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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춘 / 산수 컬렉션

고충환

산수 컬렉션


박병춘은 이번 전시의 주제를 산수컬렉션으로 명명한다. 작가가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정선을 처음으로 찾았던 것으로 치자면 근 20년 남짓한 세월을 산수화를 품고 그리면서 보냈다. 작가의 화두는 흔한 말로 한국화의 현대화에 맞춰졌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다양하면서도 의미 있는 시행착오와 형식실험을 거치면서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지나쳐왔다. 그리고 지금 그 세월이 남긴 흔적을 반추해본다. 그렇다고 원로작가나 중견작가의 회고전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작가의 형식실험은 현재진행형이며, 이러한 사실은 이번 전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확인된다. 그런 만큼 산수컬렉션이란 주제는 산수화(때로 이러저러한 풍경)의 이름으로 행해진 그동안의 시행착오와 형식실험에 대한 중간점검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그 형식실험의 계기들이 한곳으로 흘러드는 종합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당연히 신작들로만 구성된 일련의 작업들 속에 이전의 계기들이 알게 모르게 녹아들어 있고, 이 계기들을 발판 삼아 또 다른 형식실험의 지점들이 돌출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전작을 간략하게 스케치하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먹선을 들 수 있다. 농묵이면 농묵 담묵이면 담묵, 이렇게 작가는 그 농담이 균일한 먹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런 탓에 발묵효과보다는 필선 자체의 고유한 성격이 두드러진다. 병렬된 필선의 어우러짐만으로(중첩과는 다른데, 즉 먹선 위에 먹선을 덧그리지 않는다) 회화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며,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이 분방한 드로잉을 연상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렇듯 먹선 자체가 핵심인 만큼 그 자체로 어떤 성격을 갖는 먹선이 과제로서 주어지고, 그 과제에 대한 화답으로서 찾아진 것이 소위 라면준이다. 마치 라면을 떠올리게 하는, 길고 짧게 꼬물거리는 선들이 모여 밭을 일구고 산세를 일으켜 세운다. 농담에 변화가 없는 것이나, 균일한 선들이 모여 형상을 일궈내는 그림이 평면적으로 보인다. 이렇듯 평면적인 화면 위에 덧그려진 꼬물거리는 선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 선들이 숨겨놓은 형상에 맞닥트리는, 무슨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는 것 같은 재미에 빠져든다.

그리고 또 하나. 옛 그림에선 산수화 속에 들어가 그 속을 거니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비록 사람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거닐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거나 거닐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관념적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며, 요새 말로 치자면 암시적이라 하겠다. 이처럼 관념적이고 암시적으로 꾀해지던 자기투사를 작가는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실현한다. 산수 속에 자기를 그려 넣고 가족을 그려 넣는다. 현실을 그려 넣고 일상을 그려 넣고 기억을 그려 넣고 욕망을 그려 넣는다. 스케치 여행을 갔다가 짬을 내 들른 친구 결혼식 장면이 사생 속에 편입되고, 아침에 본 일간지에 실린 사건 장면이 산수 속으로 들어온다. 노란 소파가 들어오고, 붉은 우체통이 들어오고, 바나나가 들어오고, 수박이 들어온다. 이렇게 산수 속으로 들어와진 것들은 논리적 개연성을 가진 것일 수도 있고, 그저 그림을 그리다가 우연히 떠오른 것일 수도 있다.

산수를 그릴 때 머리에 떠오른 현재와 과거, 일상과 이상, 사적이고(예컨대 친구 결혼식) 공적인 일들(예컨대 일간지 기사) 모두가 산수를 그리고 있는 당시의, 그 순간의 현실이 되어 그림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산수 속에 자기를 투사하는데, 이런 식의 투사는 지금까지의 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서, 산수화의 생리를 바꿔놓을 만큼의 계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이 특징, 이 착상을 탑재한 다양한 형식의 산수풍경들을 그렸고, 그 풍경들에서 숙성된 계기들이 근작에도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이를테면 기억 속의 풍경, 흐린 풍경, 몽환적 풍경, 채집된 산수, 채집된 풍경, 검은 풍경, 낯선 풍경, 흐르는 풍경, 스치는 풍경, 칠판산수, 퇴적된 산수, 고무산수, 라면풍경들이다. 그저 수사적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보다는 산수풍경 속에 담아낼 수 있는 의미론적이고 형식적인 계기들이 다 들어있고, 그 계기들에 부쳐진 이름들로 보면 되겠다.기억 속의 풍경은 흐린 풍경과 통한다. 그리고 몽환적 풍경과도. 풍경이 흐린 것은 그것이 기억 속에서 되살려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는 철저한 사생을 바탕으로 여기에 기억으로부터 되불러낸 모티브를 중첩시킨다. 바로 채집된 산수며 풍경들이다. 산수 속에 노란 소파가 있을 리가 없고, 풍경 속에 붉은 우체통이 있을 턱이 없다. 응접실에 있는 노란 소파에 앉아서 경치를 관망하듯 산수를 보고, 풍경과 일상과의 경계가 지워진 경지를 통해서 풍경을 보는 것이다. 검은 풍경에선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난 나무와 하얀 여백으로 남겨진 길과의 대비가 뚜렷하고, 낯선 풍경에선 처음 보는 풍경과 대면한다는 설렘을 담았다. 그리고 풍경은 물처럼 흐르고(흐르는 풍경), 차창을 통해서 본 것처럼 스쳐지나간다(스치는 풍경).

어쩌면 이처럼 흘러가버리고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리고 종래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 풍경의 한 순간을(혹 풍경을 대면했을 때의 감동을) 붙잡아 고정시키고 싶은 욕망이 풍경화를 그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흐르다가 멈춘, 스치다가 멈춰선 풍경들은 깊다기보다는 길고, 아득하고, 가없는 느낌에 빠져들게 한다(특히 제주 오름에서 굽어본 풍경들). 그리고 칠판산수는 인디오나 선승들의 모래그림처럼 애써 그린 그림을 지워 없앤다는 점에서 그림 이상의 수행(공부)에 가깝고, 벽화 형식의 퇴적된 산수는 산수를 공간 속에 끌어들여 확장시킨다. 더불어 고무산수와 라면풍경에서 작가는 산수를 오브제와 레디메이드의 문법에 접맥시키고, 특히 공간설치형식의 라면풍경에서 산수를 일상성 담론(예술과 일상, 창작과 일상, 허구와 일상의 경계에 대한 인식론) 속에 풀어 놓는다.

그리고 근작에서 주목되는 점으로는 작가가 구글어서에서 캡처한 사진을 그림에 이용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시점을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구글어서가 제공하는 이미지는 항공사진으로서, 굳이 그 근사한 경우로 치자면 부감법을 예로 들 수는 있지만 기본적인 생리가 다르다. 이전에도 작가는 산 정상에서 아래쪽을 굽어보며 사생을 하고 이를 그림으로 옮겨 그린 예가 많지만, 구글이 제공해준 것과 같은 항공사진이 아니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시점을 취하기는 처음이다. 그 시점이 하늘 위 정 위치에서 내려다본 것인 만큼 마치 그림지도를 보듯 평면적인 느낌이 두드러져 보이고, 이로써 작가의 기왕의 그림에 나타난 평면적인 경향성을 강조하는 시각적 효과를 낳는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이 가상현실까지는 아니더라도 실경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구글과의 만남을 계기로 작가의 풍경에 대한 시점 내지는 관점이 또 다른 전기를 맞을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현장사생에 충실했던 원칙이 다소간 유연해지면서 각종 미디어가 제공한 이미지 혹은 이미지 환경을 작업에 적극 차용하는 식의 작화방식으로 변화하거나 최소한 그 두 방식이 병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하튼 이처럼 제작과정에 미디어를 활용하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는 이미지가 생산되고 유포되고 소비되는 동시대적 메커니즘에 대한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자각의 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처럼 구글을 활용한 그림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점을 계기로 시각을 확장하고 있다면, 다른 작업들에서 작가는 평면에서 설치로 공간을 확장하기도 한다. 각종 오브제를 비롯해 전시 공간 자체를 작업의 한 요소로서 끌어들여 그 조형적 가능성을 실험한 일련의 설치작업들이 그렇다.

그 중 하나가 소위 봉지풍경이다. 전시장 바닥에다가 각종 크고 작은 검은 비닐봉지들을 빼곡하게 집적시켜놓은 것인데, 되는대로 펼쳐지고 구겨지고 부풀려진 봉지들이 천태만상의 형상을 일궈낸다. 일종의 우연을 가장한 그 형상들 중 단 하나도 똑같은 형상은 없다. 그 속에 높고 낮은 언덕들, 크고 작은 협곡들, 그리고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 같은 실제 풍경요소들이 고스란히 들어와 있다. 보기에 따라선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닐의 성질로 인해 빛을 반사하는 부분과 그림자 진 부분과의 대비가 두드러져 보이고, 이로써 마치 그 표면이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석탄산을 보는 것 같은 기묘한 풍경을, 초현실적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그 지리를 세세한 부분까지 훤히 외우고 있을 정도로 자주 찾은 곳이 정선이고, 그 인근에 철암이 있고, 철암에는 석탄산이 많다. 아마도 작가는 그 석탄산을 보았을 것이고, 그때 받은 인상으로 이런 작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일전의 라면풍경에서처럼 봉지들 사이로 길을 내고, 그 위에 미니어처 집을 포치해 실재감을 더했다.

라면풍경이 평원을 보는 것 같은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여성적인 느낌을 주었다면, 봉지풍경은 다소간 거칠고 질박한, 남성적인 인상을 준다. 라면풍경이든 봉지풍경이든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일종의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해 산수를 오브제로 대체함으로써 그 표현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칠판산수는 앞서 말했듯 단순한 그림 이상의 수행으로서의 의미가 강하고, 수행은 공부와 통한다.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재치와 유머를 발휘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옛날 초등학교 나무걸상과 이동식 흑판을 구해다가 서로 마주 보게 세팅하고, 그 칠판 위에다 분필로 산수를 그렸다. 어른이 된 작가가 초등학생으로 되돌아간 양 나지막한 의자에 앉아 산수(山水)공부를 한답시고 끙끙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사실 유머와 위트는 작가의 그림에서 그렇게 낯선 요소나 성질은 아니다. 이따금씩은 바깥에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그림 안쪽으로 숨어들기도 하는 이 유머야말로 작가의 그림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미덕일 것이다.그런가하면 작가가 곧잘 차용하곤 하는 오브제 중엔 포장용 청테이프도 있다. 그 연륜으로 치자면 소위 고무산수를 통해서 일종의 오브제 필법을 실험할 당시로까지 소급되며, 그 착상에 대해선 아마도 청록산수에 대한 발상이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켜 자연스레 확장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하튼, 근작에서 작가는 세로로 긴 나무 테이블과 흔히 볼 수 있는 장식용 조각상(누군가 내다 버린 것을 주워온, 멱 감는 여신상?)의 표면을 청테이프로 감싼다. 그리고 테이블 한 가운데에다 수석(그 모양이 독도를 닮은)을 놓으니, 졸지에 테이블은 바다가 되고 수석은 섬이 되었다. 그리고 테이블 가장자리에 포치한 멱 감는 여신은 성숙한 여인의 몸을 덧입은 모습으로 바다에서 태어난 비너스가 되었다.

이로써 작가는 아마도 최초의 바다, 역사 이전의 바다 한 가운데로부터 신화가 탄생되던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아가 작가는 이 오브제 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벽 위에 걸린 그림 속 바다와 대비시킨다. 아마도 실경임이 분명한 현실 속 바다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 속 바다가 대비되면서 신화적 사실과는 다른 서사가(이를테면 현실과 허구와의 관계로부터 파생된) 발생한다. 그리고 만약 수석을 독도로 읽으면 이와는 또 다른 서사가 가능해질 터이다. 보면 볼수록 흥미진진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서(배열과 배치의 문제),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읽혀지느냐에 따라서(이해와 해석의 문제) 다양한 서사가 가능해지는, 일종의 서사의 다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외에도 작가는 세계각지를 여행하면서 현지에서 채집한 조약돌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한다. 그 표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이를테면 폭포와 같은) 일련의 돌 오브제들을 유리박스 속에 배열해 마치 박물관식의, 자연사박물관 같은 개념의 디스플레이 방식을 적용했다. 채집된 돌 하나하나마다 그 돌을 채집한 장소며 일시 등 세세한 정보를 표기해 따로 부가했다. 이 작업은 일종의 기념비성을 재고하게 한다. 이를테면 조약돌 하나하나는 나와의 인연으로 연결된 것(내가 주운 돌, 내가 머물던 그때 그곳에 함께 있었던 돌)이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기념비적이다. 그 기념비성은 비록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영웅 이데올로기에 걸 맞는 스케일을 동반하기 마련인 그 말의 일반적인 의미에 비해 그 존재감이 미미할지는 모르나 개인적인 만큼 구체적이고 절실한 것이란 점에서 뚜렷한 실체감을 얻는다.

이로써 작가는 나를 기념하고, 나의 여행을 기념하고, 그 여행에서 채집된 산수(여행에서 주워온 조약돌)를 기념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번 전시의 메인에 해당하지 싶은 작업으로서, 작가가 히말라야 등지를 여행하면서 보고 느꼈던 장관을 현실 공간에다 연출했다. 전시장의 구조 그대로를 살린 일종의 장소특정성 작업으로서, 작품이 세팅된 장소와 전시장의 구조가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 1, 2층이 통하는 세로로 긴 장소에 설치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전면이 트여 전체적으로 디귿자 형태를 이루는 공간의 세 벽면에다가 먹으로 산수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안쪽 벽면에서 일정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흰 천을 공중에 매달아 일종의 폭포를 형상화했다. 이와 함께 전시장 바닥에는 일종의 바트 곧 사각의 수조를 설치하고 그 수조 속에 물과 함께 자연석을 가져다 놓아 폭포의 실재감을 더했다. 여기에 수조에다 전동장치를 설치해 흰 천과 맞닿는 가운데 부분의 수면이 원을 그리며 미세하게 파동하게 했다.

이로써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흰 천)와 폭포가 떨어지면서 생긴 물웅덩이(수조), 여기에 수면에 이는 파문(전동장치)과 바위(자연석), 그리고 마치 폭포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배경 경관(벽화)에 이르기까지, 폭포를 중심으로 한 자연 속 경관의 한 부분이 통째로 재현된다. 이야말로 유사자연이며, 인공자연이며, 이미테이션자연이며, 오브제자연이 완벽하게 예시되고 있질 않은가.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 작업에 관한한, 자연 그대로의 닮은꼴을 옮겨다놓는 식의 재현은 작가의 관심사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작가가 진정으로 재현하고 싶은 것은 경관 자체가 아니라, 경관에서 받은 인상과 감동일 것이다.

여하튼, 작가는 이로써 산수에 대한 관념 자체를, 혹은 그림 속에서만 존재해왔던 산수를 실제 공간 속으로, 현실 공간 속으로 끄집어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끄집어내진 산수가 친근하고 낯설고 기묘하다. 작가는 기회 있을 때마다 평면작업과 함께 오브제 작업을, 그리고 공간설치작업을 병행해왔다. 2차원의 평면 속에 갇혀있던 산수화를 3차원의 실제 공간 속으로 불러낸 것이며, 이로써 산수화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는 것. 나아가 평면그림에서조차, 비록 그림에 지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림의 안과 밖을 들락거리는 어떤 상태, 그림 속에 내가 들어있다고 하는 어떤 느낌을 암시해온 전통 산수화의 이념을 좀 더 실감나는 경험의 층위로까지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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