의미한, 그런 유의 그림이다. 정색하고 호수를 그린 것인지, 사막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동굴을 그린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그런 유의 그림이다. 적어도 실경 스케치나 사진과 같은 보조 수단을 참고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설령 감각적 실재를 참조했다 해도,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형태가 찾아지는, 그리고 그렇게 찾아진 형태가 사후적으로 알만한 형상을, 감각적 대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것도 우연적으로만 그렇게 만드는, 그러므로 감각적 실재는 다만 작가가 그림을 시작하는 최소한의 동기며 계기에 머물 뿐인, 그렇게 일단 시작하고 나면 회화의 내적 필연성이 과정을 견인하면서 마침내 자기를 실현한,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러므로 어쩌면 몸 그림(추상표현주의와 액션페인팅)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리고 그 이면에 작가의 개인적인 서사가 녹여져 유기적인 전체를 일군, 그런 유의 그림이다. 

여하튼 이미지는 어떤 대상을 떠올리기 마련인 것이고(심지어 하나의 무의미한 얼룩이나 점에서마저 우주를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사람들 저마다 다른 인문학적 배경과 관심사에 따라서 다른 대상을 떠올려도 무방한, 그렇게 열린, 비결정적이면서 어떤 혹은 다른 임의의 대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가의 그림에서는 호수와 사막과 동굴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유의 그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호수가, 사막이, 그리고 동굴이 보이는가. 

세잔은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풍경의 의식을 그린다고 했다(의식은 화가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풍경의 의식과 화가의 의식이 상호 교환되는 과정이라고, 그렇게 주와 객을 구분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선언한 것에, 그리고 그 선언으로 현상학을 예비한 것에 세잔의 혁명이 있다). 다시,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호수의, 사막의, 그리고 동굴의, 그러므로 풍경의 의식이 보이는가. 

호숫가에 한 사람이 서 있고, 나무가 서 있다. 호수는 무의식을 상징하고(프로이트), 타자를 상징한다(보르헤스). 의식의 지향호를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메를로 퐁티). 거울 같은 호수가 자기를 비추고, 타자(자기_타자)를 비춘다. 구름을 비추고, 나무를 비춘다. 나문지 분명치 않은 나무가 연기 같다. 물에 비친 구름, 그러므로 실제로는 그림 속에 없는 구름이 연기 같은 나무와 나란히 있다. 구름은 정해진 형태가 없고 정해진 색깔이 없어서 결정적인 형태와 색깔로 붙잡을 수가 없다. 여기에 나무가 연기처럼 흔들린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은 흩어지고, 흔들리는 것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붙잡을 수 없는 것은 덧없다. 그리고 어쩌면 흔들리는 것도. 작가는 그렇게 거울 같은 호수 앞에 서서, 어쩌면, 붙잡을 수 없는, 흔들리는, 흩어지는, 그리고 마침내 사라지는 자기(그러므로 자기_타자)와 대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에 동굴이 있다. 시선으로 치자면 동굴 안쪽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형국이다. 멀리 희미한 산허리가 보이고, 그 위로 먹구름을 머금은 하늘이 보인다. 하늘과 산허리가 맞닿은 곳에 희붐한 빛의 기미도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시커먼 연기 덩어리가 피어오른다. 어쩌면 동굴 자체가 이미 또 다른 연기 덩어리일 수도 있겠고, 사실은 그렇게 연기 덩어리 안쪽에 난 구멍을 통해 바깥쪽을 내다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커먼, 칠흑 같은 구멍의 변주인가. 기하학적 형태에서 유기적인 형태로 갈아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에서 실질적이고 감각적인 형태로 옮아온. 동굴은 무지를 상징하고(플라톤), 미지의 세상을 앞둔 사춘기 소녀의 두려움과 설렘을 상징하고,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통과의례를 앓는 우리 모두의 심상적 이미지를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에 사막이 있다. 모래바람이 이는 뒤편으로 하늘의 귀퉁이가 설핏 보이는, 마구 흩뿌려진 물감이 흘러내리다 맺힌 실낱같은 자국이 사막식물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그림을 덧붙이자면, 사막에 있어야 마땅할, 사막에 있을 법한, 허옇게 탈색된 뼈들이 사막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황량한 풍경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실재계를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에 비유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함부로 열어서는 안 될 생산의 종착지에 비유했다. 어쩌면 아무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될, 섣부른 호기심으로 들여다보아서는 안 될, 칠흑 같은 구멍의 또 다른 버전인지도 모를 일이다. 


풍경을 넘어서. 풍경은 자연과 다르다. 있는 그대로가 자연이라면, 풍경은 자연을 개념화한 것 그러므로 개념화된(어쩌면 인간화된, 그러므로 인간 중심의, 인간을 제하는 순간, 바로 미지의 영역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자연이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어쩌면 자연을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내 쪽에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것이 있고, 자연에서 나에게로 건너오는 것이 있다. 그렇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심상 이미지를 만들고, 풍경을 만든다. 그러므로 자연은 하나이지만, 풍경은 사람들 저마다 다 다르고, 그 다른 풍경이 나의 풍경, 그러므로 내가 본 풍경에 부합할 때, 그 풍경(그리고 그 풍경을 그린 그림)은 감동을 주고 공감을 얻는다. 어쩌면 세잔이 말한, 풍경의 의식이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가 매개되면서 자연은 풍경이 된다. 풍경이 되면서 심상 이미지를 만들고, 작가를 만든다. 작가의 심성을 만들고, 작가의 감각을 만들고, 작가의 감수성을 만들고,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킨다. 그 제조과정에 무슨 일이 있는가. 의식의 흐름 기법이(마르셀 프루스트) 있고, 자동기술법과 자유연상 기법이(초현실주의) 있다. 

적어도 작가 같은 유의 그림은 사전에 전제하고 그리는 그림도, 전제한 대로 그려지는 그림도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길항하는, 우연과 필연이 부침하는, 하나의 색깔이 다른 색깔을 부르고, 하나의 우연한(다만 암시적인) 형태가 다른 필연적인(좀 더 결정적인) 형태를 부르는, 숨 막히는 상호작용 속에서 (아마도 최종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색깔이 찾아지고 형태가 드러나는, 그리고 그 색깔과 형태가 사후적으로 어떤 대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유의 그림이다. 삶이 꼭 그렇지 않은가. 삶의 생리가 그렇고, 삶의 생태학이 꼭 그렇다고 해도 좋지 않은가. 그렇게 어쩌면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 그러므로 사실은 자신의 바이오리듬(그러므로 삶의 생리)을 따라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만의 풍경(어쩌면 심상 이미지라고 해도 좋을)을 제조하고 있었고, 그 풍경이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마치 내 마음처럼 황량한 풍경을 떠올려도 좋고, 쓸쓸한 풍경을 떠올려도 좋고,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풍경을 떠올려도 좋고, 세계가 격변하는(비록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해도) 풍경을 떠올려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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