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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스컵쳐(sound sculpture)의 이해

고충환


사운드 스컵쳐(sound sculpture)의 이해



‘나는, 음악을 만들 때 소음을 사용하는 일이 전자 장비의 도움으로 음악을 창조하는데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믿는다. 그 전자 장비들은 어떤 소리라도 음악적 목적에 유용하도록 만들 것이다. 음악의 종합적 창조를 위하여 광전자, 영화, 그리고 기계적 매체들이 연구될 것이다. 과거에는 논란의 지점이 화음과 불협화음 사이에 있었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는 소음과 소위 음악적 소리 사이에 있게 될 것이다’(존 케이지John Cage, 1937년 선언문).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최근 팀 중심의 학제간 연구 방식이 기왕의 작가중심주의와 함께 또 다른 예술창작 방법론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작가중심주의는 개인적 방법론으로서 흔히 천재와 개성으로 대변되며, 오브제미술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를테면 예술가를 어떠한 형식으로든 일상과는 다른, 미적 향수의 가치를 갖는 독특한 물건인 오브제의 생산자로 본 것이다. 이에 반해 팀 중심의 학제간 연구는 다자간 방법론으로서, 굳이 그 범주를 따지자면 개념미술과 그 논리를 공유한다.
오브제미술과는 달리 개념미술에서의 감각적 물건의 생산은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며, 예술가를 제약하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개념미술은 예술을 더 이상 전인적 주체에 한정시키지 않으며, 예술을 예술의 문맥 바깥으로 불러낸다. 그리고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예술의 기능을 묻는다. 여기서 기능을 현실주의의 언어로 말하자면 실천이 될 것이고, 후기구조주의의 어휘로는 작용으로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예술은 사회 속에서 순기능과 함께 이따금 역기능을 실천하는 일종의 사회학적 기계가 된 것이며, 그리고 사회를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들이 모여 구조화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욕망하는 기계가 된 것이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학제간 연구는 이런 사회학적 기계 또는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예술을 사회의 망 속에 개입시키고 작용시키는 보다 효과적인 방식이 된 셈이다.
흔히 미술과 음악, 미술과 소리, 소리와 공간, 소리와 구조, 그리고 소리와 조각적 형태가 만나 이뤄지는 사운드 스컵쳐는 이러한 학제간 연구 방식에 힘입은 것이다. 이번 텐저블 사운드(tangible sound)전은 국내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예술과 공학의 학제적 그룹인 아스타(ASTA) 그룹이 주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새로울 것이다(참고로 아스타 그룹은 지난 2000년 전시에서는 인공생명의 한 가능성을 실험했었다). 사운드 스컵쳐는 작게는 예술과 기술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정도의 상호작용성의 가능성을 묻는 것과 관련되며(interaction, man-machine interface, human-computer interface), 크게는 토탈아트와 크로스오버, 그리고 하이브리드 컬처의 논리로 지지되는 현대미술과 여타의 동시대문화에서의 탈장르 또는 탈경계 현상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사운드 아트, 사운드 스컵쳐,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사운드 스컵쳐는 그 유사개념인 사운드 아트 또는 사운드 인스톨레이션과 관련된다. 부연하면, 사운드 스컵쳐는 질량과 양감(매스), 그리고 조각적 형태를 빌어서 소리를 실현하는 소리조각인 것이다. 사운드 아트는 이보다는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소리를 소재로 한 조형예술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은 소리설치 또는 소리공간작업으로서, 소리와 공간이 하나로 만나는 개념이다.
여기서 문제시하는 것은 조각에 대한 개념이다. 즉, 소리조각에서의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 개념으로서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유연한 개념인 일종의 조각적 환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인 소재(재료)를 대체한 레디메이드가 소리조각에 동원되는 여타의 장비들과도 통할 뿐 아니라, 또한 소리의 질량 즉 그 질료적 실체가 환경 속에서 또는 환경과 더불어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왕의 조각이 미술의 한 지류로서 파생된 것이고, 설치 또한 조각이 공간으로까지 확장된 것임을 생각하면 미술과 조각, 그리고 설치는 사실상 하나의 개념군으로 봐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운드 아트와 사운드 스컵쳐, 그리고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그러므로 특정의 개념에 얽매이기보다는 소리를 소재로 한 조형예술의 한 형식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소리조각은 음악의 장르와 조형예술의 장르가 만나 이뤄진 탈장르 혹은 통합장르를 실현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소리조각을 기왕의 음악에 대한 실험의 한 연장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광범위하게 소리를 소재로 한 것을 음악의 한 속성으로 인정하는 한에서는 소리조각에서의 소리를 음악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리조각은 청각적 감각경험과 시지각적 감각경험이 하나로 만나는 인터미디어 작업이다. 모든 감각적 경험이 하나로 통한다는 이러한 공감각의 발상으로부터 칸딘스키의 추상회화와 바그너의 오페라가 유래했음은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다. 이렇듯 소리조각은 장르와 다른 장르를, 감각과 다른 감각을, 매체와 다른 매체를 하나로 넘나드는 복합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현대미술을 비롯한 동시대 문화현상은 물론이거니와, 장르간의 미분화 현상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의 기원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소리조각의 이런 종합적인 성질은 기왕의 키네틱 아트와 인스톨레이션은 물론이고 심지어 퍼포먼스까지 그 내부에 아우르고 있다. 부연하면, 키네틱 아트에서의 움직임과 진동을 소리조각의 한 형식으로 보는가 하면, 밀폐되거나 열린 공간 속에 울려 퍼지는 소리의 공간적 점유를 인스톨레이션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퍼포먼스와 관련해서는 보이스 퍼포먼스(Voice Performance)의 발성행위를 소리조각의 한 형태로 본다. 특히 보이스 퍼포먼스와 관련해서는 WDR(서독 라디오 방송국) 음향예술 스튜디오를 위해 플럭서스가 제작한 라디오 예술작품 상당수가 전해지고 있다.
소리조각에서의 음역(音域)이란 들을 수 있는 소리로부터 들을 수 없는 소리인 진동(떨림)까지, 그리고 여기에 소리를 이미지로 변환시킨 볼 수 있는 소리까지 포함한다. 특히 진동과 관련해서는 움직임을 기본으로 하는 키네틱 아트는 물론이고, 텐저블 사운드 곧 만지는 소리와 거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여기서 들을 수 있는 소리, 보는 소리, 만지는 소리는 각각 청각적 소리, 시각적 소리, 촉각적 소리의 형태를 취하며, 이는 소리조각이 아우르는 감각적 지평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소리의 성분과 관련해서는 가공되지 않은 자연음과 함께 기왕의 악기와 변형된 악기(prepared musical instrument)를 비롯한 여타의 도구들을 이용한, 그리고 컴퓨터 등의 첨단 장비를 매개로 한 가공된 인공음을 포함한다.



사운드 스컵쳐의 역사

조형예술에 소리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13년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가 ‘미래주의자 선언’에서 ‘소음예술’이라고 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선언문에서 루솔로는 관중으로 하여금 마치 거리에 있는 듯한 인상을 유도하는 특이한 악기(악기라기보다는 일종의 소리장치), 예컨대 침 넘기는 소리를 내거나 뭔가가 깨지는 소리를 내거나, 혹은 부저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오케스트라를 통해서 미술과 음악의 구별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루솔로는 이런 소리장치로서 일종의 소음악기(Intonarumori, noise- musical instrument)를 고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관중으로 하여금 마치 거리에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는 점에서 루솔로는 환경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다양한 소리들을 예술의 한 형태로 수렴한 존 케이지(John Cage)의 소위 ‘환경음’을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하면 1915년 로마에서 발표된 ‘세계의 미래파적 재창조’라는 선언에서 데페로는 ‘모터로 소리를 내는 구성체’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다.

루솔로와 데페로 이후 소리를 소재로 한 예술은 움직임의 표현을 근간으로 하는 키네틱 아트, 다양한 형태의 변형된 악기에 주목한 1960년대의 플럭서스, 그리고 물질적인 형태의 미술과는 구별되는 비물질적인 형태의 미술을 추구한 1970년대의 일단의 개념미술가들에 의해 널리 제작되었다. 특히 1970년에 뉴욕현대공예박물관에서 열린 <소리 1969 - 1970>, 그리고 플럭서스의 일원인 톰 마리오니가 같은 해에 설립함과 동시에 첫 전시로 개최한 샌프란시스코 개념미술관의 <소리조각> 같은 전시가 1970년대 이후의 개념적 성향의 소리예술에 기폭제가 되었다.
사운드 아트와 관련한 이러한 계보는, 1980년 독일 베를린 아카데미 데어 쿤스트에서 열린 전시 <눈과 귀를 위하여>를 넬레 헤르틀링과 공동 기획하는 등 1980년대 이후 다수의 주목할 만한 사운드 아트 관련 전시를 기획한 르네 블록(Rene Block, 현재 독일 카셀 프리테리치아눔 미술관 관장)이 정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블록은 사운드 아트를 장 팅겔 등의 키네틱 아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의 경향(모리스 오펜하임, 사르키스, 라이도나), 존 케이지의 환경음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음환경파(필립스, 오테, 막스 뉴하우스, 빌 폰타나, 테리 폭스), 플럭서스의 정신을 이어받은 개념적 사운드 아트의 경향(코나, 라 몬테 영), 그리고 사운드 퍼포먼스의 경향(죤스, 크리스티나 크비슈, 프레쉬)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로써 블록은 사운드 아트의 전범으로 키네틱 아트, 존 케이지, 플럭서스, 그리고 개념미술을 들고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특히 플럭서스와 블록의 관계는 남다른데, 그가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화랑(1964-1979, 베를린 소재)에서 다수의 플럭서스 전시를 여는 등 1960년대 이후 거의 초창기부터 플럭서스 운동에 깊숙이 관여해왔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초대한 <독일 플럭서스 1962-1994; 매듭 많은 긴 이야기>(2001.9.7-10.28)전시 중에 <플럭서스 음악; 일상적인 이벤트>란 주제로 초청강연을 하기도 했다(이는 1994년 12월 바르셀로나의 타피에스 재단에서의 강연을 기초로 한 내용).



사운드 스컵쳐 - 키네틱 아트로부터


키네틱 아트로부터 사운드 스컵쳐의 전범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움직임(진동)을 소리의 한 형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종의 리듬을 지니고 있는 움직임은 소리의 한 형식이면서 동시에 시간의 형식이기도 하다. 이런 움직임과 리듬, 그리고 시간이 갖는 관계와 관련한 최초의 본격적인 언급은 나움 가보와 페브스너 형제가 1920년 모스크바에서 발표한 <리얼리스트 선언>에로 소급된다. 선언문에 의하면, 움직임은 실제의 시간을 지각하게 하는 기본 형식이다. 시간 또는 리듬과 동일시되는 움직임은 조각이나 회화에 있어서의 선과 형태들의 흐름으로 인지되는 착시적 현상일 뿐 아니라, 실제의 움직임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정적인 형태로부터 유추해낸 가상적 움직임이 아니라 실제의 움직임이 조형의 한 방법론으로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움직이는 조형은 윌프레드의 일종의 색채 오르간인 클래비럭스(Clavilux, 건반을 의미하는 Clavier와 광도를 나타내는 단위인 lux의 합성어로서 빛의 강도를 조정하는 일종의 건반악기와 같은 기구), 엔게란트의 교묘하게 연결된 진자들, 쇠페르의 동력 추진 신호기, 타키스의 흔들리는 용수철 막대기들, 베르토야의 손으로 스치면 거친 소리를 내는 청동 막대기들, 귄터 해제의 속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구조물을 포함하는 정교하게 짜여진 망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외에도 라파엘 소토의 <진동, 1965>과 타키스의 <자장, 1969>이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키네틱 아트를 세련된 형식으로까지 발전시킨 작가로는 웬 잉 차이(Wen Ying Tsai)를 들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일종의 소리자동공급 조절판인 음향다차원 진동계가 손뼉이나 목소리와 같은 외부로부터의 소리자극을 받아들여서 이를 전자자극으로 처리하면, 오브제로 도입한 유리섬유가 일정정도 진동수를 지속시키는 식의, 일종의 상호작용 조각 또는 인공두뇌 조각이다. 이외에도 사람의 기분이나 음성 그리고 동작에 반응하여 빛의 색과 움직임의 속도가 변화되는 작품, 소리에 반응하는 분수, 떨어지는 물에 스트로보를 매달아 물의 흐름에 착시를 일으키는 작품 등으로 고도의 컴퓨터 기술과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사이버네틱 아트의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사운드 스컵쳐 - 플럭서스로부터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 집단인 플럭서스 그룹은 처음부터 여러 장르들을 넘나드는 인터미디어적 성격이 강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음악의 시각화 또는 시각의 음악화를 실현함으로써 이후 통합장르적 성격이 강한 현대미술의 지형도를 그리는 데에 있어서 지대하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이론적인 기초는 특히 존 케이지의 선(禪)사상에 힘입은 바 크다. 그 선사상은 소위 ‘무결정성의 미학’과 ‘간결성의 미학’ 그리고 ‘우연성’의 강조로 나타나며, 그것은 그대로 전인적 작가주의와 오브제 미술에 대한 플럭서스 작가들의 일반적인 반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부연하면, 전인적 작가주의에 대한 반감이 익명성으로써, 그리고 오브제 미술에 대한 반감이 개념미술로써 플럭서스 그룹의 미학적 성격을 결정짓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현장으로부터 우연하고도 돌발적인 다양한 소리들을 소리예술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식의, 소위 ‘환경음’의 바탕이 된 케이지의 선사상은 특히 1952년에 발표한 작업 <4분 33초>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케이지가 제시된 그 시간동안 연주에 해당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으로도 알려지게 된 그 작업에서, 그 시간동안 발생한 모든 우연적인 소리들이 일종의 음악이 되었으며, 결국 침묵이 아닌 소음이 음악이 된 셈이다. 이 작업에서 케이지는 소리를 제시하는 대신 소리를 듣는 것을 통해서 어떤 근원적 존재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로써 케이지는 ‘음악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이 귀기울여 듣지 않을 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실현한 셈이다. 특히 이 모든 행위의 순간들을 음악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식의 케이지의 작업은 음악과 시각예술, 무대예술과 퍼포먼스 아트를 하나로 아우른 것이다.

이런 개념성이 강한 음악은 조지 브레히트의 일련의 작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오르간 소곡>이란 작품에서는 단지 ‘오르간’이란 단어만 제시되며, 오르간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연주자 개인의 자유의사에 달려 있다. 또한 <플루트 독주>라는 작업에서는 단지 ‘해체와 조립’이라는 두 단어만 제시되며, 따라서 연주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악기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일 이외에는 없다. 그런가하면 ‘악수하기’를 주문하는 <현악사중주>에서는 예술적 행위와 비예술적 행위를 구분하는 최소한의 근거도 없다.
한편, 소리조각과 관련해서 주목할 점은 플럭서스가 변형된 악기(prepared musickal instrument)의 다양한 형태를 예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변형된 피아노(prepared piano)를 꼽을 수 있는데, 이런 변형된 피아노의 전범은 잘 알려진 존 케이지를 비롯하여 존 코너, 백남준(1963), 귄터 우에커(1964), 요셉 보이스(1969), 볼프 보스텔(1994) 등의 작가에게서 나타난다. 존 코너가 피아노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소음을 예술의 한 형태로 받아들였는가 하면, 피아노의 표면을 빼곡한 못으로 덧씌운 우에커의 작업은 자성에 의한 움직임과 함께 이에 따른 음 발생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우에커와 보이스의 피아노가 못들과 펠트 천이나 죽은 나뭇가지 등의 오브제로 피아노의 표면을 덧씌운 것이라면, 백남준과 보스텔의 피아노는 온갖 일상적인 잡동사니들과 이물질들로 치장돼 있다. 특히 백남준의 피아노(갤러리 파르나스에서의 전시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는 일상적인 물건들, 다양한 전기장치들, 그리고 심지어 돼지기름 등의 이물질이 망치와 현들의 위와 아래 그리고 그 사이에 붙어 있어서, 건반을 누르면 물건들이 움직이거나 예기치 못한 소리를 내거나 돌발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피아노 이외에 변형된 악기로는 조 존스의 <만돌린>(1977. 만돌린, 모터, 전선으로 구성된)과 <태양광 음악 키트>(1981-1983. 탬버린, 모터, 광전기로 구성된), 그리고 다께히사 고스지의 <확장된 음악>(1967)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만돌린>에서 존스는 공중에 매달린 모터가 작동함에 따라 모터 끝에 달린 두 가닥의 탄력 있는 철사가 악기의 현을 건드림으로써 완전한 자율적 연주가 가능하게 했다. 이때 모터의 강도와, 모터가 좌우로 흔들리는 진동의 정도에 따라서 우연하고도 변화무쌍한 음의 연주가 가능해진다. 그런가하면 고스지의 <확장된 음악>에서는 공중에 매달린 기타의 현이 흔들리는 막대에 부드럽게 스치며 내는 소리, 무대를 가린 거대한 종이 장막을 자르는 가위질 소리, 그리고 바람을 넣었다 빼는 소리만을 이용한 아코디온 연주 등을 통해 보고들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외에 자신의 컴바인 페인팅 <브로드 케스트>에서 라디오의 음을 도입한 라우젠버그, <소리상자>(1961)에서 미술작품을 생산하는 과정 중에 나는 각종 소리를 녹음한 3시간 분량의 녹음 테이프를 상자 속에 내장한 로버트 모리스, 자신의 연극적 퍼포먼스에 존 케이지의 보이스 퍼포먼스를 비롯한 다양한 출처의 음을 삽입시킨 로리 앤더슨, <어폴러지의 선>이란 작품에서 전화를 건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백을 듣는 상호작용 식의 전화서비스를 뉴욕에 개설하여 소리를 극히 개념적 목적에 이용한 크리스 어폴러지, 그리고 바람 등의 자연현상에 의해 일정한 음을 내는 야외 조형작업의 더그 홀리스 등이 플럭서스로부터 예시된 음예술의 다양한 유형을 이어받고 있다.


사운드 스컵쳐의 동시대적 경향

동시대 사운드 스컵쳐의 특징은 컴퓨터를 비롯한 여러 첨단 장비들로 인해 음향의 질감을 기호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방식으로부터 디지털 방식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디지타이징이 일반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디지타이징의 도움으로 청각적 이미지의 시각적 전이와 촉각적 전이를 비롯한 모든 감각코드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소리의 집음과 재편집을 비롯한 소리에 대한 모든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조작과 실험이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서 사운드 스컵쳐의 향방도 다른 국면을 맞고 있지만, 현재에는 이런 첨단 장비에 기댄 고도의 인공적인 음예술과 함께 여전히 수공성이 강한 음예술이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대략적인 경향을 보면, 플럭서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변형된 악기와 보이스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 기인한 환경음파, CD와 레코드 그리고 이에 준하는 각종 음재생판을 미디어로 활용한 경우, 음예술을 일종의 서사적인 형태로 풀어낸 경우로서 각각 에콜로지와 이데올로기를 주제로 한 경우, 인터랙티브를 통한 추체험을 강조한 경우, 첨단장비의 전문적 이해에 바탕을 둔 사이버네틱스 사운드, 그리고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 경우 정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모든 경향들이 그 자체 독자적인 형태로 존재하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겹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먼저 변형된 악기로는 베를린 호흐슐러의 베르톤치니를 들 수 있다. 변형된 악기에 의한 언플러그드 사운드 스컵쳐(unplugged sound sculpture)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유럽의 소리조각의 전통에 충실한 편이다. 그는 기존의 피아노에다가 건반에 연결된 햄머를 자신이 직접 고안했거나 발견한 여러 가지 도구들, 예컨대 구둣솔이나 그릇 등의 일상적인 오브제로 대체한다(prepared piano). 이외에 그의 작품 중 가장 전형적이라 할만한 것으로 그가 직접 제작한 공기 하프를 들 수 있다. 실내는 물론 야외에도 세울 수 있는 공기하프는 야외에 세울 경우, 대기 중의 바람이 하프의 현에 부딪혀서 연주가 된다.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사람이 아닌 자연이 되는 셈이다.

보이스 퍼포먼스를 통해 음예술을 실현한 예로는 브랜든 라벨, 폴 쉬츠, 그리고 노무라 히토시가 주목된다. 브랜든 라벨의 는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쾌락>의 마지막 장인 ‘목소리’를 낭독할 때 자음을 모두 없애고 모음만 낭독하여 5개의 스피커로 내보낸 작품이다. 여기서 텍스트는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한낱 추상적인 음향으로 전환된다. 이는 언어적이고 의미적인 문맥을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문맥으로 전환시켜 바르트의 ‘쾌락’을 실천한 것이다. 또한 폴 쉬츠의 <제 3의 장소>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작가의 독일어가 비디오 영상 속의 영어 문장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로써 보는 것과 듣는 것이라는 감각의 구분을 개념적인 인식의 구분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그리고 (1970)이란 작품에서 노무라 히토시는 집에서 교토 국립근대미술관으로 가는 도중에 미술관에 전화를 걸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얘기하고, 이것을 미술관의 학예연구원으로 하여금 녹음(기록)케 했다. 이외에도 히토시는 달과 태양 그리고 우주를 테마로 한 소리작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오고 있다.

환경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작가들 중에서 크리스토프 샤를의 은 컴퓨터에 의해 제어된 음향과 영상, 그리고 이에 대한 관객들의 우연한 반응을 상호침투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케이지의 ‘우연성’ 이론에 충실한 편이다. 그런가하면 실 플로이어는 <파기 Digging>란 작품에서 땅을 파는 소리를 내보내는 스피커로써 환경음을 직접 도입한 셈이다. 그리고 슬라이드가 돌아가는 소리를 재현한 <캐러셀 Carousel>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실제의 슬라이드를 두리번거리면서 찾는 관객들의 기대와 행위를 배반함으로써 시각적 코드와 청각적 코드 사이의 잠재적인 간섭의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또한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거리의 모습을 촬영한 후 편집을 통해 자동차 모습을 지우고 소리만 남긴 비디오 작업 <편집 Edit>에서는 소리의 유무를 매개로 하여 부재와 존재의 관계를 다룬다. 그리고 얼음덩어리로 얼린 강철와이어를 벽으로부터 지면에 걸쳐놓고, 그 얼음이 녹아 내리면서 와이어를 진동시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 토마스 슈르츠의 작업은 환경음의 인위적인 조작과 함께 변형된 장비(prepared instrument)를 통한 사운드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디스크를 미디어로 활용한 경우로는 필립 잭과 프로젝트 다크, 그리고 제인 도워를 들 수 있다. 필립 잭의 <오프 더 레코드>는 공사장 위에 쌓아올려진 수백 대의 낡은 레코드 플레이어들이 들려주는 비닐 음반의 거친 소리들을 작품화한 것이다. 또한 프로젝트 다크의 <데니쉬 비스킷 7인치 싱글>(1996)에서는 구식 그래모폰이 비스킷과 플랙시글라스의 표면을 긁는 소리를 통해 수공적 소리의 한 가능성을 실험한다. 그리고 제인 도워는 <디스크>에서 조작된 디지털 음향과 무음(無音)의 트랙으로 이루어진 CD를 통해 음의 존재와 부재를 다룬다. 이때 전시장이 아닌 휴식공간에 작품을 제시함으로써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을 전치시킨다.

그런가하면 소리예술을 통하여 특정의 주제를 다룬 경우로는 자연과 환경 생태를 테마로 한 에콜로지와, 동서 문제 등의 이데올로기를 들 수 있다. 예컨대 구닐라 린더의 일종의 인공생명을 다룬 일련의 작업 <생태방어연구>에서는 길게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무나 화분에 심겨진 꽃, 센서와 컴퓨터 그리고 CD 플레이어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돼 있다. 관객이 나무나 화분에 다가가면 관객의 접근을 감지한 센서가 보내온 신호에 따라서 나무나 생화가 반응하는 식의 상호작용 작업이다. 이때 나무나 생화의 반응은 마치 동물의 행태 같은 떨림과 소리 그리고 소음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사람들의 접근으로 인해 식물이 받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일종의 진동과 사운드의 형태로 치환한 것이다. 식물이 내장한 에너지의 실체를 체감할 수 있는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식물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각하며, 반응하는 주체임을 말해준다. 이는 과학과 생태의 유기적 환경이 결합한 예로 생각된다.
그리고 울리히 엘러의 달팽이 껍질을 소재로 한 <달팽이의 노래, 1992>는 북 위에 놓여진 달팽이 껍질들이 그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해 독특한 마찰음을 내는 작업이다. 또한 엘러는 거대한 식물조형의 꽃술로부터 리얼타임으로 야외의 음이 갤러리 안에 울려 퍼지게 한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외에 폴 판하우젠, 데이비드 던, 사마크 등이 소리를 매개로 하여 생명을 다룬다.
한편, 이데올로기를 형상화한 경우로는 테리 폭스와 더글러스 호리스, 그리고 크리스티나 크비슈를 들 수 있다. 테리 폭스의 <베르리노>(1988)란 작품은, 베를린에서 녹음된 영국군 헬리콥터의 굉음과 교회의 종소리가 악보로 비유된 ‘벽’의 윤곽선을 따라 무겁게 울려 퍼지게 함으로써 ‘베를린 장벽’이 갖는 의미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리고 凸상의 패널을 마주 보게 하고, 그 관을 통해서 목소리의 반사를 현상시킨 더글러스 호리스의 작업은 원래 베링해협을 무대로 하여 그 설치를 구상한 작업으로서, 이는 소련과 미국의 대화를 표현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크리스티나 크비슈는 이런 이데올로기와 에콜로지를 하나로 넘나들고 있다. 예컨대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1988)에서 작가는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는 소리(방송)를 지하철에서 녹음하고, 이를 베를린의 벽에 다가서려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음과 연상적으로 겹치게 함으로써 중의적 의미를 갖게 했다. 더불어 태양전지로부터 에너지를 전달받은 썩은 거목의 뿌리가 미묘한 음을 내며 진동케 한 작업에서는 에콜로지를 다룬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시지각적 이미지와 최소한의 관련도 없이 청각적 소리를 하나로 결합시킨 <오아시스 2000; 콘크리트 정글을 위한 음악>에서는 감각코드 상호간의 이질감을 증폭시키는 한편, 소리의 장소성 문제를 제기한다.





다른 여타의 작가들도 많지만, 특히 인터랙티브를 통한 관객의 추체험을 주요한 방법론으로서 끌어들인 작가로는 폴 드 마리니, 마크 베렌스, 그리고 안젤라 불록의 경우가 주목된다. 폴 드 마리니의 작업(1998)에서는 관객이 우산을 들이밀면 오디오 시그널로 모듈레이팅이 된 20개의 물줄기가 음악과 사운드를 내보낸다. 그리고 마크 베렌스의 <도쿄 서클>에서는 중력센서가 설치된 무대 위에서 관객이 이동하는 궤적을 따라 샘플링된 음경(音景)이 재생된다. 또한 작품의 창작과정의 일부로서의 환경과 조건을 중시하는 안젤라 불록의 에서 작품은 외부의 소리에 반응하도록 조작돼 있다. 이를테면 주변 환경의 소리가 변화하는 데에 따라 라이트 상자의 색(빛)이 변화하는 식이다. 이외에 인터랙티브를 주요 컨셉으로 한 작가로는 피터 포켈, 페릭스 헤스 등이 있다.
첨단장비로 무장한 사이버네틱스 사운드를 구현한 경우로는 하우니에프스키, MIT 미디어 랩의 골란 레빈, 막스 이스트레이와 데이비드 투프, 칼 미카엘 폰 하우스월프와 피터 핵달을 들 수 있다. 하우니에프스키는 컴퓨터와 센서를 이용해서 음향을 창조하는 LTTS(Light Time Triggering System)와 MCOS(Multi- Controller Optical System)라는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이를테면 혀 위에 올려놓은 센서로 음향을 만들거나, 팔찌형 센서를 매단 팔을 흔들어서 소리를 창조하는 식이다. 공연에서는 소리와 함께 다양한 빛의 향연이 펼쳐지기도 하는데, 빛을 통해서 소리를 보고 또한 소리를 통해서 빛을 듣는다. 부연하면, 소리가 미세하게 흩어지면 빛 역시 프리즘을 따라 무지개처럼 흩어지는 식이다. 이외에 작가는 휴대전화를 이용한 쌍방향 네트워크 형식의 작곡을 실험하거나, 전 세계로부터 자신의 인터넷으로 보내온 음 소절이 계속해서 덧붙여지는 식의, 현재진행형의 음악을 개척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프트웨어 아트로 알려진 골란 레빈의 작품은 대개 마우스와 컴퓨터, 스피커와 영사기를 이용하여 이미지와 사운드를 다양하게 조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움직이는 이미지와 사운드와의 동시적인 퍼포먼스를 가능케 해주는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이런 그의 관심사는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 시스템을 위한 인터페이스 메타포와 신호적 재현>이라는 자신의 논문에서도 피력된 바 있다. <스크리블>이란 작품에서는 이런 인터페이스를 활용한 연주(자기표현)와 이에 대응하는 시각적 이미지와의 일체화를 구현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막스 이스트레이와 데이비드 투프의 <피부의 각인을 꿈꾸며>에서는 선회하는 두 가닥의 가는 와이어와 그 밑에 놓인 종이가 마찰하면서 독특한 음을 발생시킨다. 또한 칼 미카엘 폰 하우스월프와 피터 핵달의 <기생, 영향, 변형/ 기생적 전기적 교감>에서는 인터넷과 적외선 센서 등의 첨단장비의 조작으로부터 비롯된 노이즈를 콘텍 마이크로 집음하고 이를 증폭시킨다. 전자가 정적이고도 명상적인 분위기를 유도한다면, 후자는 신비롭고도 주술적인 공간감을 연출해내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 경우로는 카르스틴 니콜라이와 디스인포메이션 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가운데 소리의 시각적 전이를 실현한 매개체 중에서 효과적이면서도 일반적인 예로서 물(水)을 들 수 있는데, 음의 간섭을 이용한 사운드 아트를 실현한 카르스틴 니콜라이의 작업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니콜라이는 에서 두 개의 저음역(低音域) 스피커로부터 음파를 증폭시켜 그 파동에 의해 용기에 담긴 물이 파문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이때 주파수를 변동시켜 수면에 이는 파문의 패턴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디스인포메이션 팀의 <인공조명>에서는 설치된 라디오가 음파를 감지하여 소리를 내는 동안, 이 라디오파가 사진기의 플래시 장치로 전달되어 간헐적으로 빛을 내뿜는다. 이때 어두운 공간에 갑작스레 터지는 플래시의 빛에 놀란 관객들의 실루엣이 벽면 위에 그림자처럼 남게 되며, 다음 플래시가 터질 때까지 그 시각적 이미지가 연속된다.

이외에도 이론상으로 음의 반사가 전무하고 또한 외부와 단절된 폐쇄공간 속에서 컴퓨터에 의해 분리된 음향 스펙트럼을 전달하는 <매트릭스>의 이케다 료지, TV 모니터와 컴퓨터 그리고 시계 등의 전자제품을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음을 채집하는 장치로 전환시킨 <놓여진 혹은 바꾸어 놓여진 음>의 시미즈 지오, 전자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통상의 공간성을 초월한 노보틱 리사치와 빌 폰타나, 스피커 인스톨레이션을 강조한 로르프 유리우스, 사운드 아트를 ‘듣는 것’에 집중시킨 스즈키 쇼난과 후지모토 유키오 등이 사운드 스컵쳐의 다양한 유형을 실험하고 있다.

이상으로 사운드 스컵쳐에 대한 이해와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그 초기 역사는 움직임(진동)에 천착한 키네틱 아트와, 시각과 청각의 인터미디어화를 추구한 플럭서스의 활동이 본격화된 1960년대에로 소급된다. 이처럼 시기적으로도 50년이 채 안되며, 따라서 역사이기보다는 현재진행형으로 봐야 한다. 더욱이 예술과 기술(공학)과의 연계성이 비교적 강한 장르적 특수성으로 인해 사운드 스컵쳐는 각종 첨단매체를 흡수하면서 나날이 진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운드 스컵쳐의 시기는 이런 첨단매체와 함께 예술과 공학과의 연계가 일반화된 최근의 십 수년 내에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는 비교적 전기에 속하는 언플러그드 미디어와, 사운드 스컵쳐의 그림을 바꾸어 놓은 플러그드 미디어가 공존하는 편이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미디어 아트와 인터랙티브 아트를 주로 다루는 그룹인 NTT/ICC(Inter-Communication Center)와 사운드 아트 그룹인 WrK를 중심으로 일정한 작가군이 형성돼 있는 편이지만, 국내에서 소리를 테마로 한 전시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개별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아스타 그룹이 주최한 이번 텐져블 사운드전은 사운드 아트 또는 사운드 스컵쳐를 테마로 한 사실상의 본격적인 첫 국내 전시인 셈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사운드 아트의 일반화와 함께, 예술과 공학과의 학제간 연구 방식이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참고 전시와 문헌

<소리 1969 - 1970>. 1970. 뉴욕현대공예박물관.
<소리조각>. 1970. 샌프란시스코 개념미술관.
<보는 것과 듣는 것>. 1975. 뒤셀도르프(잉에 베커 기획).
<눈과 귀를 위하여>. 1980. 독일 베를린 아카데미 데어 쿤스트(르네 블록과
넬레 헤르틀링 기획).
<소리미술 KlangKunst>. 1996.8.9-9.8. 독일 베를린 아카데미 데어 쿤스트.
<사운드 아트 - 음이라는 미디어전>. 2000.1. 일본 NTT/ICC.
<소닉 붐; 소리의 예술전>. 2000.4.27-6.18.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독일 플럭서스 1962-1994>. 2001.9.7-10.28. 국립현대미술관.
- 플럭서스 음악; 일상적인 이벤트. 르네 블록.
WDR 음향예술 스튜디오를 위한 플럭서스 라디오 예술. 클라우스 쇠닝.

사운드 아트. 월간미술. 2000.7.
- 근대적 음악의 단절된 비음악. 나카가와 신.
음악과 미술이 융합된 원초성으로의 회귀. 노무라 히토시.
눈에 보이는 소리, 사운드 아트. 이숙경. 월간미술. 2000.8.
실 프로이어, 일상의 오브제 다시보기. 이숙경. 월간아트. 2000.10.
사운드 스컵쳐, 소리조각의 정체와 현재지점. 황인. 월간 포아. 2002.5.
사운드 아트, 시각과 청각의 다이얼로그. 신보슬. 월간미술. 2002.7.

키네틱아트. 조지 릭키. 윤난지 역. 열화당. 1988.
플럭서스. 르네 블록. 전경희 역. 열화당. 1990.

- 출처 / 탠져블 사운드전 전시 및 세미나 원고

탠져블 사운드전 2002.12.06-2002.12.21 토탈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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