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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서울판화미술제 특별전 <한국현대판화의 흐름전>

고충환

한국현대판화의 어제와 오늘


한국현대판화미술사

1995년에 첫 전시를 개최한 이래 서울판화미술제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특별전으로 한국현대판화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해볼 수 있는 <한국현대판화의 흐름전>을 기획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작가는 작고 작가를 비롯해서 원로.중견작가 등 80여명이다. 일면적으로 본 전시는 한국현대판화미술사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현대미술사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한국현대미술사를 대략적으로 일괄해보면 다음과 같다. 50년대 중반부터 이후 60년대까지의 국내 화단은 소위 뜨거운 서정 추상을 표방하는 앵포르멜과, 상대적으로 차가운 추상과 함께 설치와 해프닝 등의 탈평면의 경향을 표방하는 탈앵포르멜로 양분된다. 그리고 70년대는 모노크롬 회화가 대세를 이룬 시기이며, 이는 서구 모더니즘 회화의 순수주의, 형식주의, 절대주의와 맞물려서 회화에서의 모더니티를 실현한 것으로 평가된다(예술의 자율성과 장르적 특수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시대정신과는 동떨어진 예술의 자기 논리에 한정된 지적 유희에 머물렀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어 80년대는 현실주의 미술과 순수주의 미술과의 이념 논쟁이 첨예화된 시기로서, 진작에 현실 참여를 표방한 민중미술뿐만 아니라 소위 제도권 미술마저 지금까지의 한국적 개념주의 미술과 미니멀리즘을 아우르는 모노크롬 회화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국내 화단은 80년대 중반에 도입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바탕을 둔 다원주의 경향을 보이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현대미술사에 대한 이러한 간략한 이해를 갖고 한국현대판화미술사를 보면 그 시점은 대략 한국판화협회가 창립된 1958년으로 소급된다.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석판화가 이항성이 창립한 한국판화협회에는 이항성을 비롯한 최영림, 정규, 유강렬, 이상욱, 박수근, 김정자, 김봉태, 김종학, 윤명로, 서승원, 송번수, 강환섭, 김상유, 배륭, 한묵, 김훈 등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본 회는 정기적인 협회전과 함께 1968년에 처음 개최돼 1975년까지 존속된 신인 공모전을 통해서 송번수, 이승일, 김진석, 김태호, 백금남, 이인화 등 차세대 판화가를 배출했다. 그리고 1968년에 창립돼 현재에까지 이르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는 강환섭, 김민자, 김상유, 김정자, 김종학, 김훈, 배륭, 서승원, 유강렬, 윤명로, 이상욱, 전성우, 최영림 등 13인의 작가가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판화를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기획전시를 개괄해 보면, 우선 1968년에 이항성이 <한국현대판화10년전>을 기획 전시했으며, 전시에는 이항성, 김영주, 정규, 유강렬, 최영림, 배륭, 김정자, 강환섭, 이상욱, 윤명로, 김상유, 김종학 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가 1970년에 동아일보 주최로 개최되었으며, <공간국제판화전>이 1980년에 월간 건축미술문화 잡지 공간 주최로 처음 개설되었다. 이외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관련 전시들로서는 <한국현대판화 드로잉 대전>(1980년), <한국현대판화40년전>(1993년), <한국현대판화전>(1999년), <한국현대판화모음전>(2003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이 있다.

판화에 대한 작가들의 입장을 보면, 초창기에는 판화가 회화를 위한 형식실험의 한 방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만큼 화가가 판화가를 겸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한찬 이후에나 판화 자체의 장르적 특수성을 인식하고 판화만을 전문으로 하는 본격적인 판화가가 등장한 것이다.



초창기의 판화

이상의 한국현대판화미술사를 바탕으로 해서 비교적 초창기의 주목 작가들은 대략 박수근, 최영림, 이항성, 유강렬, 이상욱, 정규, 김상유, 배륭, 윤명로, 김봉태, 서승원, 송번수, 김태호, 백금남, 이인화 등을 들 수 있다.
박수근의 목판화는 우둘투둘한 표면질감과 굵고 간략한 선으로 표현된 여인 등으로써 한국의 서민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석재인 화강암의 표면질감을 화면에 도입한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정서와 질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어서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경우로 생각된다. 그리고 일본의 목판화가 무나카타 시코의 영향이 느껴지는 최영림의 목판화는 피리 부는 소년과 나체의 여인들을 소재로 한 목가적인 풍경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석판화가로 알려진 이항성의 석판화는 전통적인 먹그림과 붓글씨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편이며, 먹의 번짐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판종 고유의 특징을 살린 석판화로 1958년 국제현대색채석판화 비엔날레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유강렬은 전통적인 서체의 자유분방한 변형이 돋보이는 목판화를, 이상욱과 정규는 심플한 화면 구성과 회화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스크린 판화와 목판화를 남기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현대판화미술사에서 김상유가 차지하는 위치는 특이한데, 이는 그가 정상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판화를 습득했다는데 있다. 그는 목판화 <출구 없는 방>(1970)으로 제 1회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그 작품은 마치 절대 어둠의 관속에 드러누워 있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통해 죽음의 암시와 함께 암울했던 당시 시대적 정황에 대한 상징을 느끼게 만든다. 이외에도 그는 마치 전통적인 문양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일종의 모자이크화를 보는 듯한 에칭 동판화와 함께, 연못을 끼고 있는 정자 한 가운데에 정좌해 있는 노인을 소재로 한 전통적인 선비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배륭의 스크린 판화는 컬러풀한 색면 대비 효과와 함께 문자의 도입으로 인해 팝아트적인 화면이 느껴진다. 또한 기하학적인 구조물 속에 배치된 인물을 통해서는 명상의 계기를 유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윤명로의 석판화 <얼레 짓>과 <익명의 땅> 시리즈는 해먹에 의한 석판화 특유의 미세 얼룩과 번짐 효과가 잘 발휘된 작품이다. 또한 도미 이전 김봉태의 초기 콜라그래피와 석판화에서는 일상으로부터 차용해온 소재의 표면질감이 고스란히 담긴 물질성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며, 도미한 이후 지판과 에칭에서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장식문양을 변주한 색면 구성과 함께 원주민 미술의 토템 폴을 변주한 기하학적 형태가 돋보인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 토템 폴 형상에서는 물활론이나 범신론에 대한 일정한 관심과 함께, 모뉴멘털한 특성이 감지된다. 한편 탈앵포르멜을 표방한 ‘오리진’의 멤버이기도 한 서승원의 석판화 <동시성> 시리즈는 기하학적인 형상과 중첩된 색면 구성이 특징이다. 근작에서는 색면이 더 유기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명상적이다.

포토스크린 판화 <판토마임>(1972)으로 제 2회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한 송번수의 근작은 일종의 페이퍼캐스팅을 통한 가시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김태호의 스크린 판화가 그라데이션 기법에 의한 색면 구성과 함께 중첩된 화면에 바탕을 둔 추상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면, 백금남의 스크린 판화는 글자를 변형시키고 양식화한 캘리그래피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인화는 전통적인 기물이나 소품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컬러 메조틴트, 미세 얼룩을 중첩시킨 추상 화면의 딥 에칭, 그리고 회화의 자율성과 목판 고유의 물질적 특성을 극대화한 목판화를 내놓고 있다. 사물의 장식적인 재구성을 보여주는 메조틴트가 구상화적인 감수성을, 그리고 에너지의 방출이 느껴지는 딥 에칭과 목판화가 추상화적인 감수성을 각각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재외판화작가

재외 작가 중 판화와 관련한 주목 작가로는 특히 일본에서 활동한 곽인식, 이우환, 곽덕준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곽인식과 이우환은 60, 70년대에 사물의 물질성을 탐구한 오브제 작업으로써 일본 모노파(物派)의 태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사료된다. 비정형의 점들을 열거하거나 원색의 색면들을 중첩시킨 곽인식의 동판화가 빛의 프리즘을 통해본 대기의 물성을 상기시킨다면, 이우환의 석판화 <점에서>와 <선에서> 시리즈는 화면 속에 만남과 조응 그리고 관계의 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곽덕준은 정치적인 메시지가 강한 포토스크린 판화로 제 1회 중화민국국제판화전에서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983). 그의 판화는 전이되고 전치된 비상식적인 관계를 통해서 일상의 이면을 일깨우는 식의 일종의 낯설게 하기에 바탕을 둔 것으로 느껴진다.



민중 목판화와 현실주의 판화

곽덕준의 판화가 함축하고 있는 이러한 정치적인 메시지는 국내적으로 80년대를 풍미한 민중 목판화 운동과 현실주의 미술과도 통하는 것이다. 관련 작가로는 특히 오윤, 정원철, 그리고 임영길이 주목된다. 80년대 민중미술과 민중 목판화 운동을 대표하는 작가 오윤의 목판화는 선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또한 여백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선이 굵고 각이 뚜렷하며 목판 특유의 칼 맛이 살아 있어서 전체적으로 힘에 넘치면서도 유연한 선이 감지된다. 그림에 나타난 소재를 중심으로 그의 판화를 보면 대략 당대적인 시대정신에 기초한 도상성과 전형성이 강하게 표출된 판화, 춤사위나 풍물 등 세속적인 풍속을 소재로 한 전통적인 놀이문화에 대한 공감과 해학과 신명을 표출시킨 판화, 새 등의 자연 소재를 끌어들인 자연 친화적이고 정적이며 서정적인 판화, 그리고 말년의 도깨비를 소재로 한 판화 정도로 구분된다. 이 모든 판화에서 힘이 느껴지며, 그 힘의 이면에는 한의 정서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의 목판화가 하나같이 힘이 넘치면서도 유연성을 잃지 않는 것은 그 힘이 이러한 한의 정서적인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원철은 리놀륨 판화 <대석리 사람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 한 <초상> 시리즈를 통해서 보통 사람들의 초상의 한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개인사 즉 개인의 삶의 역사가 집약된 일종의 상징이자 기호이며 삶의 지도로서의 초상이 갖는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작가의 판화를 특징짓는 요소로서 초소형 핸드 그라인더에 의한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대상의 세밀한 부분까지를 포착해내는 특유의 선묘를 들 수 있다. 조각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속도감이 회화적 깊이를 더할 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생리를 그대로 닮은 유연한 선묘와 스크레치가 초상에 각인된 삶의 상처를 드러낸다. 근작에서 작가는 기존의 초상과 함께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어느 경우이건 작가의 초점은 현실주의 미학에 바탕을 둔 리얼리티의 실천에 맞춰져 있다.

임영길의 일련의 판화들은 문명 비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는 특히 <무장된 수족관> 연작에 잘 나타나 있다. 나무 장난감으로 재현된 전차와 군함 그리고 군용기 등의 형상을 통해서 전쟁을 암시하는가 하면, 쥐덫을 통해서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억압의 계기를 고발한다. 평화로우리 만치 고요한 정적으로써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전운을 강조하거나, 조립된 모형으로 만든 일종의 장난감으로 살상무기를 대신함으로써 전운의 표면적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조작된 이미지의 제시를 통해서 자연과 문명 그리고 허구와 실제를 대비시키고 충돌시킨다. 그리고 <시간의 부피>에 나타난 근작에서는 디지털프린트와 동영상 판화 그리고 다중매체판화에 대한 형식실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최근의 <도깨비> 연작을 보면, 컴퓨터 프로세싱과 함께 레이저 커팅 기법을 도입해서 신체와 자연과의 관계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사상(예컨대 주역)을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는 현실 인식으로 나타난 문명 비판이 조상들의 지혜가 함축된 생태에 대한 관심과 만난 경우로 보인다.



목판화

주요 목판화가로는 김형대, 김상구, 안정민, 임영재, 신장식, 박영근을 들 수 있다. <후광> 시리즈를 통해서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화염을 형상화한 김형대의 목판화에서는 일종의 빛의 현상학이 감지된다. 좌우대칭형의 구도를 엄격히 적용하는 편인 그의 판화는 빛과 불의 형상을 그 자체 초월적이고 절대적이며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에 결부시킨다. 그리고 흑과 백의 대비가 두드러진 모노톤의 화면, 세부가 생략된 심플한 화면, 최소한의 형과 선으로만 이루어진 절제된 화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판을 중첩시키지 않고 한번에 찍어낸 프로세스가 특징인 김상구의 목판화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한 폭의 심상 풍경을 보여준다. 안정민의 목판화 <심신 산천에 백도라지> 연작은 거칠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며, 이념성이 강하고 서술적인 점이 특징이다. 이미지를 최소화하는 대신 색채가 갖는 의미에다가 메시지를 의탁하는 식의 상징적인 문법이 확인된다. 이와 함께 작가는 음과 양의 이분법적인 세계 표현에 바탕을 둔 메조틴트를 보여주는가 하면, 최근에는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성적인 정체성을 소재로 한 일종의 설치 판화 형식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임영재와 신장식은 일종의 한판 다색판법인 소멸법으로 작품을 하는데, 이는 중첩된 색면들과 스크레치 그리고 두터운 마티에르로 인해 판화 이상의 회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소재적으로 임영재의 목판화는 일종의 화석 이미지를 도입하고 있으며, 신장식의 목판화는 전통적인 초롱이나 촛불을 반복 나열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국적인 이미지를 포착해내고 있다. 그리고 박영근의 목판화 <만찬> 시리즈에 나타난 선(線)을 보면 치과용 드릴에 의한 흐르는 듯한 속도감이 느껴진다. 그의 판화에서는 사물이 흐르는 시간 속의 한 과정으로 나타나며, 그 자체로서보다는 일종의 흔적과 궤적 그리고 자취로서 드러난다. 흑백의 모노톤의 화면 속에 나타난 스크레치가 어둠 속에 부유하는 빛의 편린들로 화(化)한 파편화된 사물을 보여주며, 이렇게 드러난 사물의 흔적이 모든 물질적인 존재의 덧없음을 떠올리게 한다.





동판화

주요 동판화 작가로는 박래현, 김구림, 권영숙, 하동철, 한운성, 이영애, 장영숙, 곽남신, 최미아, 김란희, 백승관, 강승희, 오이량, 그리고 유리 에칭의 서정희를 들 수 있다. 메조틴트와 엠보싱을 혼용한 박래현의 판화는 하회탈이나 귀고리 등 전통적인 기물들을 유기적이고 기하학적인 추상화면 속에 배치시키는가 하면, 소라 등의 자연 소재를 양식화된 추상화면 속에 배열한 일종의 모자이크 화를 떠올리게 한다. 드라이포인트와 에칭 그리고 메조틴트를 넘나드는 김구림의 판화가 사물의 구조에 대한 다양한 형식실험을 내보이고 있다면, 권영숙이 인그레이빙으로 섬세하고 치밀하게 묘사해낸 산세 풍경은 이국적인 느낌이 강하다.

기하학적인 화면과 그라데이션 기법을 통한 인공적인 색채 프리즘에 바탕을 둔 하동철의 판화에서는 빛에 대한 형식실험이 엿보이며, 한운성의 에칭 아쿼틴트 판화에서는 시대에 대한 발언이 감지된다. 예컨대 찌그러진 코카콜라 캔을 소재로 한 판화 <거인>이 자본 잠식을 목적으로 한 신제국주의를, 그리고 천과 끈으로 동여맨 신호등을 소재로 한 판화가 제도화된 사회를 각각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로 마른 나뭇잎과 꽃잎을 소재로 한 이영애의 에칭 아쿼틴트 판화에서는 빛과 어둠이 대비되고 있으며, 정적이고 관조적인 화면 구성이 돋보인다.

그런가하면 장영숙은 컵과 그 속에 담겨진 물을 소재로 한 심플하고 관조적인 인타글리오 판화 로 제 1회 공간국제소형판화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1980), 1985년에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 5회 까다게스 국제소형판화전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판화에서 화면의 대부분은 여백에 할애된 채로 남겨지며, 화면은 최소한의 선과 면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절제된 화면이 실제와 비실제가 공존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을 열어 놓는가 하면, 판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풍경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희박해서 마치 망각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아스라한 심경을 갖게 한다.

그리고 곽남신은 일관되게 기호가 내재한 의미, 기호가 발생시킬 수 있는 아우라, 기호를 어떤 상황이나 문맥 속에 놓는 방식에 주목해 왔다. 이는 <우리 시대의 이콘> 연작으로 나타나며, 여기서 이콘이란 일종의 기원 내지는 주술적인 치유력을 암시하는 기호의 특수성을 말한다. 이런 이콘 시리즈와 함께 근작에서는 꽃잎이나 기물 등의 소재를 실루엣의 암시적인 평면으로 환원시킨 심플하고 장식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한편, 최미아의 인그레이빙과 스텐실 판화가 재구축된 조형적 원리로써 질서에 대한 메타포를 암시한다면, 비스코시티 기법에 의한 김란희의 동판화는 도심의 밤을 불 밝히고 있는 야경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포토에칭과 아쿼틴트에 바탕을 둔 백승관의 동판화는 개념성이 강한 설치 판화의 가능성이 느껴진다.

에칭과 아쿼틴트를 혼용한 강승희의 동판화는 소재적인 면에서 초기 작업과 후기 작업으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주로 정적과 여명에 싸여 있는 도심의 변두리 풍경을 통해서 삭막한 도심의 이면을 들춰내고 있다면, 이후의 판화에서는 새벽녘의 한강변의 풍경을 통해서 시적이고 서정적인 화면을 재구성해낸다. 화면의 상당 부분을 여백에 할애함으로써 새벽녘의 대기를 강조하는 작가의 방식은 대상을 즉물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작가의 내면에서 한차례 걸러진 내면화된 풍경을 보여준다.

오이량의 <존재> 연작 판화는 일종의 종이 납을 소재로 하여 물질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엠보싱된 에칭 판에다가 종이 납을 대고 눌러서 찍어낸 판화에서는 납 특유의 금속성과 함께 연성의 부드러움이, 그리고 물질감 만큼이나 강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납 고유의 물질성, 딥 에칭에 의한 손에 만져질 듯한 표면 요철 효과, 절제된 단색조의 화면, 그리고 이 모두를 담아낸 기하학적이고 심플한 화면 구성에 바탕을 둔 그의 판화는 판화 고유의 프로세스와 정통적인 판법에 충실한 편이지만, 정작 그 인상은 판화 이상의 독자적인 오브제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주로 플렉시 글라스에다가 나뭇잎이나 숲의 이미지를 스크린 한 서정희의 판화는 실재하는 자연과 관념 속의 자연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그 이면은 생태주의에 접맥돼 있다. 나무판이나 유리판 그리고 스텐레스 스틸 망과 같은 지지대를 다변화한 것이라든가, 특히 유리판에 선각하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에서는 전통적인 판법과 재료를 확대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형식실험의 일면이 느껴진다.



메조틴트

메조틴트 판법과 관련해서는 김승연과 박정호의 예가 주목된다. 김승연이 도심의 야경을 마치 흑백사진처럼 정치하게 되살려내고 있다면, 주로 여자의 나체나 꽃잎을 소재로 한 박정호의 판화는 정적이고 관조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여체와 달 그리고 꽃 등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어둠이 지배하는 절대 침묵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생명의 상징들이며, 그 상징의 편린들이 화면을 일종의 우주의 메타포로서 재편해내고 있다. 흑과 백의 대비가 강한 공간 속에서 생산을 암시하는 여체와 대지와 달의 신화적 의미가 결합된 정적인 화면이 명상의 계기를 열어 놓는다.



석판화

석판화에서는 홍재연, 김용식, 구자현, 황용진, 김익모, 그리고 스크린 판화의 지석철이 주목된다. 이 가운데 홍재연의 석판화는 부도(浮屠)를 소재로 하여 이를 비정형의 추상적인 형태로 반복, 나열시킨다. 삶과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가 느껴진다. 김용식의 석판화 <영원과 한계> 시리즈는 십자가의 변형 이미지와 시계의 차용 그리고 빛 이미지의 도입을 통해서 영원성에 바탕을 둔 일종의 기독교적인 도상학을 표현해내고 있다. 그리고 구자현의 <현상> 시리즈는 석판화 특유의 해먹의 번짐 효과가 반영된 판화로서,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석판화의 프로세스에 나타난 특정의 현상을 그대로 작품으로 끌어온 점이 특징이다. 이는 석판화의 프로세스와 이에 따른 해먹의 효과를 극대화한 추상판화로써 자기 언어를 구축한 예로서 사료된다. 말이나 소를 소재로 한 황용진의 판화는 일말의 도상성과 함께 일종의 우화적이고 신화적인 멘탈리티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김익모의 <몽상적 풍경> 연작에서는 일종의 추상화 기호화한, 멀리서 바라다 보이는 안개에 잠긴 남해의 고즈넉한 인상이 느껴진다. 그리고 주로 자연목을 조립해 만든 나무 의자를 소재로 하여 이를 포토스크린 판법으로 찍어낸 지석철의 판화에서는 특정의 의미보다는 단단한 물질감에 의한 화면에서의 형식미가 돋보인다.

이외에도 일종의 모조 펠트에 엠보싱한 박광열의 엠보싱 판화, 강애란의 캐스팅 판화, 송대섭의 모노프린트 혹은 모노타입, 윤동천의 개념주의 설치판화, 그리고 정상곤의 디지털프린트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강애란은 보자기로 싼 책을 알루미늄 소재로써 캐스팅한 작업,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 폴리 소재로써 책을 캐스팅한 작업, 여기에 내부조명을 도입한 책에 이어 동영상을 도입한 일종의 전자책과 함께 최근에는 도서관이나 서가를 재현한 사진과 영상 작업에 이르기까지 책의 포름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보여준다.

한편 여러 기법을 혼용한 송대섭의 모노타입 <갯벌> 시리즈에서는 중층화된 화면과 회화성이 두드러져 보이며, 최근의 생태와 환경 문제에 대한 메시지의 일면이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앙케트를 위한 설문지를 배포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윤동천의 행위는 일종의 정치적인 참여행위이자 의사표현의 행위이다. 이외에도 작가는 식빵의 표면에 문장을 부가한다든지 종이 냅킨에 특정의 문장을 타이핑하는 등의 메시지가 강한 개념주의 작업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오브제의 생산이라는 전통적인 맥락보다는 행위 자체를 강조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의 개념에 가깝다. 그리고 이미지를 컴퓨터에 입력시켜 임의의 형태로 변형시킨 후, 이를 한지에다가 출력해낸 정상곤의 판화는 디지털판화의 한 가능성을 예시한 것이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서 한국현대판화사를 있는 그대로 충실히 복원하려 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주최측의 과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는 한국현대판화사를 개괄하고 그 중요한 맥을 짚어보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이로써 전시의 의의와 성과는 충분하리라 본다. 이번 전시가 현국현대판화사의 과거와 현재에 이어진 연결고리를 가늠하고, 또한 미래의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충분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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