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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묵 / 국수와 빵

고충환

국수와 빵


조성묵은 메신저의 작가로 알려져 왔다. 메신저는 작가의 분신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앉을 수 없는 의자 형태의 조형물로서 마치 발굴된 유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흡사 청동기 시대에 제사장이 제사를 집전할 때 사용한, 의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제기를 연상시키는, 실용적 기능보다는 상징적 기능을 하도록 고안된 물건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빵을 소재로 한(엄밀하게는 빵의 질료를 흉내 낸 이미테이션) 근작에서 메신저의 실체는 보다 분명해진다.

아마도 작가의 자소상이지 싶은, 플록코트 혹은 바바리를 걸치고 중절모를 눌러 쓴, 그리고 안경 쓴 중년의 남자가 그 앉을 수 없는 의자의 곁을 지키고 서 있다. 메신저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일까. 빵의 진화(이번 전시의 주제이기도 한)를, 사물과 의미의 진화를, 단순히 진화라기보다는 빵으로 대변되는 사물의 열린 의미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의자 형태의 조형물이 실용적 기능보다는 상징적 기능을 하도록 고안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빵은 먹음직스런 외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빵 자체로서보다는 이렇듯 사물의 열린 의미를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는 스스로 부풀어 오르는 성질을 가진 자기발포성수지(폴리우레탄)를 소재로 각종 형태를 만든 다음, 그 표면을 불에 그을려 마치 갓 구워낸 먹음직스런 빵과 같은 색감과 질감을 연출했다. 아마도 제빵기술자들이 실제의 빵을 재료로 해서도 이렇게 형태를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만든 빵 오브제들로 채워진 전시공간은 마치 유년시절 보았던 그림책 속에나 나올 법한 과자로 만든 집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실제의 빵집에서와 같은 부드럽고 포근하고 따뜻한, 그리고 우호적인 분위기에 감싸이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상상력이 열어준 판타지를 매개로 사물이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세계, 사물이 어떤 의미로 고정되기 이전의 세계, 사물의 관계가 재편되고 그 의미가 유동적인 세계로 데려다준다.

빵의 진화란, 사물의 진화란, 의미의 진화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닐까. 사물의 의미는 고정돼 있지가 않다. 의미는 사물을 따라 흐른다. 이렇게 빵은 먹는 빵으로부터 보는 빵으로, 촉각적이고 후각적인 빵으로, 그렇게 감촉돼 오는 촉감과 냄새로 부드럽고 은근한 기분에 감싸이게 하는 빵으로, 상실된 유년을 되돌려주는 빵으로, 상처를 위로하고 관계를 바로잡아주는 빵으로 진화한다. 작가가 강조하는 소통을 매개시켜주고, 그 계기를 터주는 빵이다. 이렇게 빵으로 만든 화분에 화초 대신 프로펠러가 자라고, 펼쳐진 우산이 피어난다.아마도 만개한 꽃을 연상시키는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한 것일 터인데, 이로부터 일종의 유머와 위트가 감지된다. 꿈꾸는 의자 혹은 새가 되고 싶은 의자도 있다. 의자의 등받이가 날개로 진화하고, 그 의자의 안쪽에는 아마도 그 새가 품었을 법한 알들이 보존돼 있다. 여기서 의자를 일종의 작가 자신의 초상으로 이해한다면, 이처럼 새가 되고 싶은 것은 사실은 작가 자신의 소망이고 바람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비전이나 문명비판을 암시하는 작업도 있다. 이를테면 접시 형태의 안테나 안쪽에 전선을 탯줄 삼아 태아가 웅크리고 있다. 문명비판? 신인류?

작가는 청동주조 의자와 빵 오브제 사이에 국수를 소재로 작업한 적이 있다. 설치를 위해 전시장 바닥에, 때로 오브제 위에 국수를 심는데, 마치 논에 모를 심듯 심었다. 청동주조 조형물과 국수와 빵. 견고한 소재와 부실한 소재. 영원할 것 같은 소재와 일시적인 소재. 국수와 빵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작가는 유별날 것 없는 일상사에 관심을 두고, 덧없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먹고 보고 만지고 냄새 맡아지는 것들에 애착을 갖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어떤 의미 있는 오브제를 생산한다기보다는, 혹은 그 이상의 수행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그 의미가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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