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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찐 소파의 음모와 몸의 존재

고충환

살찐 소파의 음모와 몸의 존재
- 루시앙 프로이드의 Benefits Supervisor Sleeping 분석



“나는 나의 그림이 진짜 사람 살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나는 그림이 곧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루시앙 프로이드



루시앙 프로이드가 그린 이 그림은 시인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라는 시를 상기시킨다. 시인은 소파로부터 비누와 거품 이미지를, 부드러움이라는 형용사를 떠올린다. 거품 이미지는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젖통이 무지무지하게 큰 구석기시대 다산성 여인상의 비계 덩어리 몸으로 부풀려진다. 마치 베이킹 파우더로 부풀려진 부드럽고 먹음직스런 거대한 빵처럼.
젊었을 적 사진으로는 못 알아보게 뚱뚱해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싫어하는, 마치 동물원 짐승처럼 하품을 길게 하고 눈물이 난 눈을 깜빡거리는, 코로 숨만 쉴 뿐 꼼짝도 않는 공기족인 시인의 몸은 또 다른 공기족인 소파의 몸 속에 자기의 공기를 더하면서 소파의 거죽을 부풀린다. 마치 살찐 소파처럼 부풀려진 시인의 몸은 무위도식하는 식물인간이라는 시인의 정체에 기인한다. 그의 희극적 삶은 권태롭지만,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권태란 지나치게 느리게 흐르는 공기를 말한다. 느리게 흐르는 공기에 포획된 현실의 시간은 거의 정지해 있다. 권태로운 사람은 이렇듯이 더 이상 흐르기를 거부하고, 대신 고여 있는 시간의 입자들을 휘저어, 그것들을 잠 속으로 가져간다. 그의 가장 의미 있는 일상사는 잠을 자는 일이다. 그의 잠은 그냥 잠이 아니다. 잠이 곧 현실이다. 잠은 흔히 그렇듯이 꿈 혹은 예언 혹은 도피 혹은 휴식과는 하등의 관련도 없는 지극한 현실 자체이다. 그의 일상사는 잠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어떤 의미 있거나 생산적인 일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일상사가 그렇듯이 그의 일에서도 역시 아무런 의미 있거나 생산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사와 마찬가지로 의미 있거나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 그냥 일일 따름이며, 그는 그 일을 할 뿐이다. 잠 속에서. 그런 점에서 일상의 현실과 그의 일은 다르지 않다. 일상사의 상당 부분이 사실상 생존에 바쳐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기꺼이 무위도식하는 식물인간이 된다. 비록 그 삶의 조건이 희극적이긴 하지만.






권태로운 사람은 그림에서처럼 모로 누워서 잠을 잔다. 가급적 무릎을 구부려 하체를 배 쪽으로 당기고, 한 손은 베개와 머리 사이에 집어넣거나 혹은 그림에서처럼 자리와 가슴 사이에 밀어 넣어 가슴을 싸안거나 한다. 이때 손이 싸안는 부위가 반드시 가슴일 필요는 없다. 예컨대 배처럼 신체의 중심 외부로 부풀려진 부위면 된다. 부풀려진 몸 혹은 부위란 곧 그의 존재를 말한다. 그는 잠 속에서 자기 존재를 싸안으며, 만지며, 애무하며, 위로한다. 이렇듯이 자기의 몸을 위로하는 그의 자세는 양수 속을 떠다니는 태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권태로운 사람의 존재가 거주하는 집인 잠 속의 공간은 태아의 집인 양수로 가득 찬 자궁과 동일시된다. 양수 속을 거닐면서, 차라리 떠다니면서 태아의 존재는 어떤 의미 있거나 생산적인 일을 했거나, 생각했거나, 적어도 욕망했을까. 권태로운 사람의 존재와 태아의 존재는 깃털처럼 가볍다.

그의 몸은 머리를 포함한 가슴 부위와, 배 부분, 그리고 하체 부위로 삼 등분된, 골 깊게 박음질된 쿠션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렇듯이 쿠션으로써 그 정체가 충분히 진화한 그의 몸은 아마도 머지 않아 거대한 공기 층을 내재하고 있는 부풀려진 소파의 일부로 흡수될 것이다. 쿠션으로의 진화는 예정된 살찐 소파의 음모의 전조에 불과하다. 쿠션으로의 진화는 거대한 젖통과 그것을 받치고 있는 앙증맞은 손에서, 한창 퇴화가 진행되고 있는 발과 부풀어오른 하체에서, 세워진 골반 앞쪽으로 쏠린 채 공기 주머니를 만들고 있는 배에서, 무엇보다도 일체의 굴곡의 세부를 덮어 밋밋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 전체적인 몸 구조에서 확인된다. 특히 하체에 자기 존재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가운데 부분의 지방질 주머니는 진화가 가장 진척된 곳이다. 그 표면에 난 구멍은 진화의 진원지요 정점이다.

장방형의 공기 주머니는 두 개의 젖통 사이로 머리를, 손과 발의 세부를, 무엇보다도 에로티시즘의 은밀한 부위를 자기 내부로 함몰시키고 있다. 함몰된, 퇴화한 머리와 손과 발은 그의 존재가 수행해 온 의미론적인 세계 인식의 종결을 뜻한다. 차후에는 마치 일체의 세부가 생략된 균일한 몸 구조를 한 지렁이가 그런 것처럼 오직 욕망으로만, 감각으로만 존재하겠다는 몸의 부질없는 의지의, 무의지의 징후를 뜻한다. 이렇듯이 완전하게 진화한, 밋밋한 몸 구조를 한 지렁이의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의 인과에 대해 묻지 않으며, 단지 반응할 뿐이다. 지나치게 피동적인 지렁이의 반응은 더 이상 무겁지 않다. 오히려 새털처럼 지나치게 가볍다. 그의 반응은 완전한 피동 자체이기 때문이다.

함몰된, 퇴화한 에로티시즘은 거세당한 욕망을, 거죽뿐인 욕망을, 인식 없는 욕망을, 욕망 자체를 뜻한다. 욕망 자체란 온 몸으로 감각하는 존재와 동격이다. 식물인간과 동격이다. 하지만 감상적이거나 비극적이지는 않다. 인식이 아닌 반응이기 때문이다. 인식이 없는 욕망을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마도 욕망 자체는 이렇듯이 본래부터 인식을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해두지 않은 듯하다. 욕망이 인과를 가지며, 인식을 수반한다는 생각은 욕망이 예비해 둔 고도의 허방일 것이다.

에로티시즘을 거세당한 그의 몸은 욕망 덩어리를 상기시킨다. 에로티시즘을 거세당한,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거죽뿐인 욕망 주머니는 지나치게 가벼워진 나머지 공간 속으로 날아 오르려 한다. 소파의 등받이를 붙잡고 있는 그의 오른 손이 날아 오르려는 욕망 주머니의 욕망을 간신히 거부하면서, 미처 진화하지 못한 자기 존재를 고집하고 있다. 그의 고집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머지 않아 쿠션 마저 집어삼킨 살찐 소파는, 그의 몸의 성분인 공기를 충당 받아 전보다 더, 한층 가벼워진 소파는 마침내 공중 속으로 자기를 띄워보냄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실현할 것인데. 소파의 고집을, 그의 존재 실현을 막을, 거부할 장치는 없다.

프로이드의 이 그림은 자기를 공중 속으로 띄워 보내기 전에 권태로운 몸을 부풀려 몸의 성분인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아직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 있는 소파의 음모를, 그 한 지점을 다루고 있다. 소파의 음모는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미 소파의 팔걸이가 머리의 일부와 오른쪽 어깨와 젖통의 상당 부분을 흡입한 상태다. 등받이는 막 왼쪽 발을 삼키는 중이다. 아마도 등받이와 팔걸이가 미처 빨아들이지 못한 젖통의 일부와 배 부위는 아래에 있는 자리 위로 흘러 넘쳐 날 것이다. 그의 몸에서 여전히 의미론적인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 유일한 부위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손일 것이다. 젖통을 싸안고 있는 오른 손은 젖통이 팔걸이로 흡입되거나, 혹은 자리 위로 흘러 넘치는 것을 막고 있다. 등받이를 붙잡고 있는 왼 손은 자기의 몸이 날아 올라 소파의 존재 실현을 돕지 못하게 거부하고 있다.

젖통의 표면에 파리하게 드러난 핏줄이 고기 특유의 이물감을 상기시킨다. 존재로서의 인식의 끈을 마침내 놓아버린 머리통의 자잘한 세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곳이 인식의 사령탑이었음을 말해준다. 인식의 사령탑으로써 머리통은 아마도 몸 전체로 서서히 자기를 증식해가는 감각의 맹목적인 집행을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보았을 것이다. 마침내 머리통까지 침투한 감각은 머리통 고유의 기능이랄 수 있는 인식을 거세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완결한다. 최종적으로 머리통이 인식을 거세당함으로써 마침내 감각적이게 된 몸은 완전한 식물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충족하게 된다. 인식은 없고 반응만 있는. 기껏해야 깊은 잠의 한가운데서도 이따금씩 몸을 움찔거리는 것으로 퇴화한 인식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소파의 등받이 표면을 장식하고 있는 꽃무늬가 날아오르기를 꿈꾸는 소파의 꿈이 화려한 것임을 말해준다. 날아오르기란 소파의 본질이며 궁극적인 자기실현이다. 그것을 보고 단지 음모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의 정체는 단지 감각적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혹여 날아오르는 욕망의 실현 자체가 인식의 기능을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의 성분은 공기로 되어있다. 그 공기를 뒤져 소파가 흡입한 인식의 잔재를 찾아낼 수 있을까. 감각의 한 성분이 된 인식의 잔재는 이미 인식과는 다른 것일 것이다.

루시앙 프로이드는 이 그림에서 실존적 인간이라는, 세계 속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묵었지만 감각적임으로 인해 여전히 유효한 테제를 끄집어내고 있다. 프로이드가 테제를 언급하는 매개는 살이다. 그의 살은 가볍다. 지나치게 가벼운 살은 공기 층을 부풀려 날아오르기를 꿈꾼다. 공기의 성분은 권태며, 인식을 거세당한 감각적인 존재가 그의 정체다. 권태롭게 쳐져있는 살집들은 약간의 나른함과 역겨움, 그리고 이물감을 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비극적이거나 무겁지는 않다.




권태로운 사람은 그림에서처럼 모로 누워서 잠을 잔다. 가급적 무릎을 구부려 하체를 배 쪽으로 당기고, 한 손은 베개와 머리 사이에 집어넣거나 혹은 그림에서처럼 자리와 가슴 사이에 밀어 넣어 가슴을 싸안거나 한다. 이때 손이 싸안는 부위가 반드시 가슴일 필요는 없다. 예컨대 배처럼 신체의 중심 외부로 부풀려진 부위면 된다. 부풀려진 몸 혹은 부위란 곧 그의 존재를 말한다. 그는 잠 속에서 자기 존재를 싸안으며, 만지며, 애무하며, 위로한다. 이렇듯이 자기의 몸을 위로하는 그의 자세는 양수 속을 떠다니는 태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권태로운 사람의 존재가 거주하는 집인 잠 속의 공간은 태아의 집인 양수로 가득 찬 자궁과 동일시된다. 양수 속을 거닐면서, 차라리 떠다니면서 태아의 존재는 어떤 의미 있거나 생산적인 일을 했거나, 생각했거나, 적어도 욕망했을까. 권태로운 사람의 존재와 태아의 존재는 깃털처럼 가볍다.

그의 몸은 머리를 포함한 가슴 부위와, 배 부분, 그리고 하체 부위로 삼 등분된, 골 깊게 박음질된 쿠션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렇듯이 쿠션으로써 그 정체가 충분히 진화한 그의 몸은 아마도 머지 않아 거대한 공기 층을 내재하고 있는 부풀려진 소파의 일부로 흡수될 것이다. 쿠션으로의 진화는 예정된 살찐 소파의 음모의 전조에 불과하다. 쿠션으로의 진화는 거대한 젖통과 그것을 받치고 있는 앙증맞은 손에서, 한창 퇴화가 진행되고 있는 발과 부풀어오른 하체에서, 세워진 골반 앞쪽으로 쏠린 채 공기 주머니를 만들고 있는 배에서, 무엇보다도 일체의 굴곡의 세부를 덮어 밋밋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 전체적인 몸 구조에서 확인된다. 특히 하체에 자기 존재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가운데 부분의 지방질 주머니는 진화가 가장 진척된 곳이다. 그 표면에 난 구멍은 진화의 진원지요 정점이다.

이렇듯이 프로이드가 살을 다루는 가벼운 방식은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블라디미르 벨리코비치의 무거운 방식과는 다르다. 베이컨과 벨리코비치에 있어서 몸은 언제나 조각난 파편이며 덩어리로만 존재한다. 그것들은 흔히 형체가 잔인하게 뭉개져 있거나, 못으로 찢겨진 채 벽에 걸려져 있거나, 굵은 바늘에 꿰어져 있거나, 둔탁한 도구로 조각나 있다. 피가 뚝뚝 듣는 그 살풍경은 푸줏간에 걸린 고기의 묘사로 렘브란트가 선취한 바 있다. 존재의 이면에 기울인 렘브란트의 평생의 관심을 상기해 볼 때, 그 그림은 단순한 정물화를 그린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렇듯이 조각난 파편으로, 덩어리로, 부분으로 존재하는 몸의 표현은 숭고미와 비장미, 혹은 비극적 감회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 생생한 표현으로 인해 살해 욕구 내지는 성적 욕구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살풍경한 존재를 직면케 하는 강도가 있다.

이에 비하면 프로이드에 의해 일체의 내용물의 성분이 거세당한 살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다. 숭고미나 비장미는커녕 오히려 뻔한 존재의 드러냄이 역겹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이드는 베이컨과 벨리코비치로부터 갈라선다. 무거운 존재와 가벼운 존재의 구분이 그것이다. 베이컨과 벨리코비치가 살을 실존적인 내용물로 꽉 찬 덩어리로 인식함에 반해, 프로이드는 내용물을 결여한 껍데기로 해석한다. 대신 지겨운 권태의 공기로 그 속을 채워 부풀린다. 내용물은 없고 껍데기만 있는 권태로운 존재가 살의 정체다.
기름덩어리 의자로 된 요셉 보이스의 몸은 어떤가. 요셉 보이스에 의하면 기름덩어리란 주술적인 치료제를 뜻한다. 소파의 몸이 감각적인 덩어리로 된 것과는 달리 나무 의자는 견고한 개념의 틀을, 골격을 은유한다. 이렇듯이 개념의 틀과 치료제인 기름으로 된 몸이란 유토피아를, 혁명을, 이상주의적 존재를 반영한다.

머리통이 없는 몸의 인식이란 가능한 것인가. 몸 전체가 감각의 코드로 이루어진 지렁이의 인식이란 가능한 것인가. 더 이상 무겁지 않은 존재는, 지나치게 가벼운 존재는, 단지 반응할 뿐인 무미건조한 존재는, 감각적 존재는, 희극적 존재는 무거운 존재에 비해, 실존적 존재에 비해, 인식적 존재에 비해, 비극적 존재에 비해 견딜 만한 것인가. 마침내 그의 살을 완전히 빨아들인 살찐 소파가 표면에 그의 존재를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는 미미한 흔적을 남긴 채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다. 잠처럼 느리게. 권태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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