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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옥, 사이를 통해 사이를 보다

고충환



양향옥, 사이를 통해 사이를 보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만개한, 혹은 다소곳한 꽃잎을 보는 것 같은. 호수에 핀 연잎을 보는 것 같은. 물 위에 떠가는 나뭇잎을 보는 것 같은. 대기에 아롱거리는 빛 알갱이를 보는 것 같은. 수면에 일렁이는, 수면과 빛 알갱이가 서로 희롱하고 유희하는 물비늘을 보는 것 같은. 청정한 물속 자갈을 보는 것 같은. 투명한 깊이를 내장한, 파르스름한 기운으로 동터 오는 먼 산을 보는 것 같은. 노을을 보는 것 같은. 청정한 기운이 느껴지는. 흔적으로 남아있는, 낡고 해진 벽면 장식을 보는 것 같은. 한적한, 그리고 외진 정원을 거니는 것 같은. 때로 창문을 통해 본 듯 창틀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는 것도 같은. 

00 같은? 작가 양향옥의 그림은, 그저 그림이라기보다는 그리고, 그저 그리기보다는 채색을 올리고, 한지를 오려 붙여 만든(엄밀하게는 하나하나 손으로 뜯어 붙여 만든) 그림은, 그러므로 채색과 한지가 중첩되면서 은은한 밑 색이 배 나오는 그림은, 다시 그러므로 일종의 콜라주 회화라고 불러도 좋은 그림이 암시적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암시하는 것이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논리가 세계를 개념화한다면, 예술은 세계를 암시한다. 논리가 세계를 한정하면서 지시한다면, 예술은 세계를 열어놓으면서 지시한다. 열면서 지시하는 것, 열린 채로 지시하는 것, 그렇게 열린 사이로 다른 것이(그러므로 타자가) 드나들게 하는 것, 다시 그렇게 열면서, 다른 것과 어우러지면서(그러므로 은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은유와 더불어서) 또 다른 세계를 열어놓는 것이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역설이 있다. 대지는 진리를 은폐하고, 세계는 진리를 드러낸다. 대지가 진리를 은폐하고 있는 한 누구도 진리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세계 위로 드러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다만 죽은 진리의 형해일 뿐. 한때 진리였음을 증명하는 흔적일 뿐. 그러니, 진리를 전혀 훼손하지 않으면서, 진리 그대로를 보존하면서 진리를 드러내는 것, 그러므로 진리를 지시하는 것이 과제로서 주어진다. 하이데거의 역설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여기서 단서로 주어지는 것이 흔적이다. 진리의 흔적이다. 흔적을 통해 진리를 지시하는 것, 그러므로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흔적과 암시는, 흔적을 통한 암시는 예술이 세계가 품고 있는 진리라는 광석을 캐내는 방법이 된다. 사물의, 풍경의, 세계의, 존재의 원형적인 이미지에 가닿는 방법이 된다. 그렇게 또 다른 세계를 여는 방법이 된다. 다시, 하이데거에 의하면 한 세계를 여는 것, 한 세계가 열리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 그렇게 열리는 세계는 전에 없던 세계, 다른 세계라기보다는 세계가 이미 함축하고 있었던 세계, 그러므로 대지가 은폐하고 있었던 세계가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여는 행위는 원래 닫혀 있던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세계의 다른 층위를, 다른 결을 드러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질 들뢰즈라면, 주름을 펴 보인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흔적과 암시를 통해서, 흔적을 통한 암시를 통해서 세계의 다른 층위를 드러내고, 주름 속에 숨은 세계의 다른 결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좋다. 


작가는 한지를 올리고 채색을 올리는 반복과정을 통해서 층을 쌓아나간다. 그렇게 그림 밑에 그림이 그림 위로 배어나게 만들고, 색상 밑에 색상이 색상 위로 스며들게 만든다. 한지가 색상을 먹고, 색상이 한지에 스며든다. 배임과 스밈이 교환되는 과정을 통해 한지와 색층이 구분되지 않는,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 그 과정은 수도 없이 반복되는데(질 들뢰즈의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 원하는 색감과 질감, 형태와 분위기를 얻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렇다면 그 지점, 감각의 정점이라고 불러도 좋을, 바로 그 지점을 어떻게 아는가. 어쩌면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강한 편인, 감각적인 유의 그림에서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지점에 대해서는 다만 작가가 알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작가에게도 여전히 막연한 부분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여하튼 그 지점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고, 그 과정에서 어떤 내적 울림이 있는지, 감각을 흔들어놓는 부분이 있는지, 투명한 깊이가 있어서 아득하고 먼 느낌을 주는지, 다시 말해 파토스가 있는지를 통해 그 지점, 그러므로 감각의 정점을 추정해볼 수는 있다. 

그리고 여기에 알다시피 한지는 반투명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빛을 투과하고, 형태를 투과하고, 색상을 투과한다. 그렇게 한지로 색상을 덮으면 톤 다운되면서 색채가 차분해지고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한지 위에 한지를 쌓으면 한지가 머금는 빛의 총량이 조절되면서 마치 화면 내부로부터 은근히 배여 나오는 것 같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도 같은 우호적인 빛의 질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연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화면에 한지를 올리는 과정에서 한지가 찢어지고 구겨진 흔적이 여실한, 그렇게 구겨지고 찢어지면서 형태를 만들고 주름을 만들고 분위기를 만드는, 그렇게 한지와 채색이 서로 스며들고 배어나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그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그렇게 작가와 우연이 함께 그림을 그리고 만든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때로 미처 마르지 않은 젖은 상태에서 콜라주 한 한지의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밀어 올려세운다. 이로써 작가는 비록 그림이지만 손에 만져지는 물성을 강조하고 싶고,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인 효과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미세한 입체효과를 주고 싶고, 저부조 형식의 효과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감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그림의 깊이를 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방법론에 기계적으로(달리 말해 관성적으로) 얽매이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지만, 관념적인, 서사적인, 이념적인 그림이 아니기에,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감각적인 유의 그림이기에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도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흔적과 암시가 중요하다고 했고, 흔적을 통한 암시가 결정적이라고 했다. 감각적이면서 분위기가 강한 유의 그림이라고도 했다. 달리 말해 아우라가 강한 편이다. 발터 벤야민은 원래 아득하고 먼 것인데,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 아우라라고 했다. 원래 비가시적인 것이다. 원형적인 것이다. 내면적인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결국 자기 내면과의 대화에,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면에서 움직이는 감각에 기대는 것이 전부이며, 아니면 외면을 내면화하는 것이 전부이며, 그러므로 투명한 감각의 깊이 속에서 건져내고 길어 올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아득하고 먼 느낌이 드는가. 그러므로 작가의 내면이 느껴지는가. 


아파트 일색의 지금 주거환경은 그렇지도 않지만, 전통 한옥에서는 문이며 창문을 하나같이 창호 문으로 장식했다. 창호 문은 집안과 집 밖을 나누면서 통하게 한다.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구조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 경계 위의 생리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창호 문은 빛을 투과하고, 소리를 투과하고, 형상을 투과하고, 의식을 투과한다. 그러므로 집밖에 누가 왔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날씨가 어떤지, 상태가 어떤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 직접 집 밖에 나설 일이 없었다. 집안에서도 훤히 보이고, 들리고, 느끼고, 읽을 수가 있었다. 

사이를 통해서 사이를, 그러므로 관계를, 다시, 그러므로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를 본다고 해야 할까. 나와 세상을 나누면서 통하게 하는 거름망을 통해서, 그러므로 거름망이라는 의식의 장치를 통과해서 세상과 만났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작가는 그런 의식의 장치를 감각적 DNA로 물려받았고(의식이 감각이고, 감각이 곧 의식이다), 그 감각, 그 의식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우리 모두 물려받았을 것이지만, 혹 그동안 잊고 있었을지도 모를 그 의식, 그 감각, 그 미의식, 그 미적 감수성을 작가의 그림은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게 세상에 숨은 결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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