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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아 : 분변학(糞便學), 유쾌한 똥싸기

고충환

현장. 정진아전. 2003. 7.9 -7.15. 동덕아트갤러리.

분변학(糞便學), 유쾌한 똥싸기

고충환(미술비평)


똥과 남근. 이번 전시에서 정진아가 소재로서 도입한 것들이다. 똥은 합성수지로 그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위에 화려한 천으로 장식하고, 최종적으론 천의 표면을 스팽글 등의 반짝이 무늬로 치장했다. 이 외에도 똥 형태의 표면에다가 색색의 타일을 치장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똥 오브제를 ‘분예기’(糞藝記)라 칭한다. 그럼으로써 이는 대략 똥의 예술적 가능성 혹은 미학적 의의를 묻고 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부드러운 천을 소재로 한 형형색색의 똥 오브제들이 우호적이면서도 유혹적인 인상을 주는가 하면, 다중적인 타자의 정체성과 함께 차이의 감각적 논리를 전개해 보인다. 더불어 조각 천을 일일이 바느질로 수공한 것에서는 여성 고유의 성적 정체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남근을 소재로 한 여타의 작업은 스티로폼이나 폴리우레탄으로 남근의 형상을 만든 다음, 그 표면에다가 알루미늄 캡을 촘촘하게 심은 것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남근 형상를 ‘쇠송이’라 칭한다. 이렇듯 제목 역시 금속성을 표상하며, 마치 하나의 전형을 똑같이 복제한 듯 획일화된 형태에서는 타자의 다중적인 정체성과는 비교되는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읽혀진다. 하나의 기표로서의 남근의 권위에 대한 신비화 또는 신화화의 선입견을 떠올리게 한다.

정진아의 작업은 통념상 부정적인 똥의 이미지를 마치 갖고 싶은 오브제처럼 우호적인 느낌으로 바꾸어놓는가 하면, 이러한 우호적인 똥에다가 마치 유선형의 잘빠진 신무기(新武器)를 연상시키는 공격적인 남근을 대비시키고 있다. 똥을 유혹적인 오브제와 동일시한 이면에는 특히 신체로부터 분비된 모든 저급한 물질에 결부된 감각적 쾌락과 욕망의 심리적 계기가 놓여 있으며, 획일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의 남근의 이면에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견인하는 대표적인 기표에 대한 역으로의 공격이 놓여 있다.

여기서 그 심리적 계기나 공격의 성분은 짐짓 진지한 것과는 거리가 먼 키치적이고 팝적인 가벼움의 미학에 그 맥이 닿아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지금까지 금기시된 욕망의 기표와 동일시되던 똥의 관념을(프로이트는 똥을 유아기의 대표적인 성욕의 무의식적 자기 발현과 연결시킨 바 있다), 그리고 자기 초월적인 숭고의 기표와 동일시되던 남근의 관념을 참을 수 없을 만치 가벼운 존재의 감수성으로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남근의 표면의 반짝거리는 금속성의 빛은 지금까지 남근에 결부된 존재의 무게라는 아우라를 걷어가 버린다).
그리고 그 공격은 웃음의 미학으로 사태를 뒤집는 패러독스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이를테면 예술의 자기 초월적 욕망을 대변하는 숭고의 미학(비극과 형이상학, 진리와 진실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와 관련된)에 금기의 대표적 기표인 똥을 대질시키는 식이다. 그리고 똥은 온갖 금기시된 것들과 억압된 것들을 되돌아오게 한다. 말하자면 성적 쾌락을 금기시하는 기독교적 금욕에 대해 인간 내면의 무의식적 욕망을 불러오는가 하면, 위생학을 명분으로 한 인종 청소와 주체로서의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타자를 게토화한 부르주아의 혐의에 대해서는 더럽고 비열하고 저급한 물질적 타자를 불러온다(곧잘 똥은 타자를 비하하기 위한 은유로서 쓰인다). 또한 정신의 주체인 이성적 인간에 대해서 몸을 매개로 한 감각적 인간을 불러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똥의 부름은 모든 가능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양가성을 실천하고 실현한다.


똥을 소재로 한 정진아의 작업은 오물에 대한 학문적 접근 가능성 곧 분변학의 한 계기를 열어 놓는다. 그 계기의 현대적 기원은 자신의 똥을 캔에 담아낸 피에르 만조니의 <예술가의 똥>에로 소급된다. 자신의 입김을 담은 <예술가의 입김>을 제작하기도 한 만조니의 행위는 예술이 정신의 산물인 것만큼이나 몸의 산물인 것이며, 나아가 그 몸으로부터 유래한 신체 분비물 역시 예술작품일 수 있음을 공공연하게 표명한 것이다. 길버트와 조지가 침과 피 그리고 똥의 신체 분비물을 통해서 동성애자와 같은 성적 소수자의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의문시했는가 하면, 데이빗 해몬스가 코끼리의 배설물을 가지고 만든 성상(聖像)은 종교적 격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국내 작가들 중에서는 똥파리들을 가지고 ‘똥’이라는 글씨를 재구성한 안창홍의 그림이 냄새나는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비판했는가 하면, 부라보 콘과 똥의 같은 형태에 착안한 박병춘의 <부라보 똥>은 음식물과 배설물을 하나로 결합시킨 것으로서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의 일탈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변학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애브젝션 개념에 접맥된다. 저급한 물질을 의미하는 애브젝션은 똥을 비롯하여 피, 머리카락, 털 등의 신체 분비물을 포함한다. 크리스테바는 그 신체 분비물 자체 혹은 그것에 대한 관심을 유아가 기호체계로 진입하기 전의 미분화된 경험의 저장소로, 코라(chora)로, 타자로 명명한다. 이를 라캉 식으로 말하면 유아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편입하기 위해 억압한 무의식적 욕망, 오브제 a에 해당한다. 이처럼 타자는 미분화 상태의 자연인 것이며, 똥과 방귀, 그리고 오줌 등의 저급한 물질 자체는 지금까지의 억압적이고 윤리적이고 선악의 이분법적인 강령들을 위협하는 것들이다. 그 대신 인간 내면의 억압된 자연(성)을 회복시켜 준다.

그리고 분변학에서의 양가성은 모든 이분법적 구분(예컨대 선과 악, 미와 추, 자연과 문명을 구분하는)을 하나로 통합하는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벌리즘의 개념과 통하는 것이다. 바흐친에게서 카니발리즘은 몸과 생식력이 내재한 생명성이 구현되는 전(全) 인간적 공간이다. 먹고 마시고 성교하고 배설하고 임신하고 출산하는, 웃음과 욕설이 다양한 형식과 표현을 얻는 그로테스크 리얼리티가 실현되는 장이다. 그것의 특질은 고상하고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것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으로 격하시키고 저속화시키는 데에 있다. 이런 카니발의 핵심이 양가성이다. 파괴가 창조와 동격이 되며, 죽음이 부활과 등치된다. 그리고 걸인과 왕, 사제와 도둑, 순결과 간음이 교차된다. 카니발은 어떠한 공리주의적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카니발의 행위자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삶과 죽음을, 저급함과 저열함과 비천함을 감싸안는다. 특히 육체와 그 기능들, 이를테면 배분과 배뇨, 교미 등은 자궁과 무덤이, 삶과 죽음이 근접한 카니발적인 양가성을 대변해 준다. 또한 카니발은 어떠한 학문적 담론의 진지성도 회피한다. 그것이 독특한 것, 단일한 것, 개별적인 것, 그리고 분류 불가능한 것에 기초한 카니발적인 양가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정신분석학은 전통적인 남근 신앙에 학문적 틀을 제공함으로써 그 신비화와 신화화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남근은 주체의 기표이며, 남근을 결여한 여성은 이와 동시에 주체도 결여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프로이트를 계승한 라캉에게 있어서 남근은 언어의 기표이며, 여성은 그 언어의 주체에 의해 말해지는 대상임을 의미한다. 작가가 형상화한 남근은 이처럼 남근 자체가 신화의 대상으로서, 권력의 기표로서, 언어의 주체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부장적 현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똥과 남근을 소재로 한 정진아의 작업은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들의 귀환’ 논리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억압된 욕망, 억압된 타자, 억압된 잉여와 여분, 억압된 오브제 a, 억압된 무의식으로 대변되는 온갖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이 의식과 금기의 사선을 넘어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은 하나로 통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성애적 존재임을 말해준다(호모 에로스). 그 성애적 존재는 말하자면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호모 파베르),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호모 로쿠엔스),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 그리고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보다 우선적이다. 그는 육체에 대한 금기로부터 구체화된 지식과 권력의 도구로서의 성 관념을 해체하고, 대신 감각과 성애와 욕망과 차이를 디딤돌 삼아 모든 금기와 터부(taboo)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리고 똥과 남근으로 표상된 비천한 물질주의와 분절된 신체의 부분은 그 자체 현저하게 촉각적이며(똥은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고, 남근의 표면은 우둘투둘하다), 그 전방위적이고 촉각적인 감수성은 흔히 ‘눈은 세계를 읽는 창’이란 한정적인 개념으로 대변되는 시각적 감수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 출처 / 미술평단 2003년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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