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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운 / 향수, 낭만주의의 적자

고충환

향수, 낭만주의의 적자


평원이, 평평하게 펼쳐진 풍경이 있다. 윤병운이 그린 거의 대부분의 그림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평원은 작가의 또 다른 모티브 중 바다와 통한다. 평원이나 바다는 그 가장자리를 화면 속에 다 가둘 수 없을 만큼 길다. 그래서 광활하고 아득하고 먼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은 중첩된 산곡이 깊고 심원한 느낌을 주는 것과 비교된다. 첩첩이 포개지면서 화면 안쪽에 깊이를 만드는 풍경과는 비교되는, 무한정 옆으로 길게 연장될 것만 같은 풍경. 그 풍경은 대개 풍경을 가름하는 선을 포함하기 마련인데, 바로 지평선이며 수평선이다. 그 선은 풍경을 가름할 뿐만 아니라 세계도 가름한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혹은 세계의 이편과 저편. 평원이나 바다 앞에 서면, 그렇게 서서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쪽에서 저쪽을 건네다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건네다 본다? 그렇게 건네다 보는 경험은 세계를 내가 서 있는 세계와 내가 쳐다보는 세계로, 내가 속해져 있는 세계와 내가 속해져 있지 않은 세계로 나눈다.

뭔가, 낭만주의의 유산인 알레고리가 떠오르지 않는가. 유한에서 무한을 본, 유한에서 무한을 상상한. 낭만주의자에게 유한한 세계는 무한한 세계를 보여주는 거울이며, 무한한 세계로 데려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유한한 세계는 무한한 세계의 거울이며, 가시적인 세계는 비가시적인 세계의 거울이며, 물질적인 세계는 비물질적인 세계의 거울이며, 내가 서 있는 세계는 내가 바라보는 세계의 거울이다. 낭만주의자는 그 거울에 비친 세계를 사랑했다. 세계보다는 세계의 상을, 이미지를, 허구(세계라는 허구!)를 사랑했다. 작가의 그림이 그렇듯,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시계의 침을 거꾸로 되돌려놓은 듯, 고답적인 느낌의 정적이 감도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폐허 이미지(거울)에 반영된 상실된 고대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작가는 무한한 세계, 비가시적인 세계, 비물질적인 세계,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고스란히 탑재된 상실된 유년(작가의 유년일 수도 있고, 인류 문명의 유년일 수도 있고, 융의 원형의식일 수도 있는)을 그리워하는 것 같고, 그림 속에다 그 그리움을 담아낸 것 같고, 그 과정에서 낭만주의의 알레고리를 계승한 것 같고, 그래서 낭만주의의 적자 같다.



이쯤에서 그림의 성격은 분명해진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이 알레고리를 상영하는 일종의 극장이며 무대다. 실제로 적지 않은 그림들 속에 극장에서나 볼 법한 바로크풍의 중후한 느낌을 주는 붉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작가의 그림은 왠지 영화 시네마천국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향수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원형을 향수로 본 영화와, 그림의 원형을 향수로 본 작가의 그림이 서로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커튼이 서서히 열리면서 작가가 감독하고 연출한 영화가 상영된다(작가의 그림들 중엔 커튼이 그려져 있지 않은 그림들도 많은데, 이 그림들 역시 커튼이 열린 이후 영화 속 한 장면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 영화는 다른 많은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비록 현실을 모티브로 한 것이지만, 그래서 현실을 닮았지만, 정작 현실(현실 자체)을 다룬 영화는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이 시야 가득히 들어온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위치에 관객을 위치시켜 우리 모두 작가와 같은 방향을 쳐다보게 한다. 지평선을 분기선으로 지평선 안쪽에서 지평선 너머를 쳐다보고 있는 작가 자신의 눈을 좇게 만든다. 그렇게 목격된 영화 속 장면은 현실을 닮았지만 왠지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알만한 모티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배열되고 배치되는 방식으로 인해 낯설어 보이고, 이로써 흡사 의식의 층위로 호출된 무의식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의미는 맥락을 따라 흐른다. 의미는 고정된 자리를 가지고 있지가 않다.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맥락이 흐르는, 흘러가다 멈춰 선 자리마다, 매번 그 순간으로부터 의미는 생성되고 수정되고 덧붙여지고 흐릿해지고 뚜렷해진다. 알만한 모티브들이 낯설어 보이는 것은 이처럼 맥락이 흐르기 때문이며,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는 탈맥락과 재맥락을 수행해 알만한 모티브들을 낯설게 만든다. 그러므로 진정한 독해는 알만한 곳(선입견을 재확인시켜주는 곳, 상식과 합리로 그 의미가 굳어진 곳)이 아닌 낯선 곳에 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깨져 나간 고대 석상과 열주, 큐피드 석상과 사자 석상이 상실된 고대를 그리워하는 낭만주의의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도기 인형과 아마도 옻칠 마감된 목마가 낭만주의 이후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미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골동애호로 나타난 그 향수의 종류와 성분은 일종의 상품미학(상품을 기능으로서보다는 미적취향의 문제로 본)에 연유한 것이란 점에서 역사적(서양의 고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이고 형이상학적인(무한하고 영원한 세계, 죽음과 내세와 부재의 메타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근거를 갖는 낭만주의의 향수와 다르다. 그렇다면 작가의 개인사적인 향수는? 바로 유년시절로부터 공수된 각종 장난감들이다. 낭만주의자의 향수, 중상층 계급의 향수, 그리고 작가 개인의 향수, 이렇게 향수의 세 지층을 작가는 하나의 화면 속에다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는 하나같이 향수하는 주체로서의 작가로부터 분유된 경우, 그래서 작가에게 속해진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 자신이 동시에 낭만주의자의 향수를, 중산층 계급의 미적취향을, 그리고 유년에의 그리움을 공유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그 향수는 알고 보면 그렇게 낯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보통사람이면 누구든 공감할 만한 것이고, 따라서 작가의 그림이 낯설면서도 왠지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친근한(알만한) 모티브들을 낯설게 만들고(배열과 배치를 통해서, 탈맥락과 재맥락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그 낯선 것이 알고 보면 저마다 품고 있던 향수를 일깨워주는 것임을 주지시키는 것이며, 그래서 재차 친근한 것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친근함과 낯 설음, 캐니와 언캐니(친근한 것이 불현듯 낯설어질 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오가는 반복 순환과정을 통해서 모호한 경계를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모호한 경계? 여기서 지평선과 수평선 앞에 다시 서 보자. 그 선은 진정 있는가. 세계를 이쪽과 저쪽으로 분기하는 그 선은 정말 존재하는가. 그 선은 혹, 관념이 만들어낸 선은 아닌가. 무한으로(무한정) 가지 않는 한, 끝내 붙잡을 수가 없는 선이 아닌가. 작가가 그린 그림 속 사물들이 불현듯, 다시 낯설어진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더기로 쌓인 책 그림에 부친, 오해의 탑이란 제목이다. 오해의 탑? 무더기로 쌓인 책들 중 어떤 책의 저자도 자신의 책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이고, 더욱이 일부러 오해를 종용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그렇고, 일반적인 저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파스칼 키냐르는 섹스와 공포에 대해 쓰면서 인문학을 헛소리에다 비유한다. 조르주 바타이유 식으론 낭비에, 자크 라캉 식으론 잉여에 해당하는 말이다. 프랑스 미학자 특유의 현란한 문체가 묻어나는 말인데, 공교롭게도 셋 다 프랑스 사람들이다. 이 말들은 예술의 기능과 용도와 쓰임새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 기능은 의미를 닫는 것이 아니라 여는 일이다. 기억과 망각 사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 현실과 비현실 사이, 그리고 때로는 그림과 그림 사이(흡사 액자소설과도 같은 일종의 이중그림이며 다중그림)에 부유하는, 작가가 그린 그림 속 풍경들(그리고 사물들)은, 만약 오해를 의미를 여는 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그 의미가 아니라도 상관없지만, 여하튼), 그 일을 통해서 모호함의 경계를 더 멀리까지 밀고갈 수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모호해진 경지로부터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어떤 비전을 열어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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