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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진 / 관계의 망 속에서 존재의 비의를 묻다

고충환

관계의 망 속에서 존재의 비의를 묻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현대를 비극을 상실한 시대로 정의한 이후, 그리고 크리스토퍼 라쉬가 <나르시시즘의 문화>에서 현대를 개인주의와 자기애에 연유한 미시담론의 시대로 정의한 이후, 소위 가벼움의 미학은 눈에 띠게 동시대를 관통하는 트렌드가 되었고, 지배적인 정조로 자리 한 것 같다. 이런 표면적이고 감각적인 시대에도 어쩔 수 없이 소위 거대담론의 세례를 받은 세대는 있기 마련인 것이며,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거대담론을 체질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개인은 있기 마련이다. 차경진이 그렇다. 비록 근작에서 일정한 변화가 모색되고는 있지만, 그마저도 사실은 거대담론의 외연이 확장된 것으로 본다면, 거대담론이야말로 작가의 조각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주제의식이며 정조로 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는 거대담론을 체질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세대에 속하고, 온갖 가벼운 재료들과 손쉬운 방법을 멀리한 채 고집스럽게 직조에 매달리는, 그래서 자기 손으로, 몸으로 직접 일궈낸 조각에 천착한다. 그렇게 천착된 조각은 때로 진지하고, 때로 무겁고, 더러는 아프다. 그 진지함으로, 그 무거움으로, 그 아픔으로 작가의 조각은 공감을 자아내고 폐부를 파고든다.

이런 거대담론은 그동안 작가가 지나쳐온 작업의 주제의식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확인된다. 이를테면 <문명-발굴, 묵시-신들의 시간>(1996)에서 작가는 고대문명을, 잊혀진 제국을 발굴한다. 그런데 그렇게 발굴된 제국은 신들의 제국이다. 그 신들이 묵시를 가지고 되돌아온 것이다. 묵시, 파국, 카타스트로피, 홀로코스트를 경고하는 신들을 되불러온 것. 크레인이 아니면 움직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아름드리 나무둥치를 몸통 삼아 여기저기 솟아오른 거대 두상들이나, 무슨 신전의 열주마냥 도열해 있는 신들의 얼굴이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 같다. 이로써 작가는 현실을 밀어내고 그 빈자리에 신들을 세운다. 진작부터 현실보다는 신들과 대화하고 있었던 것. 신을 상실한 시대에 신을 되불러오고, 표면적이고 감각적인 시대에 본질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었던 것.

여기서 지엽적인 차이를 제외한다면, 신이나 본질은 실존과도 그 의미가 통한다. 바로 <실존의 그림자>(2006). 꼭 10년 만에 들고 나온 주제다. 실존의 그림자? 주지하다시피 실존이란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인식을 말한다. 그렇다면 실존의 그림자란 현실 혹은 현실인식의 그림자가 되는 셈이고, 그 그림자가 곧 가면으로 나타난다. 그러고 보면 전작에서의 신 역시 알고 보면 문명의 그림자 혹은 현실의 그림자였음이 밝혀진다. 작가는 항상 이런 식이다. 그림자에 빗대어 그 실체를 조망하는 것. 이런 태도는 현실도피라기보다는 일종의 유비적 표상(신과 가면)을 매개로 현실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방식인 것이며, 오히려, 그리고 나아가 현실의 심층을 파고드는 방법인 것. 감각적 현실의 더께를 걷어내고 현실 자체에 직면하는 것. 전작에서의 신이 신을 상실한 시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호출된 것이라면, 근작에서의 가면은 또 어떤 현실인식의 표상일 수가 있는가.작가의 고백에 따르면, 작가는 근 20년 넘게 이 가면이란 주제 혹은 소재에 천착해왔다. 해를 거듭하면서, 전시를 거듭하면서 이 소재를 심화시켜왔고, 그 만큼 강한 애착을 가져왔고, 그런 만큼 작가의 다른 작업들 근저에 흐르는 핵심이며 근간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도 역시 예외 없이 이 가면은 등장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가면에 이렇게 집착하는가. 그리고 가면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면은 작가의 초상이며, 시대의 초상이다. 작가 자신의 자의식의 표상(거울)이며, 작가가 시대를 진단하는 시대의 표상(거울)이다. 가면은 페르소나다. 그리고 페르소나는 또 다른 인격이며, 제2의 정체성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 개의 인격을, 두 개의 정체성을,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자기에게 속해져 있다면, 또 다른 하나가 사회에 내어준 것. 쉽게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인격이며, 정체성이며, 얼굴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에 대해 웃으면서, 동시에 속으로는 울 수도 있다. 그리고 이때의 웃음과 울음은 일정정도 서로 격리된 것이어서 서로의 영역과 범주에 가닿지 못한다. 사회적 기호로 환원되는 얼굴(롤랑 바르트라면 스투디움이라고 했었을)과 지나지게 개인적인 것이어서 공유할 수 없는 얼굴(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에 해당하는). 어쩌면 작가는 가면을 매개로 이런 이중분열과 자기소외(자기 스스로를 낯설다고 느끼는 경험)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가면은 주술적이고, 그 주술적 능력은 실제와 이미지와의 동일시에서 나온다. 이를테면 스스로를 곰 족이라고, 혹은 여우 족이라고 여겼던 원시부족들이 그 기원이다. 곰 가죽을 뒤집어쓰거나 여우머리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이로 인해 곰처럼 용맹해지거나 여우처럼 꾀발라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가면의 현대적 기능이나 해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가 않다. 익명성 뒤에 숨는 것인데, 아무런 일도 없는 양 하는 가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얼굴을 숨기는 것. 그러므로 심지어는 진한 화장일수록 그만큼 깊은 슬픔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화려한 치장 또한 그 화려한 강도만큼의 아픔을 내장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가 않을 것이다. 처음에 작가의 가면은 이렇듯 익명성의 표상처럼 보이고, 이중분열과 자기소외의 증거처럼 보였다. 그런데, 점차 겉 얼굴과 속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마침내 내면이 외면이 되는 경지로 진화하는 것 같다. 내면에 숨겨져 있어야 할 상처가 철갑의 가면 위로 불쑥불쑥 디밀어지고, 스멀스멀 새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무표정한 가면들이 얼굴처럼 표정을 갖기에 이른다. 우울한 듯도 보이고, 암울한 듯도 보이고, 상처를 온 얼굴(얼굴이 된 가면) 위로 발산하는 듯도 보인다. 때로 상처는 가면 위로 웃자라는 나뭇가지로 변태되기도 하고, 그렇게 웃자란 나뭇가지들이 무슨 덤불 마냥, 거미줄 마냥 가면을 온통 뒤덮어 칭칭 감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상처투성이의 가면들이 모여 존재의 집을 이룬다. 존재의 집은 바로 상처의 집이다. 그 집에서 가면들은 더 이상 무표정하지도 무감하지도 않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상처가 나뭇가지로, 덤불로, 거미줄로 변태된다는 사실. 작가에게 존재란 다름 아닌 상처와 동격인 것이며, 그 상처가 자연과 만나지면서 치유될 수가 있다는 암시. 이후 작가의 작업이, 특히 근작에서 자연을 소재로 한 작업으로 변화하게 되는 사실상의 전기 내지는 계기가 이 지점에서 잉태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가면들이 모여 존재의 집을 이룬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면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바로 <숲의 욕망>(2007)이다. 쓰다버린 폐목들을 추슬러 가면들의 숲을 일궈냈다. 그 가면들이 욕망하고 숲이 욕망한다. 그 가면들의 숲은 전작에서의 가면들에 비해 더 가면답다. 적어도 외관상 더 무표정해 보이고 더 무감동해 보인다. 아마도 상처를 침묵 속에 내재화한 탓일 것이다. 여기서도 숲은 이중적으로 표상된다. 즉 침묵하는 숲의 깊이만큼이나 깊숙하게 상처를 숨겨놓은 것 같고, 그러면서도 그 상처를 깊이 보듬어 치유하는 것도 같다. 이런 이중성이 오히려, 왠지 어떤 전조를 암시하고 있는 듯, 불안하고 무겁고 낯선 느낌을 준다. 그 숲은 도대체 무엇을 욕망하는가. 자연으로의 회귀? 자기상처와의 화해? 무표정한 탓에, 침묵하는 탓에 그 욕망의 강도는 더 크게 다가오고, 더 암시적으로 와 닿는다.

그리고 작가는 이 일련의 가면 시리즈와 근작 사이에 무슨 막간처럼 <두 얼굴> 시리즈를 포치해놓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 소재도 변하고 형식도 변하는, 전작과 근작이 연이어지면서 차이나는 어떤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청자와 호리병과 잔과 같은 용기들이 등장하고, 가면이 프로필 형태의 얼굴로 대체되었지만 익명성은 여전하다. 특정의 얼굴을 묘사한다기보다는 추상화되고 양식화되고 기호화된 얼굴이란 점에서 가면과 통한다. 일종의 부조 형식의 반입체로 구현된 용기 속에 투각된 두 얼굴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마주보기?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는 일. 마침내 작가는 자기와, 자기상처와 화해한 것일까. 타자를 인식한다는 것, 그것은 곧 관계를 인식한다는 것이며, 관계 속에서 나와 너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하한 경우에도 가면은 자기인식에 머물러 있을 뿐. 속 얼굴과 겉 얼굴로 이중 분열된 자의식의 표상일 수 있을 뿐. 설령 그 가면이 자기가 아닌 타자의 것이라 해도 그 경우는 결코 달라지지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리즈 작업에서 마주보는 두 얼굴이야말로 작가가 진정 자기와 화해하고 관계 속으로 뛰어들게 된 상징적 사건처럼 보인다. 그 화해의 징후인 양 그 형식 역시 다소간 정리돼 보이고, 덜 격렬해 보이고, 하나의 매스로 다가오고, 적당히 장식적이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인드라망과 관계의 연금술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업들을 풀어낸다. 인드라망이란 불교용어로서,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하는 구슬그물을 말한다. 그물코마다 구슬들이 꿰어져있어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고 투영한다. 나는 너를 반영하고 너는 나를 반영하며,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반영하고, 정신은 물질을 물질은 정신을 반영하고, 가시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을 반영하고, 자연은 문명을 문명은 자연을 반영하고, 음은 양을 양은 음을 반영하면서 온갖 우주 삼라만상이 서로를 되비친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나는 너 때문에 존재하고 너는 나로 인해 비롯된다는 연기설과도 통한다. 존재하는 것치고 저 홀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상호영향관계로 묶여있다. 이분법적 구별이, 이를테면 선과 악, 미와 추의 구별이 다만 마음의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은 하나다. 이분법적 사유체계와는 구별되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 결국 인드라망이란 단독자가 아닌, 개체가 아닌, 관계 속에서 존재를 파악하게 해주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드라망과 관계의 연금술이란 주제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된 주제인 것.

한마디로 인드라망의 형식이 그물이라면, 그 내용이 관계다. 작가는 그 형식과 내용을 자연에서 찾고, 특히 잎 살이 탈락된 채 잎맥만이 오롯한 이파리에서 찾는다. 흡사 실핏줄처럼 촘촘하게 연이어진 잎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수만 갈래의 길이 나있지만, 그 길들 모두가 하나의 길로 연이어지고, 하나의 이파리라는 전체에 아우러진다. 마치 존재의 길들이 각양각색이지만, 그 천태만상의 길들이 어김없이 우주적 차원의 섭리에 아우러지는 것처럼. 자연 속에 존재의 비의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고, 작가는 그 비의를 찾아낸 벅찬 감동을 조형으로 옮겨 놓았다. 길고 짧은, 가늘고 굵은 동선들을 일일이 용접해 붙여 헐벗은 잎맥을 고스란히 재현해놓았다. 이 조형은 작가의 전작과 근작을 아우르는 다른 작업들과는 한눈에도 구별되는 또 다른 한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메스를 결여한 일종의 망 조각으로 부를 만한.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선조에 비해서도 현저하게 물질감이나 실체감이 희박한. 그리고 그 실체 없음이나 희박함이 어떤 아우라를 생성하면서 감동으로 다가오는.

의미론적으로 인드라망은 관계의 연금술과 통한다고 했다. 작가는 그 연금술의 계기를 법정스님이 평생을 걸쳤다는 누더기 옷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누더기 옷 그대로를 조형해 놓았다. 동판 조각들을 되는대로 잘라낸 후 그 조각들을 용접으로 연이어 붙여나가는 식으로 하나의 전체 형상을 만든 것이다.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일궈낸다는, 소위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착안한 것인데, 사실 이 방법과 과정은 그대로 작가의 전형적인 방법이며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가면작업들이 다 이런 식으로 제작된 것들인데, 원래는 조각 천을 바느질해 상보도 만들고, 이불보도 만들었던 어머니에게서 착상된 것이라 한다. 여기서 관계의 연금술이란 주제의 실체가 분명해진다. 조각 천들이 모여 상보가 되고, 누더기 천들이 모여 승복이 된다. 그리고 정작 이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미로는 그 상보에 깃들여있는 어머니의 초상이고, 그 누더기 옷에 스며들어 있는 법정스님의 초상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상보에, 그 누더기 옷에서 배어나는 사람의 향기, 바로 그 향기가 연금술이다. 그래서 작가가 마치 바느질하듯 동판조각들을 연이어 붙이는 방법을 취하는 한 그 향기는 앞으로도 계속 작가를 맴돌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는 똑같은 방법으로 조개를, 그리고 청자, 달항아리, 호리병과 같은 옛 그릇들을 조형해놓았다. 조개가 소재로 차용된 것은 조개의 형상에 탑재된 자연의 오묘한 질서에 매료됐기 때문이고, 특히 그릇들이 소재로 차용된 것은 그것들이 비어있다는 것이 이유다. 인드라망도 그렇고, 관계의 연금술도 그렇고, 비어있다는 것도 왠지 불교적 세계관을 불러일으키고, 그 세계관을 통해본 자연과 존재를 조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동안 꽤나 무겁고 때로 어두웠던 주제와 소재에 비해보면,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금은 홀가분하게 관조하는 식으로 작업의 양상이 변해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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