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개념미술가, 아티잔에서 퍼포머로

고충환

전사(前史)

전통적으로 미술작품이란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물건의 생산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특정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소유된 작품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는 조형물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이렇듯이 감각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조형물을 생산하는 사람 즉, 아티잔 또는 수공 예술가야말로 예술가의 전통적인 정체이며 위상이었다. 더불어 이러한 아티잔의 생산물을 유통시키고 보존하기 위한 화랑과 미술관 나아가 박물관이라는 정형화된, 특화된 공간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화된 공간들이 당대 미술의 정치적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현대 미술의 지평을 둘러보면 이러한 예술가와 그가 생산한 작품이 더 이상 절대적인 조건이 아님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안티 Anti’ 즉, 부정의 정신성에 토대를 둔 아방가르드와 파괴를 위한 파괴에 토대를 둔 ‘다다 Dada’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아방가르드의 부정과 다다의 파괴가 예술가와 예술작품에 대한 전통적인 관습과 관례를 의문시하는 것임은, 특히 어떤 감각적인 물건을 생산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를 회의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다다 예술가들의 과제는 한마디로 전통적인 예술가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예술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공공연한 모멸과 파괴로 귀결된다. 그 자체 ‘무의미함’을 뜻하는 다다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다 예술가들의 정서는 보편 세계를 그 자체 미학적 가치를 갖는 세계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한 가능성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로,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여기서 허무주의는 이렇듯이 세계를 미적 차원으로 탈바꿈시키는 예술가의 포기와 더불어 그가 생산하는 어떤 심미적인 물건 즉, 특화된 물건에 대한 회의를 포함한다. 한마디로 예술가란 더 이상 그 자체 미학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여겨져온 특화된 물건의 생산자가 아니다.

이렇듯이 특화된 물건의 생산자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는 이를테면 그 자체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포장하는 장 크리스토, 남성용 변기를 화랑에 옮겨다 놓은 마르셀 뒤샹, 아예 광활한 대지 자체를 캔버스나 조각을 위한 소재로 간주하는 대지 예술가들, 대중들의 틀화된 의식을 계몽하는 소위 ‘사회 조각’과 이의 실현을 위한 ‘자유 대학’을 꿈꾸는 한편 녹색당의 일원으로서 환경에 대한 정치적인 실천을 주장한 요셉 보이스에서도 확인된다. 이외에도 요셉 보이스와 마찬가지로 플룩서스 그룹의 일원인 모건 오하라의 일상에 대한 강박적인 기록, 로버트 모리스의 녹음한 소음상자, 예술을 정치적인 실천을 위한 도구로 인식한 한스 하케의 여론조사, 온 카와라의 메일아트, 15일간이나 진열장 안에 자신을 전시한 벤, 역시 자신들의 신체를 전시하는 길버트와 조지, 바바라 크루거의 페미니즘적 메시지가 담긴 포스터, 역시 페미니즘적 실천의 연장선에 있는 제니 홀처의 전광판 등 그 자체 심미적 가치를 갖거나 감각적인 물건의 생산으로부터 거리가 먼 대신 어떤 행위나 정치적인 실천에 가까운 현대미술은 얼마든지 있다. 이들 사례는 동시대 미술가들에게서, 특히 특정의 장르에 한정되기를 거부하는 전방위적 퍼포머들에게서 널리 확인된다. 그들의 행위로부터는 어떠한 감각적인 물건을 생산하는 아티잔으로서의 예술가상도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그들이 생산한 산물 역시 그것이 감각적 질료이든 혹은 단순한 행위이든 혹은 정치적 실천이든 하나같이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티잔에서 퍼포머로

이렇듯이 어떤 물건의 생산자가 아니라면 예술가는 어떤 존재인가. 그 위상은 아티잔 즉, 조형적 심미적 물건을 생산하는 존재로부터 퍼포머 곧 행위자 또는 연출가로 옮아간다. 그가 행위하거나 연출하는 대상은 종래 예술로 여겨지던 것의 경계를 넘어 삶 자체에로 옮아가며, 이로부터 예술과 삶을 구분 짓던 경계가 의문시된다. 그 자체 삶에 대한 간여를 주된 정체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이는 현대미술에서 어떠한 형식으로든 정치에 대한 이해 없이 예술을 언급하는 것이 불가능하게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동시대 미술가에게 있어서 화랑과 미술관과 박물관의 특화된 공간이 갖는 기능과 위상이 전면적으로 폐기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그 자체 절대적인 조건으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화랑이나 미술관 또는 박물관은 더 이상 그 자체 미학적 가치를 갖는 조형물을 위한 곳이기보다는, 예술가가 자기를 실행하는 여타의 대안 공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게 된다. 즉 예술가의 정치적인 이해가 실행되는 일상 속의 공간 곧 탈특화된 공간과 동일시된다. 한마디로 화랑이든 미술관이든 박물관이든 물화된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유통시키기 위한 궁극적인 목적이기보다는, 예술가의 정치적인 실천이 행해지는 한 과정이요 수단이며 나아가 그 자체 질료적인 재료가 된다. 이를테면 화랑이라는 건물 전체 혹은 공간 자체가 특정의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이미지를 투사하기 위한 거대한 스크린의 일부로 기능하는 식이다.

이렇듯이 현대미술의 달라진 위상, 특히 예술가와 예술작품과 특화된 공간의 변화된 정체성 저변에 개념미술이 존재한다. 예술가와 예술작품과 특정 공간의 변화된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예술 자체의 정의에 대해 재차 주목하게 했으며, 개념미술은 이러한 예술 자체의 주목과 관련된다. 즉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계를 자기 나름의 이해와 방식으로 재현해내는 예술가로부터 그 모두의 근원인 예술이란 혹은 예술적 행위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하는 예술가로 옮아온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에 대한 정의를 통해 예술가의 위상과 실천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그들의 산물인 예술작품과 예술적 행위에 대해 해석과 평가를 가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던 미학자 또는 비평가의 일과 동시대 예술가 특히 개념미술가의 일이 겹쳐진 것이다. 이론과 실천의 구분된 범주가 개념미술가에게서 통합된 것이다. 개념미술가는 더 이상 자신의 예술적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위해 틀화된 도그마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스스로 예술을 정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새로운 예술 환경을 창조함으로써 기존의 예술계 전체에 대해 발언하기도 한다. 여기서 그 발언 행위 자체가 예술적 생산인 동시에 특정의 이론의 형식을 띰으로 인해 그는 이론가 또는 특정 담론의 생산 주체의 위상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한마디로 개념미술가에게 있어서 주요한 표현 대상이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계를 전제한 것이기보다는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예술 자체이다. 여기서 세계란 항상적으로 자연 그 자체이기보다는 나름의 이해와 사정과 이데올로기와 색안경으로 재해석되어진 것임을 곧 인식된 세계임을 인정한다면, 세계와 예술에 대한 개념미술가의 실천이 동시에 그 자체 정치적인 실천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정의와 실제

개념미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정의는 대략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의 관장인 카트린느 미예의 다음과 같은 말로 대변된다. 즉 “개념미술이란 예술작품을 어떤 하나의 생각이나 하나의 개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예술가 자신의 실천적 행위를) 미술이라는 생각 자체,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로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미술에 대한 생각이나 정의 또는 개념 자체를 대상화하고, 이를 작업의 지평으로, 과정으로, 그 자체 목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 미예는 개념미술을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에 주목하는 것으로 한정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어떤 하나의 생각이나 개념을 축약해 표현하거나 다른 어떤 것에 대입하거나 이입하는 미술의 전통적인 문법 즉, 알레고리나 메타포나 엠블렘을 포괄하는 모든 상징적 문법 역시 광의로는 개념미술의 전사(前史)에 속한다. 상징적인 문법 전체가 최소한의 연상적 근거를 제외한다면, 그 자체로는 실제와는 무관한 추상적인 기호의, 개념의 위상을 갖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문법이건 그 자체 추상적인 개념이건 전제된 약호에 의존해서 그 궁극적인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념이 의존하는 전제된 약호란 상징이 그렇듯이 특정의 개념에 대한 관습화나 관례화 또는 이데올로기화한 인식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즉 개념에 대한 그 자체 투명한 인식은 없다. 한마디로 모든 개념은 상징이나 기호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당파적이며 정치적이다. 이러한 사실의 인식을 결여한 개념이나 상징이나 기호에 대한 모든 논의는 그 자체 순진한 발상이거나 혹은 어떤 책략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기 쉽다.

개념미술의 대표작가랄 수 있는 조제프 코주트의 1965년 작품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들?에서 코주트는 실제 의자와 의자를 찍은 사진, 그리고 의자를 뜻 풀이한 사전의 정의를 확대 복사한 패널을 나란히 배열함으로써 의자의 일상적인 의미를 분산시키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코주트의 작품에 회화로 그려진 의자 그림과 조각으로 재현된 의자를, 그리고 여타의 인쇄 매체로 프린트된 의자 등 다수의 의자 이미지를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새로이 첨부된 이미지들로 인해 코주트의 최초 작품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코주트는 같은 해에 ?하나, 그리고 세 개의 망치들?로 명명한 작품을 동일한 방법으로 발표한다. 그리고 1967년에는 사전에 나타난 예술의 정의에 해당하는 부분을 확대 복사한 패널 작품 ?아이디어로서의 예술?을 발표하기도 한다.

이들 작품에서 코주트는 동어반복적인 나열을 통해 예술가에 의해 표현된 작품이나 행위가 알려진 바와는 달리 확고부동한 정체성을 갖는 대신, 순전한 우연의 산물이거나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선택되어진 것이거나 적어도 애매한 위상을 갖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정의 역시 절대적인 진리일 수 없음을, 대신 상대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예술작품의 향수와 관련해서도 그 작품을 읽는 특정 주체의 이해와 그가 처한 상황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코주트는 그 자체 어떤 심미적이거나 미학적 가치를 갖는 감각적인 물건을 생산하기보다는 예술이나 예술가 또는 예술작품 자체의 개념과 정체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