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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연의 생태미술.

고충환

김주연의 생태미술.

살림의 미학, 살림의 미술




생태미술

김주연의 근작들은 자연을 그 대상으로 삼으며,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이뤄지는 생태미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전작들에서는 자연 친화적인 요소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자연 친화적인 성질에 바탕을 둔 생명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야말로 작가의 전체 작업을 지배하는 공통되는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근작이 전작과 단절되기보다는 전작을 심화시키고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작가의 작업에서 대상으로 삼은 자연은 단순히 자연을 소재로서 차용하는 소재주의와는 다르며, 그리고 자연을 자신의 관념 속에 불러들여 이를 재구성하는 식의 자연관의 표출과도 다르다. 작가는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간주하고, 그 자체를 그대로 대상으로 하는 살아있는 미술을 실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일정한 기간동안 문명과는 단절된 채 자연 속에 체류하면서 자연으로부터 취한 소재와 더불어 작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순환원리에 공감하는 형태로 표출된다. 소재 자체를 자연으로부터 취한 만큼 작업의 프로세스가 자연의 생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한편 살아있는 미술은 그 자체 생명을 그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여성주의 개념에, 특히 에코 페미니즘 즉 생태 여성주의 개념에 그 맥락이 닿아있다. 물론 생명 자체가 여성주의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하지만 본질주의 페미니즘이 생명에 대한 광범위한 상징과 기호 그리고 신화적 원천에서 자기정체성을 찾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에코 페미니즘은 자연의 생리와 여성(인간)의 생리가 일치한다는 것, 그리고 그 생리는 무엇보다도 생명을 본질로 한다는 논리로 함축된다. 이렇듯 작가의 살아있는 미술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됨을 인식하는 범(汎)자연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생명을 본질로 하는 인간의 보편조건을 묻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찾는 한 과정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동물적 상상력과는 비교되는 식물적 상상력과, 수직적인 계보학의 논리와는 비교되는 수평적인 계열 학의 논리, 그리고 투쟁의 논리와는 비교되는 탈 헤게모니의 실천에 그 맥이 닿아있다.


자연미술, 살아있는 미술

이상의 논리를 김주연의 실제 작업 속에서 확인해보기 위해서는 우선 2000년 일정기간동안 독일에 체류하면서 제작한 일련의 작업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독일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대학교의 한 정원을 배경으로 한 <겨울 벌을 위한 식물심기 - 슈니글랙션 Schneegloeckchen>이란 작업에서 숲으로 이어진 길가에 총 2500 송이에 이르는 슈니글랙션 구근을 심었다. 슈니글랙션은 2월에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서, 인근의 벌 박물관에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벌들을 위한 작업이다. 이는 구근이 자라서 꽃을 피우기까지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속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프로세스 아트적인 일면이 있으며, 또한 구근을 심고 이를 가꿔 벌을 먹이는 일련의 행위에서는 자연이 내재한 생명력을 일깨운다는 일종의 환경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깃들어져 있다.

또한 작가는 독일 게렌의 한 정원을 배경으로 작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정원은 사실상 숲으로서, 인공적인 접근을 가능한 배제한 자연 그대로의 야생을 유지하는 식의 영국식 정원에 가깝다. 그 일련의 작업들 가운데 <춤추는 나무들>이란 작업에서 작가는 일정한 크기의 원형으로 바닥을 다진 후, 그 위에다 붉은 흙을 깔고 여기에 숲에서 발견한 죽은 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그 형국이 그대로 유사 이래의 성소 곧 성스러운 땅을 닮아 있다. 이 자연미술에서 원형의 붉은 흙바닥은 지모(地母)의 자궁을 상징하며, 죽은 나무들을 그 자궁에 심는다는 것은 자연의 재생능력 혹은 치유력을 암시한다. 특히 작가의 전작에도 곧잘 등장하는 붉은 흙은 자연이 내재한 생명을 강하게 환기시키는데, 이는 아마도 대지에 스며든 피의 메타포 탓일 것이다. 메타포도 그렇지만 흙 그 자체가 체질론과 관련이 깊으며, 또한 체질론은 생명의 암시와 무관하지 않다. 원형바닥의 수평적인 형태와 죽은 나무의 수직적인 형태와의 결합은 그대로 음과 양의 합일로 나타나며, 여기서 작가는 땅과 하늘을 중개하는 무당이 된다.

그리고 <시간의 응축>에서는 바닥에 뉘어진 이끼 낀 나무 위로 드문드문 붉은 흙을 덮어 이끼의 변화하는 생리과정과, 그리고 흙에 썩여 있던 이름 모를 씨앗이 움트는 생리과정을 관찰하기도 한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이런 일련의 자연미술에서 시간은 단순한 메타포 이상의, 보다 실제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연의 습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 역시 이런 시간(문명과는 배치되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 그리고 죽음마저 포용하는 순환하는 시간)에 순응하는 것임을 일깨운다.

이외에 작가의 여타 작업들 역시 자연과 자연이 내재한 생명에의 암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물이 담긴 세수 대야에 각종 약초가 든 주머니를 풀어놓은 <크알라야 Quillaja 의식>에서 작가는 약초에서 추출한 물(즙액)로 몸을 씻어 질병을 치유하는 유럽의 오랜 의식을 재현한다(크알라야는 남미의 장미과에 속하는 비누나무의 이름). 이 작업 자체는 전래하는 민간요법이 내재한 자연의 치유력을 되살려낸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빈 병에 성수를 담은 <성수 1249>에서는 이런 자연의 복원력에 일말의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경지를 부여한다(제목에서의 연대표기는 성스러운 샘으로 알려진 베네딕트 계열의 시스마 수도원에 소재한 성 요한의 샘이 기원한 해에 따른 것이다). 크알라야 의식이나 성수가 하나같이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현실적인 욕망에 연유한 것이며, 그 욕망의 이면에는 거의 종교적인 경지로까지 승화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진다. 꼭 질병을 치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몸을 씻는 행위 자체는 일종의 정화의식이나 통과의례를 통한 거듭난 삶을 상징한다. 성서와 부족신화는 이러한 정화의식 또는 통과의례와 관련한 풍부한 사례를 보고하고 있으며, 특히 성스러운 물과 관련한 모든 의식은 그 자체 생명을 내재한 양수와도 통한다.

김주연의 작업 경향은 <이숙 異熟>(2002)이란 작업에 와서 일종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작업에 나타난 상징적인 형태들, 예를 들면 자연의 원형(原形)으로서의 생명력, 물과 흙이 내재한 생명력, 그리고 원형(圓形)의 자궁에 결부된 형태로 암시되던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보다 표면화하는 계기를 열어 놓는다. 여기서 이숙이란 말 자체는 불교에서 유래한 개념으로서, 다른 형태로 성숙함을 말한다. 이는 아마도 궁극적인 깨달음(성숙)이란 개별적인(다른)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불교의 교리가 요구하는 또렷한 개성을 가진 존재란, 개별적인 삶을 저당 잡힌 채 익명의 삶을 사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과 비교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숙 곧 다른 형태의 생장이란 말은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이념의 그물에 포획되지 않는) 자연의 변화무쌍한 다양한 존재 방식과, 동물적 생존원리와는 비교되는 식물적 생존원리, 그리고 현저하게 자연에 밀착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암시한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식물의 생장을 통해 생태계의 성장과 소멸에 이어진 일련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한편, 이를 여성의 성적 정체성에 결부시킨다. 그러니까 그 자체 여성성의 상징인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하얀 의상의 표면에 수종(數種)에 이르는 각종 식물들(크레세, 아팔파, 린제 등 십자화과 식물들과 콩과류에 속하는 식용식물)의 씨앗을 일정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심어서 그 성장하는 과정을 가시화한 것이다. 이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원래의 하얀 의상은 녹색으로, 그리고 점차 죽어 가는 식물들로 인해 갈색으로 변화해간다. 세부적으로는 씨앗이 어느 정도의 시차를 두고 심어졌으므로 녹색의 표면과 갈색의 표면이 공존하며, 성장과 소멸이 공존하며,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따라서 이는 그대로 자연의 순환원리를 예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최초의 씨앗들은 심지어 죽음마저 껴안는 다른 형태로 성숙해가는 것이다. 여기서 드레스 자체는 여성의 몸이 연장된 것이며,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기 위한 대지를 대신한 것이며, 이로써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생명원리에 연루된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드레스는 생명을 위한 숙주로써 자기희생을 통한 모성적인 상징적 의미를 함축한다. 또한 이 작업에서는 살아있는 미술의 특이한 존재원리를 말해준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미술은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어두운 공간과 일정한 습기, 그리고 식물이 성장하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나는 냄새 등 갤러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물학적 환경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씨앗심기 프로젝트>(2002)에서는 화분과 함께 여러 가지 채소와 꽃(봉선화, 금잔화, 사루비아 등) 씨앗이 담겨 있는 봉투를 설치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선택한 씨앗을 화분에 심어 가져갈 수 있게 했다. 이는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일종의 환경 퍼포먼스로서, 식물의 생장을 일상의 공간으로까지 확대한다는 의미를 실천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작품인 <이숙>(2002)에서는 속에 솜을 넣어 부풀린 형태로 천을 박음질한 후, 그 표면에 무수한 브래지어 컵을 달고, 각각의 컵 속에는 흙과 양파를 담아 양파가 생장하게 했다. 이는 식물의 생장을 소재로 한 것이라든가 그 전체적인 형태가 거대한 식물의 씨앗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더 적극적으로 표출시킨 것이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 형태가 긴 꼬리가 달린 정충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하나의 형태가 동시에 씨앗(여성성)을, 그리고 정충(남성성)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넘어서는 양가성을 말해준다. 이러한 양가성은 그 형태의 표면에 달려있는 무수한 브래지어 컵이 동시에 여성의 가슴(여성성)을 그리고 일종의 돌기 형태(남성성)를 상기시키는 것에서 더욱 증폭된다. 현대미술 중 특히 여성주의 미술에서 무수한 가슴의 형태는 종종 변형된 돌기의 형태와 구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로써 남성과 여성 이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일종의 중성적인 성 혹은 양가적인 성적 정체성을 표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발견된 오브제와 변형된 장소성

김주연은 마찬가지로 자연을 소재로 하면서도 자연이 아닌 도시에 공존하는 자연의 위상을 테마로 한 일련의 다른 작업들을 전개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들 작업들에서 자연이 내재한 생명력과 함께 그 변형된 형태를, 그리고 발견된 오브제와 변형된 장소성 곧 장소특정성의 개념을 다룬다. 본래의 자연으로부터 도시민의 일상 속으로 이식된 자연의 변질된 형태와 그 흔적을 추적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도시의 특이한 환경이 갖는 장소특정성의 개념이 개입된 것이다.
예컨대 <도시정원>(2002)이란 작업에서 작가는 도시 속에서 변형된 자연의 한 형태에 주목한다. 도심 각처에서 수거한 스티로폼 상자, 플라스틱 용기, 떡시루, 철 깡통, 심지어 폐타이어 등의 각양각색의 임시화분(대리화분)에 심겨진 상추와 배추 그리고 고추 등의 채소와 화초를 보여준다. 각종 임시화분이 정상적인 화분을 대신한 것이다. 이 임시화분들은 도시에 기생하는 기형화된 자연환경의 한 형태를 말해주는 한편(엄밀하게는 인간이 자연을 불러들인 것이므로 기생보다는 공생에 가까운), 그대로 임시정원, 임시공원, 임시자연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이 작업은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이 변화된 도시환경에 적응해가는 한 과정으로서, 그리고 사회적인 환경(장소성)과 자연적인 환경(장소성)이 하나로 만나 일종의 변형된 제 3의 환경을 낳는 한 과정으로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잠실주공아파트 재건축프로젝트를 위한 작업 <유물>(2002)에서 작가는 잠실주공아파트 재건축 단지 내에서 발견하고 수거한 각종 화분들, 이를테면 분재화분, 테라코타(흙)화분, 떡시루화분, 플라스틱 화분 등을 단지 내 한 초등학교의 실내공간(햇볕이 들지 않는 반 지하공간)에 설치했다. 이때 흙으로 바닥을 고르게 다진 후 그 위에다 채집한 화분들을 재배열했는데, 이는 마치 옛 고분에서 유물을 발굴하는 현장을 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흙으로 바닥을 다지는 행위 자체는 물론 전시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의식적 행위로서 마치 몸을 씻는 것과도 같은 일종의 정화의식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 곳(작가의 개입으로 변형된 장소)은 일상 속에서 본래의 기능을 다한 버려진 화분들이 전혀 다른 미학적 차원(오브제)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곳이며,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교차하는 현장인 것이며, 존재와 부재가 엇갈리는 길목인 것이며(빈 화분들은 그 속에 원래 담겨 있던 화초를 그리고 그 주인을 떠올리게 한다), 타자 곧 잠실주공아파트 주민의 삶(삶의 흔적) 속에 작가의 존재가 개입되는 공감의 현장인 것이다.

이상으로 김주연의 작업은 생태미술의 한 가능성으로서의 살아있는 미술을 제시하고 실천한다. 이는 작가 중심적인 오브제미술과도 그리고 세계의 물질적 지평을 개념적 지평으로 변질시키는 개념주의미술과도 다르다. 그리고 작가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환경에 대한 이해와도 다르다. 대신,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생태미술에서는 오로지 자연이 중심이며, 인간은 단지 자연의 일부로 편입되거나 최소한 자연과 대등한 관계로 재정립된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같이 생명을 본질로 한 존재인 것이며, 그 생명을 매개로 하여 생성과 소멸을 거듭할 뿐인 순환구조의 한 원소(모나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작가의 작업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맞잡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며, 그리고 자연의 습성을 드러내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작가 개인의 존재(인격)를 드러내는 것임을 인식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의 실천 속에서 자연이 내재한 생명력에 대한 작가의 경외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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