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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경란/ 플라뇌르, 근대 도시의 산책자

고충환




육경란/ 플라뇌르, 근대 도시의 산책자 


고충환 | 미술평론가


형식논리에 천착한, 형식요소에서 회화의 당위성을 찾는, 형식만으로 이미 회화로 치는 추상회화가 아니라면, 더욱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서사적이고 문학적인 그림에서라면 주제는 대개 작품의 핵심으로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함축하기도 하고,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을 암시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 육경란의 경우는 어떤가. 비밀의 정원에서 기억의 정원으로. 그동안 비밀에서 기억으로 옮겨갔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아마도 그동안 저 혼자 간직했을, 저 홀로 추억했을, 때로 남몰래 아파했을 기억의 편린들을 소환하고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일관성과 함께 연속성을 가지는 경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정원은 말할 것도 없이 작가의 내면이 투사된, 작가가 정성스레 가꾸고 보듬어온, 작가의 상상력이, 작가의 환상이, 작가의 현실 인식이 현실성을 얻는 장, 그러므로 내면의 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자기 내면을 그린 것이지만, 그렇게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을 그림으로 옮겨 그린 것이지만 그 경험과 감정이 보편적인 감정에 호소해온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는다. 그 경우와 정도가 다를 뿐, 사람들 저마다 간직하고 있을 기억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근대의 생활사와 관련한 추억을 건드리고, 상실감으로나 간직하고 있을 유년의 기억을 건드리고, 여기에 원형적 기억마저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 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근대 생활사의 기억을 넘어, 유년의 기억을 넘어, 아득한 기억, 그러므로 차라리 그리움이라고 해도 좋을 원형적 기억을 소환한다. 상실한 것들, 아련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그러므로 그리움의 색감과 질감을 불러오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 작가의 그림에는 비록 집과 같은, 거리와 같은, 도심의 변두리와 같은 알만한 정경이 보이지만, 그 자체를 그렸다기보다는 사실은 이를 구실 삼아 그리움의 색감과 질감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체 색깔도 형태도 없는 그리움을, 그리고 그리움이 향하고 있을 시간을 어떻게 그리는가. 암시다. 분위기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암시의 기술일 수 있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 가시를 통해 비가시를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암시가 그렇다면 분위기는 또한 어떤가. 
발터 벤야민은 분위기 그러므로 아우라를 원래 먼 것인데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감정이라고 했다. 먼 것, 아득한 것을 지금 여기에 소환하는 감정의 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벤야민은 새로운 모든 것이 빠르게 시간 속으로 흡수되면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변질되는 것이 사물의 운명이라고도 했다. 시간의 화석이 불러일으키는 향수의 색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신도시와 구도심이 공존하는 다공성의 도시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 언급 역시 작가의 그림과도, 작가의 그림에 배어나는 도시 감정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다시, 그렇게 작가는 그리움의 색감과 질감을 그린다. 그 색감은 마치 희미해진 흑백사진에서처럼 색이 바래고 빛이 바랜 것처럼 보이고, 오래된 벽면에 난 크랙을 손으로 쓸 때처럼 터실터실해 보인다. 비정형의 얼룩이 시간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는 것도 같고, 알 수 없는 낙서가 부재 하는 존재를, 때로 상처를, 그리고 더러 정겨움을 증거 하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이 색감은, 질감은, 익명의 흔적은 어디서 어떻게 유래한 것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여행에 대한 기억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아파트와 연립이 공존하는 경계 도시로, 달동네와 골목길 그리고 적산가옥과 같은 근대 도시의 생활사의 흔적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변방 도시로 작가를 이끌었을 것이다. 리서치를 위해 작정하고 떠난 여행이라기보다는 플라뇌르, 그러므로 도시의 산책자처럼 생각 없이 떠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 여행이 근대 생활사의 기억을 불러오고, 유년의 추억을 불러오고, 원형적인 기억 앞에 서게 했을 것이다. 

주제가 그렇고 의미가 그렇다면, 형식은 또한 어떤가. 작가는 캔버스와 합판 같은 패널 위에 그림을 그린다. 사실을 말하자면 패널 위에 새김질하고, 그리고, 프린트하고, 붙인다. 조각과 회화, 프린트와 콜라주가 하나의 화면 속에 어우러지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 특히 합판과 같은 패널은 새것보다는 버려진 것, 낡은 것을 쓰는데, 그 자체 이미 어느 정도 시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마치 시간의 화석과도 같은 질감에 끌렸을 것이다. 

그렇게 우연한 스크래치와 같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패널 위에 새김질하고 조각해 요철을 얻는다. 굴곡진 아파트 벽체의 표면 질감을 얻고, 낡고 해진 느낌의 오랜 벽면의 표면 질감을 얻고, 골목길에 시공한 시멘트 바닥의 표면 질감을 얻고, 콘크리트 마감한 연립의 터실터실한 표면 질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 위에 낡고 해진 느낌에 어우러지는, 터실터실한 표면 질감에 어울릴 만한, 어쩌면 빈티지의 그것에 가까운 색감을 올리고, 프린트를 올린다. 그리고 여기에 땡땡이 문양과 같은, 잎맥만 남은 나뭇잎 같은, 그리고 고서에서 찢어낸 종이와 같은 오브제를 붙여서 마감한다. 

때로 프린트로 알 수 없는 문자가, 기호가 부가되기도 하는데, 조형적인 효과와 함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말을, 미처 그림으로 옮기기 어려운 말을, 기억이 미처 재생하지 못한 말을, 그러므로 흩어지는 말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신라 시대의 토우를, 궁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전통적인 문양을 그려 넣기도 하는데, 작가가 소환하는 기억이 개인사적인 차원을 넘어 역사적인 경지로까지 확장 심화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마치 근대 도시를, 신도시와 구도심이 마주하고 있는 다공성의 도시를 거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근대 도시의 기억을, 골목길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 고즈넉하고, 쓸쓸하고, 적요하고, 정겨운 느낌이다. 사람 하나 없는 어둑한 거리에 저 홀로 불 밝히고 있는 쪽창이, 깜박거리는 간판의 불빛이, 길 뒤편에서 새 나오는 가로등의 불빛이 고단한 삶 속에서의 한 줄기 희망을 암시한다고 해야 할까.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는 치열한 현실과 대비되는 희망을 강조하는 편이다. 이를 위해 일종의 이중그림 혹은 겹 그림이 시도되고 있는데, 빈티지 분위기의 거리의 정경 위에 원색이 뚜렷한 색감의 문양이며 패턴을 올려 대비시킨 것이 그렇다. 때로 패턴은 현란한 꽃문양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삶을 축복이라도 하듯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보는 느낌이다. 희망이 있는가 하면, 위험신호도 있다. Slow, Stop, 그리고 Danger와 같은 영문자가 그렇다. 느림의 미학과 함께, 시대에 보내는 경고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보들레르는 예술가를 플라뇌르, 그러므로 도시의 산책자에 비유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개념으로 치자면 소요에 해당한다. 알다시피 소요는 그저 하는 일 없이 거니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도 없이, 욕망도 없이, 정처도 없이 거닐다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린다. 그렇게 세계가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는 꼴이 눈에 들어오고, 세계가 자기를 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번잡한 도시의 삶 속에서 잊힌, 잃은, 아득한, 아련한 근대 도시의 생활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 터실터실한 벽면을 쓸고 지나갈 때 손끝에 전해져 오는 촉감의 정겨운 기억을 되살려준다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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